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로 망국가.亡國歌(사 23.1-17)

20200810(묵상)

  

 

 

두로 망국가(亡國歌)

Isa. 23.1-18

  

   본문 관찰

 

   잊어버린 70(1-14)

      “슬피 부르짖을지어다.”(1,5,6,14)

      “여호와께서 그것을 정하신 것이라.”(9a)

      “너희의 견고한 성이 파괴되었느니라.”(14b)

   70년을 필한 후에(15-18)

      “여호와께서 두로를 돌보시리니”(17a)

      “그가 다시 음란을 행할 것이며”(17b)

      “그 무역한 것이 여호와 앞에 사는 자 옷감이 되리라.”(18)

   

 

두로에 관한 경고라.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두로와 시돈의 모습 역시 예외는 아니다. 화려하고 풍요롭던 나라였다(2-3,7-8).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국가부도(國家不渡, 1,9b,11-14)가 심각하게 예고되고 있다. 마침내 모든 것이 무너짐으로써 극에서 극으로 반전된다. 그것도 70년이나 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의 주도권을 잡고 계신다는 점이다. 70년이라는 포로기도 하나님이 정하시고(9a), 다시 회복되는 것도 하나님이 하신다(17a). 두로는 너무 값비싼 수업료를 지불한 셈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잊어버린 70(1-14)

 

   “다시스의 배들아 두로가 황무하여 집이 없고 들어갈 곳도 없음이요

    이 소식이 애굽에 이르면 고통 받으리로다

    희락의 성 면류관을 씌우던 자 고관 존귀한 자

      → 누가 이 일을 정하였느냐.”

      → 여호와께서 그것을 정하신 것이라.”

    모든 누리던 영화를 욕되게 멸시를 받게

    흔드시며 무너뜨리게 하시고

    다시는 희락이 없으리니 건너가라 거기서도 네가 평안을 얻지 못하리라.”

 

두로를 향한 하나님의 정하신 것(9a)을 볼 때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해상 무역을 통한 부요(2), 나일의 추수(3), 희락의 성(7), 면류관을 씌우던 자(8a), 방백과 세상에 존귀한 자(8b), 모든 영광(9a)이 두로와 시돈을 더없이 높아지게 했다. 그러나 높아지면 교만’(9)으로 흐르는 것, 이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공식일까.

한편 열왕기상 16장에 보면 두로와 시돈의 영적 상황(배경)을 알 수 있다. 바알 숭배의 상징인 이세벨은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인데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그녀를 아내로 맞았다(29-31). 이는 이스라엘이 바알이라는 우상숭배에 빠지게 함으로써 여호와의 노()를 격발하였다(32-33).

여기에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형편을 짐작케 하는 하나의 상징적 사건이 기술되고 있는데 여리고를 건축하지 말라(6.26)는 여호수아의 명령을 벧엘 사람 히엘이 정면으로 어긴 것이다. 그 결과는 멸문(滅門, 34)이었다. 죄가 에덴을 뒤덮듯이 시돈의 바알은 온 유대를 죄로 물들게 했다.

두로와 시돈의 바알 숭배를 통한 교만은 이스라엘까지 영적으로 황무하게 무너지게 만든 주범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이 두로와 시돈을 심판하시기 위해 개입하도록 만들었다(9a). 두로와 시돈('인생')은 아마 언제까지나 승승장구(乘勝長驅)할 줄 알았겠지. 하지만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는 법이다. 문제는 어떤 모습으로 내려갈 것인가를 생각하며 사는 것이 지혜가 아닐까.

마침내 두로와 시돈은 처참하게 무너진다(1,9b,11-14): “슬피 부르짖을지어다.” 물건을 가득 실은 배가 들어갈 곳이 없게 되어버렸다(1). 하나님이 저들로 욕과 멸시를 받게 하시며(9), 희락이 없어지고, 그래서 돌파구를 찾아 이리저리 기웃거리지만 결코 평안을 얻지 못할 것이다(12). 하나님의 진노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견고한 성이 파괴되고 급기야 70년간 나라가 문을 닫게 된다(14).

   

 

70년을 필한 후에(15-18)

 

   “그날부터 70년이 찬 후에 여호와께서 두로를 돌보시리니

    그가 다시 이익을 거룩히 여호와께 돌리고

    그 무역한 것이 여호와 앞에 사는 자가 배불리 먹을 양식이 되리라.”

