메시야, 흑암에서 빛으로!(사 9.1-7)

20010909(묵상)

  

 

 

메시야, 흑암에서 빛으로!

Isa. 9.1-7

  

   본문 관찰

 

   전암후광(前暗後光, 1-5)

     A “주께서 하시며 하셨으므로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3)

        ①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시기 때문이다(4): 압제로부터의 해방

        ② 불에 섶 같이 사라지기 때문이다(5): 전쟁의 패지

           메시야(Messiah, 6-7)

        ③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기 때문이다(6): 한 아기

     A'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7b)

   

 

영원하신 그 이름, 예수

 

   [Messiah text]

   탄 생 | 7.14, 8.8, 9.6-7

     임마누엘(7.14-16) : 그 백성과 함께 고난

     아기(9.1-7): 그 백성을 구속

   사 역 | 11.1-10, 35.5-6, 61.1-3

     싹(11.1-16): 그 백성을 통치

     종(42.1-9, 48.5-6, 50.4-9, 52.13-53.12): 그 백성을 위한 고난

   심판주 | 63.1-6, 66.15-19

 

빛은 땅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온다.

세상이 어둠(8.20-22) 가운데 있을 때(이것은 죄로 말미암았다), 사실 어둠을 만든 것은 유다의 타락과 범죄 때문이지만 흑암을 광명으로 역전시키거나 회복시키는 것은 죄인 스스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의 힘과 능력 밖에 있다. 이사야의 탁월한 통찰과 문학적 터치는 명암(明暗)의 교차 기법에서 증폭된다. 흑암(A)과 광명(B)의 대조가 그것이다:

 

   A 흑암(1.1-4.1) B 광명(4.2-6)

     A' 흑암(5.1-30) B' 광명(6.1-7.16)

       A'' 흑암(7.17-8.22) B'' 광명(9.1-7)

         A''' 흑암(9.8-10.34) B''' 광명(11.1-12.6)

 

흑암(A)이 광명(B)에 의해 어김없이 물러가는 것, 그 중심에 임마누엘(메시야)이 잉태되고 싹이 나 자라 결실할 것이 예고되고 있음이 이사야가 비추는 한줄기 빛이다. 다시금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찬란한 빛이 유다 온 땅을 비추기 시작한다. 어둠은 물러가고 새 날이 올 것이다. ‘임마누엘’(7.14)에서 그의 이름’(6)의 영광을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실 것이다. 마침내 유다의 어둠에 메시야의 빛이 임하기 시작한다.

   

 

전암후광(前暗後光, 1-5)

 

   “전에 고통 받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이 비치도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즐거워하오니

 

죄는 언제나 고통과 흑암과 멸시와 사망을 동반한다(1-3). 그래서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4a)의 지배 아래 있었다. 이방의 미디안의 날’(4b)이 이와 같은데 어찌 된 것이 유다가 미디안처럼 살게 된 것이다. 이게 죄(). 유다와 미디안(이방)의 경계가 없어지고, 그래서 세상의 방정식들이 유다의 법칙처럼 되어버린 것, 이것이 어둠이 휩쓰는 사회와 개인의 실상이다. 더 근본적으로 보면 죄를 지어서 죄인이기보다는 죄인이기에 죄를 범하며 산다. 이쯤 되자 죄에 대한 자각이 희미해져 버렸고, 죄에 섞이지 않으려는 면역 기능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이사야가 유다의 궁극적인 희망을 임마누엘이신 메시야의 오심에서 찾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통과 멸시라는 어두움이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1a). 예수님께서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심으로 이 예언은 성취된다(1b-2 4.13-17; 4.14, 2.11 참조). 마침내 참 빛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 속으로 들어오셨다(1.1-10). 선지자는 어둠을 넘어 빛의 은혜 앞으로 나아오는 것만이 유다의 유일한 희망임을 외친다. 창성과 즐거움과 추수의 빛이 어두움을 몰아낸 유다의 온 땅을 빛나게 할 것이다(3). 마침내 평화의 날이 선포된다(5).

비록 아직은 어둠에 있는 유다 백성들이지만 은혜의 을 비추신다. 하나님은 거기까지 유다의 미래를 그리고 계신다. 죄를 지적하시며 마땅한 대가를 지불하게 하시면서도 동시에 회복의 날을 준비하시는 하나님, 이 둘의 균형(balance)이 멋지게 느껴지는 것만큼 나 역시 편향되지 않은 삶의 질을 유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메시야(Messiah, 6-7)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이름은

    무궁하며 굳게 세우고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라.”

