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 프로젝트.Immanuel Project(사 7.10-25)

20200719(묵상)

  

 

 

임마누엘 프로젝트(Immanuel Project)

Isa. 7.10-25

  

   본문 관찰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라.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여호와께서 임하게 하시리니 곧 앗수르 왕이 오는 날이니라

   그 날에는

   

 

God Be With Us

 

하나님은 불의하고 악한 왕 아하스를 찾아오신다(10-11, 왕하16.2-3).

아마 다윗언약’(2,13, 대상17.11-15, 대하7.11-22)을 기억하신 것 같다. 하나님은 오늘도 아하스의 후예들로 살아가는 인생(교회)들을 향해 진노하시는 것보다,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6.13)처럼 남은 자를 두실 것이란 말씀 편을 붙드신다. 그래서 죄의 파도 속에서도 사랑의 역사를 계속해 가신다. 하나님은 비록 불의한 왕 아하스일지라도 당신의 신실성을 지키시기 위해 유다와 아하스를 아람왕 르신과 이스라엘왕 베가의 위험으로부터 그들을 지키실 것을 약속한다(1). 그 첫 번째 약속은 그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4)는 말씀이다. 그리고 두 번째 언약이 곧바로 이어진다.

   

 

임마누엘(Immanuel, 10-16)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14b)

 

아하스에게 하나님은 임마누엘(God be with us)”의 약속을 베푸신다. 이것은 일단 죄를 죄로 처리하시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언약이다. 하나님은 이미(already) 구약 속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속의 은혜를 예비하셨다. 이미(already) 주어졌으나, 그러나 아직(not yet) 실현되지 않은 그 약속이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기까지의 이스라엘의 역사(歷史)를 보라! 그들은 도무지 이 약속을 받을 수 있는 아무 조건도, 자격도, 능력도, 권리도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인가! 아하스에게 임마누엘의 계시가 주어지다니,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이시다. 하지만 아하스는 이 은혜를 수납하지 않는다. 이렇듯 이사야도 아하스를 하나님께로 가까이 이끄는 일에 실패한다.

받기는 아하스가 받았지만 임마누엘의 축복을 누리게 된 것은 그 이후의 사람들이다. 임마누엘이라는 그리스도의 오심이야말로, 그리하여 주님께서 세상과 인류의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하신 것은 우리의 죄악을 책하시지 않고 당신의 피로 그 모든 허물을 다 덮으신 자기바하’(自己卑下, 2.5-11)의 극치이다. 임마누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절대 사랑을 보여주신 하나님의 구원사건의 절정인 것이다. 하나님이 친히 완전하게 이루실 것이다!

임마누엘은 얼마나 우리가 보잘 것 없으며 무가치한가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시며 사랑이신가를 보여주는 완벽한 하나님의 드러남이다. 하나님은 이 길고 긴 사랑 이야기를 거의 700년이나 참고 기다리시며, 그것만큼 또한 묵묵히, 그리고 놀라운 방법으로 이루어 오셨다.

   

 

심 판(17-25)

 

하나님은 불신자 아하스에게 두 번째로 이번에는 징조를 구하라 말씀하셨다(10-11). 하지만 그는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12)라고 응답한다. 그는 겸손을 가장한 가장 분명하고 확실하게도 하나님의 은혜를 감히 거부한다. 그리고 아하스는 앗수르를 의지하기로 결정한다(왕하16.7-9).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을 택했다. 그리스도 안(in)이 아니라 교회 밖(out of)을 택했다. 이것은 불신앙(不信仰)이다.

타락한 인생들의 오만불손한 죄악을 보라! 하나님이 그 죄악을 따라 심판하시거나 진노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 때문에 죄악을 즐긴다(왕하16.1-4, 대하 28). 오늘날도 하나님의 권위와 살아계심을 감히 잊고 살아가는 현대판 아하스들을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하나님은 당연히 용서의 하나님이어야만 한다. 그분은 결코 심판의 하나님이여서는 안 된다.” 이런 철부지 신앙 때문에 얼마나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고 있는가?

그래서 유다와 아하스는 임마누엘의 축복과 은혜를 받는 동시에, 이 은총을 말씀하는 바로 그 다음에 곧바로 심판의 메시지를 받게 된다(10-16 17-25). 공존할 것 같아 보이지 않는 두 상극의 말씀이 동시에 선언된다. 불행하게도 아하스는 하나님의 거듭된 약속(1-16)에서 불구하고 끝내 앗수르를 문제 해결의 파트너로 삼는다. 하지만 앗수르는 유다의 우군이 아니라 파멸의 선봉이 될 것이다(17b,18). 앗수르는 유다를 멸하기 위해 하나님이 빌려 온 면도칼이다(20). 그리하여 유다는 찔레나무와 가시나무로 덮이는 황무한 땅으로 변모하고 만다(21-25). 유다가 의지하겠다던 앗수르에 의해 파국을 맞이하는 모습을 그린 말씀들을 읽으면서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결과가 어떠함을 보게 된다.

