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파도타기(사 8.11-22)

20200721(묵상)

  

 

 

하나님의 파도타기

Isa. 8.11-22

  

   본문 관찰

 

   여호와께서

   이 백성의 길로 가지 말 것을

   반역한 자가 있다고 하지 말며

   두려워하지 말며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함정과 올무가 되시리니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를지니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A 임마누엘(8b): 유다 구원(5-8)

      X 이방 심판(9-10a)

   A' 임마누엘(10b): 유다 구원(11-14a)

 

비바람이 몰아친다고 해서 태양이 없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구름 위에 태양은 있다. 잠시 구름이 태양은 가리운 것뿐이다. , 유다가 심판이라는 시련의 폭풍우를 만났다고 해서 하나님이 없어지신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예표(1-10) 뒤에 여전히 임마누엘’(8b,10b)로 함께 계신다. 그것만큼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 백성의 길’(11)은 필경 패망한다(9-10). 그래서 금지 명령이다.

이사야는 이 땅에 두 부류의 사람이 공존한다는 것을 말한다. 첫째는 하나님의 은총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는 이들을 이 백성이라고 표현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떠났다. 진노하심 아래에 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다. 이미 죽은 자들이다(2.1-3). 둘째는, 하나님의 은총 안에 있는 너희’(12)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비록 현실은 어렵고, 고난이 계속되고, 시련과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할지라도 비구름 위에 도도히 떠 있는 태양을 보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선포한다.

   

 

여호와께서 내게 알려주시며 이르시되(11-15)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

    그가 성소가 되시리라.”(13-14a)

 

이사야는 다시 균형을 잡는다. 그는 왜, 아무 것도 달라진 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담대할 수 있을까? 강력한 메시지를 선포하면서 말이다. ‘그랬다 카더라정도의 전달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만났고, 또한 그 말씀을 직접 받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생물학자가 개미를 연구한 결과를 읽은 적이 있다. 첫 번 째 연구는 개미들이 100%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그런데 더 정확하게 관찰해 보니까 약 20% 정도만이 진짜로 일을 위해 분주하고, 나머지 약 80%는 열심히 움직이는 것 같은데 그냥 분주하게 오고 가는 것에 불과했다. 두 번 째 연구는 진짜배기 20%를 모아서 한 군집을 형성해 보았다. 이제는 100% 모두 다 열심히 일하면서 군락을 형성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기대는 하나의 이론에 불과했다. 여전히 20% 정도만이 진짜로 열심히 일하더라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개미만의 문제는 아니다. 하나님은 프리즘처럼 다양한 통로를 통해서 자신을 알리신다. 그러나 개미의 경우에서처럼 모든 성도들이 다 임마누엘의 은총을 따라 살지는 못한다.

이사야의 표현대로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은 상식적인 시류에 편승하여 살아가고 있었다(11-12). 하지만 진정으로 걸어가야 할 길은 13-14a절 처럼이다. 아람을 이기는 길이 앗수르에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피할 곳이 될 것을 믿는 사람은 이 백성의 길로 행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사람과의 맹약을 의지하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결국 하나님이 아닌 것에서 해답을 찾던 자들은 함정과 올무에 빠질 것이며, 넘어져 걸릴 것이며, 급기야 사로잡히고 말 것이다(14b-15). 이처럼 집요하게 말씀하시고, 선지자까지 동원하여 당신의 뜻을 전달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은 곧 현실이 될 것이다.

 

 

증거의 말씀을 따를지니(16-22)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17)

 

이사야의 소망이다. 이것은 또한 그의 믿음이다. 세상이 아무리 혼돈일지라도 하나님을 기다리겠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밀봉하고 봉인해서, 읽지 못하게 하시겠다 하셔도 말이다. 나 역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그러나 약속된 임마누엘의 은총을 기다리며 살아가는가? 혹시 비구름이 떠 있다고 해서 태양이 없다고 소리 지르는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지는 않는가?

좀 급하게 보채지만 말고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겠다(12.1-3). 세상을 보는 나의 태도, 세상을 판단하는 나의 시각,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나의 입장은 현재(지금) 나의 영적 상태(수준)와 언제나 비례한다. 내가 믿고 확신하는 것만큼 말 할 수 있고, 또 외칠 수 있고, 그렇게 살 수 있다. 이것이 패망할 이 백성의 길을 동경하거나, 슬며시 거기에 한 발을 내려놓는 모습을 보이는 거품신앙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길이다.

진짜는 어떠한 형편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본다. 이 세상의 그 어떠한 형편에 좌우되지 않는다. 폭풍우에 잠시 옷을 젖을 수는 있어도, 그 심령에는 결코 빗물이 고이지 않는다. 금이 진짜인가, ‘짜가인가를 알아보려면 불 속에 넣어 보면 된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한다. 나는 어느 편으로 기울고 있는가? 내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 세상 백성의 길을 향해 빼꼼히 고개를 돌리고 있다는 것은, 바로 그것만큼 하나님에 대한 신뢰(믿음, 확신)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자증(自證)하는 것이다. 그러다가는 정녕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심한 흑암 가운데로 쫓겨 들어가”(20b-22)고 말뿐이다.