 

흑암이 없는 빛의 약속(1-5)은 메시야, 한 아기의 탄생을 알리는 어인(御印)으로 확증된다(6-7). 이렇게 해서 임마누엘’(7.14)이 좀 더 진전한다. 이 세상에 주셔서 태어나게 하사 우리의 통치자가 되실 것이니 그 이름은 기묘자’(wonderful), ‘모사’(counsellor),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 부르게 될 것이다. 그의 나라(정사, 왕권, government)와 평화는 계속해서 성장할 것이다. 그는 다윗의 왕위에 앉아 그 나라를 공평과 정의로 영원히 다스릴 것이다.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1.1). 이 모든 계시와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이 친히 이루실 것임을 분명히 하신다(7b). 유다의 열심과 하나님의 열심이 얼마나 다른가를 보게 된다.

희망이란 단어 자체가 사치스러울 정도로 유다는 그야말로 흑암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메시야의 오심뿐이다. 이것이 지금 이사야가 전하는 메시지의 핵심이다. 특별히 그의 왕권이 점점 더 커지고”(7a, 표준새번역)라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자랄 것을 예고하는 것은 주님의 비유에서도 그대로 발견된다(13.31-33).

조금’(1.8-9) 남겨 두신 것이 남은 자’(6.11)로 이어지고, 그것이 다윗의 후손을 지나 예수님을 통해 확장될 것을 말씀하는 천국을 예표(豫表)하는 그림은 신비롭기만 하다. 그것만큼 죄의 세력과 힘은 약화되고 줄어들 것이다. 여자의 후손이신 메시야가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3.15). 아무리 우리의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벧전5.8) 찾는다할지라도 이미 승부는 끝났다. 우리는 이기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긴 싸움을 마무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계시의 빛이 이사야의 메시지 안에 이미 담겨져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 그지없다.

   

 

평강의 왕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1.9-10)

 

흑암을 빛으로 몰아내시겠다는 게 하나님의 생각이신 것 같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어둠을 만드는 것뿐이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빛으로 역전시키신다. 결국 사망의 어둔 권세를 물리치고 생명의 밝은 세상을 여는 것은 어둠 쪽에 있는 인간 편에서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 쪽에서 주도권을 잡으시고 성취하시는 사건이다. 죄로 말미암은 나의 무거운 짐들을 -고통, 멸시, 흑암 등- 주님이 해결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나를 영화롭게 하시고, 추수하는 즐거움같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며 살도록 하셨다. 주님은 기쁨과 즐거움의 근원이 되신다. 내가 잘나고, 열심히 살고, 능력이 있고, 잘 관리를 해서 살아가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멍에와 채찍과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어 주셨기 때문이다(4).

소망이 끝난 자리에서 다시 아들의 신분과 축복된 자리로 회복되는 것은 나로서는 불가능하다. 내가 걸어서 아버지께로 나아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품꾼의 하나로 여겨만 달라는 처절한 회개를 불쌍히 여기셨을 것이라고 마음대로 추측하지 말자. 모든 것이 다 무너졌고 파괴되었으나 나를 알아본 분은 주님이셨다.

다시 돌아갈 집이 있고, 여전히 따뜻한 품으로 맞아 줄 아버지가 있다는 것은 큰 복이다(탕자의 비유). 만신창이가 된 나를 아무런 조건 없이 용납하시고 넓은 가슴으로 품으신 분, 죄의 토지에 씨앗을 뿌려봐야 거둘 것이 죄 뿐이지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사 세상을 구원하시는 영생의 열매를 거두시기를 기뻐하셨다. 이미 메시야가 오시기 700년 전에 이를 친히 작정(섭리)하시고 이 영광의 계시를 이사야를 통해 발표하신 하나님을 생각해 본다.

내 생각대로 아무 희망이 없다고 속단하지 말자. 황무지에서 장미꽃을 피워내시는 분이 하나님 아니신가. 하나님보다 앞서서 결정하고, 판단하고, 그리고 흑암과 광명을 필요에 따라 끊임없이 넘나들며 사는 못난 나를 놀라우신 분이신 기묘자앞에 고발한다. 나의 풀리지 않는 어리석음과 주책없음, 그리고 변덕이 죽 끓듯 조석(朝夕)으로 흔들리는 나의 상담자가 되시는 모사만이 해결하실 수 있음을 믿는다. 나는 약하고 부족하지만 주께로 나아가기만 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평화가 내 안에 가득하게 채워질 것을 또한 믿는다.

나의 초라한 절망과 결별하고 주의 위대한 희망 앞에 선다. 내 추하고 더러운 영혼에도 메시야의 빛이 임하신다니 이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언제쯤이면 빛으로 빚어진 내 모습을 주님께 보여드릴 수 있을까. 아직 덕지덕지 남아있는 어둠과 죄의 파편들이 나를 비웃고 있지만 상관없다. 빛을 통해 그것이 얼마나 더럽고 추악한 것인가를 알았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이미 시작된 이 거룩한 영적 싸움을 해 볼 만 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니 말이다. 임마누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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