 

나라를 잃어버린 두로, 그것도 70년이나 말이다. 말이 70년이지 한 사람으로 따지자면 그의 생애 전체가 아닌가. 에스더를 읽으면서 참 놀랐던 것은 에스더서가 진행되는 전체 10년 가운데(1.3, 3.7) 생사(生死)를 건 고난은 불과 일주일(3.12, 4.16, 5.1, 7.1 참조), 그리고 하만의 조서가 취하가 되고 새로운 조서가 반포되는 것까지 하면 두 달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3.12, 7.9). 여기에 비하면 70년이라는 세월은 참으로 무궁한 세월이다.

하지만 나라 잃음은 70년으로 끝난다. 마침내 하나님이 두로를 권고하사(17a) ‘다시나라 구실을 하게 하신다. 참으로 감사할 일이다. 영원한 멸망으로 끝났어도 할 말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로는 여전히 단물과 쓴물이 함께 공존한다(3.11-12). 70년이라는 값비싼 수업료를 지불했으면 정신을 차릴 만도 할 것 같은데 여전히 아니올시다!’이다. 인간은 어쩔 수 없는 것일까.

한쪽에서는 다시 값을 받고 지면에 있는 열방과 음란을 행”(17)하는 쓴물이, 다른 한쪽에서는 무역한 것과 이익을 거룩히 하나님께 돌리고 그 무역한 것이 여호와 앞에 사는 자가 배불리 먹을 양식”(18)이라는 단물이 공존한다. 이 어찌 두로와 시돈만의 문제란 말인가. 바울의 고통에 찬 고백(7.7-25)이 내 안에도 날마다 서로 싸우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도 이와 같은데 두로와 시돈이야 오죽하랴.

70년을 이처럼 두들겨 맞았어도 이 정도인 게 더 두렵고 떨린다. 얼마나 더 많은 고난과 하나님의 채찍을 맞아야 정신을 차릴는지 아찔하다. 나 역시 60년 가까이 묵은 죄인 아닌가. 늘어나는 것은 내 쪽에서는 죄뿐이고, 하나님 쪽에서는 은혜뿐이니 황송하고 부끄럽기 그지없다. 두로의 죄가 나의 못남과 악함보다 더 깊고 크다고 생각하는 교만은 일지감치 버리자.

어떤 사람이 주님께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13.1)을 고하자 주께서 하신 대답이 선명하게 생각난다: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13.2-5)

   

 

부스러기 묵상

 

바벨론에서 두로까지 심판 예고가 계속되었다(13~23).

돌이켜 보면 비록 이 말씀의 첫 독자들은 예고편으로 받았지만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저들은 노아시대의 사람들처럼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말씀은 다 그대로 성취되었다. 각 나라들의 흥망성쇠(興亡盛衰)는 모두가 다 죄() 때문이었다는 것은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죄를 벌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은 결코 유예되거나 취소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만큼은 결코 묵과하시지 않으신다. 죄악을 품고도 형통을 바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심판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 그것도 모든 것을 다 잃은 후에 말이다. 70년을 두들겨 맞았어도 하나님은 저들을 권고하사 회복시켜 주셨다. 이는 두로만이 아니다. 나 역시 이미 허물과 죄로 죽었던(2.1), 즉 이전에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2.3)던 자였다.

주께서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탕감해 주지 않으셨다면 나 또한 두로와 시돈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나의 죄 사이를 오고가며 끝없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두로의 죄가 보이고, 무엇보다 나의 허물과 죄덩어리가 보이니, 그럼에도 나를 두로처럼 취급하지 않으시고 다시 아들로 받아주신 그 사랑이 두로의 줄에 서 있지 않게 된 나의 나됨의 진실임을 바라보게 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나 아닌가.

두로에게 70년이라는 시간은 심판이자 동시에 은혜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하나님은 심판의 끝을 다시 은혜로 시작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다. 그렇다면 그것은 덤으로 사는 생애 아닌가. 나 역시 마찬가지다. 갚을 수 없는 은혜를 값없이 받았다. 이젠 좀 정신차릴 때도 되었다 싶고, 40년 묵은 죄의 가지일지라도 의와 거룩이라는 새순이 돋아 열매를 맺어야 할 때도 되었다.

두로와 시돈 짝 나기 전에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13.8)라고 미루어 놓은 기회의 시간들을 이제는 주인의 기대와 바램으로 채워드려야겠다. 언제쯤 철이 날지, 어느 때나 아버지께서 든든해 하시는 아들이 될지, 여전히 심판이라는 [태풍주의보] 영향권 안에 있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침이다. 다시스의 항구를 내려다보면서 나는 지금 하나님이 정하신 최후의 심판을 어떻게, 무엇으로 맞이하고 있는지 더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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