때문에 희망은 오직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를지니”(20a)로부터 피어난다. 이사야는 유무형의 압력과 괴로움 앞에서(18-19) 흔들리지 않는다. 자신이 선지자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당(신접한 자, 마술사)을 찾는 세태를 보면서 얼마나 괴롭고 가슴 아팠을까. 그럼에도 묵묵히 말씀의 빛만이 유다의 유일한 희망임을 결코 외면하거나 포기하거나 흐려지게 만들지 않는다. 어두워지는 하나님의 길을 빛으로 밝히기 위해 그는 온 몸으로 저들을 향해 설교한다(19 20-22).

자신의 아들들의 이름까지 하나의 예표가 되게 할 정도로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선지자의 사명에 충성한다. 누가 이해해 주지 않아도, 결코 화려한 영광의 길이 아니어도, 모두가 자신의 설교를 통해 변화되지 않아도,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환난과 흑암과 고통 속에 떨어져 빠져나오지 못하게 되는 일이 불을 보듯 뻔하여도 그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어떻게 사는 것이, 그리고 무엇으로 사는 것이 건강한 삶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묵상이다.

   

 

부스러기 묵상

 

   “그런데도, 사람들은 너희에게, 속살거리며 중얼거리는

    신접한 자와 무당에게 물어 보라고 한다.”(19a, 표준새번역)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이사야의 마음이 그런 것 아닌가 싶다.

아들들의 이름(18)에서, 그리고 이사야 비토그룹(19)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그것이다. 장남 스알야숩(Shear-jashub, 7.3, ‘남은 자가 돌아올 것이다.’)과 차남 마헬살랄하스바스(Mahershalalhasbaz, 1-4, ‘노략이 속히 올 것이고 희생이 임박했다.’)에게 명명된 이름은 서로 반대되는 의미가 있다. 아마도 이것은 입방아를 찢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좋은 메뉴였을 것이다. 이 고난과 고통은 언제 끝난다는 말인가, 너의 독설 때문에 말이 씨가 되어 패전국 신세가 될 것 아닌가, 누구를 위한 선지자인가, 무엇보다 이름을 부르며 살아야 하는데 그럴 때마다 사람들의 말투와 얼굴 표정이 보이는 듯하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친히 명하여 주신 작은아들의 이름은 이사야에게도, 그 아들 본인에게도 좀 그랬을 것 같다. 이렇듯 두 아들은 하나님의 분명한 징조와 예표가 되는 사인(sign)이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하나님의 경고판이 아닌 신접한 자와 무당에게 물어보라고 말한다(19a). 이것은 이사야의 입장에서 보자면 모독이고, 무엇보다 민감한 사안이다. 하나님이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여론이 만만찮게 형성되어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사야의 설교와 목회를 인정하지 않고 싶은 마음들이 그 대안으로 생각하는 것이 뭐냐면 신접한 자와 무당이다. 마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14.1-4)는 불신앙이 득세하면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포기하겠다고 말한다. 이것이 임마누엘 대망론(7.14, 8.8b,10b) 앞에서 보이는 유다의 반응이다. 마치 엔돌의 접신녀를 찾는 사울왕의 타락처럼 말이다(삼상28.3-14).

이사야의 고통이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모세 역시 리더쉽의 도전에 끊임없이 노출되었었고, 바울 역시 사도권의 논쟁에 끝까지 휩싸였었고, 예수님은 더 말이 필요 없을 정도다. 어느 시대나, 누구에게나, 설령 모세와 이사야와 바울처럼 위대하게 쓰임 받는다 할지라도 그들의 사역이라는 나무를 흔드는 무리들은 그들과 함께 살았던 가장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이 아닌가. 지금 이사야가 그렇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께 구하고, 증거의 말씀을 좇는 것만을 담담하게 말하고 있다. 이 부분이 좋아 보인다. 우리시대 교회를 가슴에 품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나에게도 언제나 눈물이 있다. 어찌할까. 과연 어떻게 목양(牧羊)하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과 내게 주어진 소명의 길이 될까. 이사야의 목회 환경을 찬찬히 드려다 보면서 또 다른 새싹들이 내 영혼의 뜨락에 하나 둘 고개를 내미는 것을 느낀다. 20년을 넘게 오직 한 길을 초지일관(初志一貫) 걸어오는 이사야에게서 조그마한 희망을 본다. 이렇듯 결코 신바람 나지 않는 여건에서도 여전히 그의 입술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머금고 있음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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