   

 

부스러기 묵상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6.10b)

 

지금 유다가 꼭 이 모양이다.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임마누엘의 메시야 예언을 보고, 듣고, 깨닫고, 그리하여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 수 있는 길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영적 소경과 영적 귀머거리로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공개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앗수르를 의지한다(12 왕하16.7-9). 임마누엘의 징조를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친히 듣고 보았음에도 말이다. 불신의 행진은 도미노처럼 끝없이 이어진다. 이게 유다의 실존이다.

하나님을 버리고 [앗수르 대망론]에 빠져있는 아하스, 그 결과 심판의 날에 당할 일들이라는 최악의 상황으로 곤두박질한다. 이것이 18절 이하에 묘사된 그 날에는’(18,20,21,23)으로 이어지는 말씀의 선언이다. 물론 이것은 아하스와 유다가 결과론적으로 볼 때 그렇게 되었다는 의미도 있지만(10-16 17-25), 다른 하나는 왜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가를 밝히는 원인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책임을 돌아보게 한다(17-25 10-16).

아하스는 유다의 왕이다. 그는 아버지 요담에게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누리는 복을 보고 들으면서 자랐다. 하지만 그는 자신 스스로를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으로 취급해 버린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이사야가 곁에 있어도 그는 끝내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버린다. 당장 눈에 보이는 앗수르가 더 의지할 대상이었고, 이것의 그의 종교이자 신앙이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대용품으로 삼았던 것이다.

하나님이 아니어도 살 수 있고, 앗수르만 도움을 준다면 당면한 문제들을 충분히 극복하며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앗수르에게 하나님의 것까지를 감히 다 줘버리고 만다(왕하16.7- ). 하지만 그가 알았어야 했던 것은 과연 누가 앗수르를 진정으로 다스리며 섭리하시는가에 대한 부분이다. 그러니까 아하스의 죄는 하나님을 모른 것이요, 그것만큼 그분을 신뢰하거나 믿지 못한 불신(不信)에 있었다.

한쪽 귀와 눈으로는 임마누엘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앗수르가 있다. 하나님은 그럼에도 임마누엘을 말씀하시며 더 없는 긍휼과 자비로서 상대해 주신다. 하지만 그럴수록 아하스는 앗수르 쪽으로 흐른다. 이 극명한 대조를 읽으면서 언제나 이 둘은 내게도 동시상영 되고 있음을 본다. 내 눈앞에도 두 그림이 동시에 들어온다. 천국과 지옥, 선과 악, 이 땅과 저 땅, 성령과 사탄, 교회와 세상, 은혜와 율법 등 언제나 두 세계가 펼쳐진다.

그렇다면 문제는 나 자신이다. 과연 내가 진짜로, 혹은 가짜로 보고 듣고 마음과 생활로서 언행(言行)하는 쪽은 어디인가? 결국 아하스형 딜레마’(6.9-10)와 무관한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에 대한 질문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이사야가 목회를 하고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택함 받은 유다이면서도 아하스처럼 살 수 있다는 사실 앞에 깊은 영적 무거움을 느낀다. 이사야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자꾸만 이사야의 목회를 생각해보는 이유는 뭘까?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이 아닌 앗수르라는 대용품을 신뢰하지 말라고 말하기 이전에 과연 나는 이 동일한 딜레마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새삼 긴장이 된다. 아하스의 죄는 잘 보면서 정작 내 죄와 불신앙은 모르는 척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 안에 교묘하게 꼬투리를 내린, 그리고 내리고 있는 앗수르는 무엇일까. 한 손에는 하나님을, 다른 한 손에는 앗수르를 붙들고 필요에 따라 이 둘을 넘나들며 살아가는 나, 아하스를 정죄할 아무런 자격 없음이 이사야 앞에 나를 세운다.

나의 그 날에’(18,20,21,23)는 어떤 날이 되어 내 앞에, 그리고 내가 그것 앞에 서게 될까. 아하스는 임마누엘이라는 희망 앞에(14), 그리고 심판이 집행되는 그날 앞에 동시에 설 수 있는 기회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희망을 팔아 심판을 샀던 불행한 사람의 샘플(sample)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비극이다. 왕으로 살았던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으며, 이사야가 옆에 있었어도 그게 아하스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단 말인가. 나도 내 주변에 있는 자들이 아하스처럼 쓰러져 가는 것을 이사야처럼 목도하지나 않을까 심히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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