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承) - 히스기야 이야기2(사 37.1-38)

20200828-29(묵상)

  

 

 

() - 히스기야 이야기(2)

Isa. 37.1-38

  

   구조 관찰

 

   ① () - 히스기야의 위기(36.1-22)

   ② () - 히스기야의 기도(37.1-38)

   ③ () - 히스기야의 치유(38.1-22)

   ④ () - 히스기야의 몰락(39.1-8)

   

 

여호와의 열심

 

히스기아왕 14년에”(36.1) 찾아온 위기, 그 출구는 어디인가.

예루살렘은 포위되었고, 앗수르 산헤립의 신복인 랍사게는 거짓되고 요망한 입으로 하나님을 훼방’(36.6,7,14,15,18 37.4)을 공개적으로 말하기 시작한다. 그는 유다를 치려 온 것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된 일이라며 가증스럽게 허풍을 떨고 있다(36). 마치 다윗의 대적 골리앗을 연상케 하는 장면이다. 하지만 34-35장의 멜로디를 따라 무대에 선 첫 번 주자 랍사게는 이처럼 [에돔의 노래](34)를 열창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죽음을 노래한 것이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7,34,38).

이어 두 번째 주자인 히스기야 차례다. 그는 과연 어떤 노래를 부를 것인가. 지난 14년 동안 불렀던 시온풍의 노래일까(35), 아니면 그의 아버지 선왕 아하스가 즐겨 부르던 그런 에돔노래로 돌아가 버릴 것인가(대하28.1-27). 침묵이 더 긴장이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36.21-22).

   

 

기도하는 히스기야(1-20, 왕하19.1-19)

 

히스기야는 먼저 사절단으로부터 랍사게의 언행을 전해 듣는다(1a). 전하는 자나 그것을 듣는 자 모두 중요하다. 정확히 전해도 잘 듣지 못하면 전혀 엉뚱한 쪽으로 이야기가 흐를 수도 있다. 전하고 듣는 일이 잘 되었다 싶은 것은 듣고 난 이후에 보인 히스기야의 언행(言行)을 볼 때 그렇다: “자기의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여호와의 전으로 갔고”(1b)

그는 하나님을 찾았다. [시온의 노래](35)를 기도(祈禱)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리고 이 일을 하나님의 사람 이사야로 더불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를 소망한다(2-4). 그는 지금 사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직시하고 있는데(3), 그것은 먼저 랍사게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훼방하였”(4a), 다음으로는 하나님이 이 망언을 들으셨으니 그를 심판하실 것이라는, “그런즉 바라건대 당신은 이 남아 있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4b)는 메시지에서 그렇다.

히스기야가 기도하고 있고, 이는 또한 자신의 왕권이라는 개인적인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지 않듯이, 이사야 역시 너희는 하리라!”(6-7)는 응답을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로 응답하고 있음에서 아름다운 하모니를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랍사게의 대왕 앗수르 왕이 이같이 말씀하시기를”(36.4), 그리고 여호와께서 네게 이르시기를”(36.10)이라는 거짓 증거와 극적으로 대조되는 부분이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에게 앗수르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그를 죽게 하리라!”(6-7)는 언약을 즉각적으로 성취하시기 시작하신다(8-13).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전으로 갔고”(1), 하나님은 말씀하시”(6), 앗수르는 그 때에”(9) 예루살렘 정복 계획을 뒤로 미룰 수 밖에 없게 된다. 참으로 놀라운 멜로디다. 그럼에도 시온의 노래를 훼방하려는 사탄의 모리배들의 악한 말은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10-13). 이게 다 영적 전쟁의 흐름이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앞서 듣고 여호와의 전으로 갔고”(1)처럼 이번에도 보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14-15)로 불어오는 앗수르 역풍을 되받는다. 14년을 하루같이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본 지칠 줄 모르는 그의 신앙을 엿보게 되는 부분이다. 창조주 하나님만이 피할 바위시요 도와주실 분이심을(16), 그래서 들으시옵소서 보시옵소서 들으시옵소서!”(17)라며 앗수르라는 거짓 인조신(人造神, 18-19)의 멸망을 기도한다. 그것만큼 하나님의 구원이 만방에 선포됨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20).

  

 

응답하시는 하나님(21-38, 왕하19.20-37)

 

하나님은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14) 기도한 것을 받으셨다. 그리고 이사야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21)신다. 하나님은 감히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신에게 망나니 짓거리를 한 앗수르의 모든 죄과를 다 계산하고 계셨고, 그 값을 지불토록 할 것까지를 다 작정하고 계셨다(22-29).

여전히 이 은혜의 수혜자는 놀랍게도 남은 자’(4b,31,32a). 온 유다를 다 초토화시킬 것처럼 보이는 앗수르 앞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기도하는, 그래서 고난과 고통의 풀무불에 타지 않고 남은 자들만이 기도 이후의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게 된다. 히스기야가 바로 그 남은 자되기를 기도하고 있다(4b). 우리 역시도 이처럼이기를 소망하는 부분이다.

한편 하나님은 3년 후에 성취될 것을 미리 이사야를 통해 히스기야에게 보여주신다(30). 하나님은 이번에도 기도 이후에 가장 좋은 것으로 히스기야의 소원을 만족케 하셨다(1 6-7, 14-20 21-35). 한편 히스기야 14년을 BC 715년으로 잡을 때 산헤립에 대한 심판 예언(7,38)이 성취된 것은 BC 681년이다.

이렇듯 기도의 응답은 즉각적이며 하룻밤 사이에(9,36), 동시에 점진적으로(30), 35년이나 지난 후인 하나님의 때에 각각 성취된다(38). 이게 기도의 절묘함이요 묘미다. 또한 숨막히는 실전에서 벌어지는 기도의 위대함이다. 기도하는 때는 나로부터 시작되지만 기도가 응답되는 때는 하나님이 만드신다.

앗수르의 몰락에 대한 예고편(33-34)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신가를 생각케 한다(35). 하나님의 말씀은 허언(虛言)과 실언(失言)에 불과한 앗수르와 랍사게의 빈 말’(36.4-20, 37.10-13)과는 다르다. 그분의 선언은 여호와의 사자’(36a)에 의해 집행된다. 하룻밤 사이에 그토록 기고만장(氣高萬丈)하던 앗수르의 대군 185,000명이 죽은 시체로 발견된 것이 말해 준다(36).

세상을 호령하는 기세로 시작되었던 앗수르의 대군은 칼과 화살 하나 사용하지 못하고 처참한 몰골로 퇴각한다(36.1-2 37.7,33-34 37.37). 반대로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았던 유다와 히스기야는 완승을 거둔다. 누가, 무엇이, 어떻게 이런 일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말인가. 면면히 박혀 있는 보석과 같은 기도의 흔적들이 찬란하게 빛나는, 아니 그것을 빛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작품임을 잊을 수가 없다.

   

 

부스러기 묵상

 

땅에서는 사람이 기도하고, 하늘에서는 하나님이 응답하신다.

앗수르와 랍사게는 이것을 끊어 놓으려고 자신들의 목숨을 걸었다. 참으로 무지하고 불쌍한 인생들이 아닌가. 저들은 하루살이가 내일을 모르듯 그렇게 살았다. 마지막 날 밤 저들은 뭘 생각하고 잠을 청했을까(36). 날이 밝으면 어제처럼 또 아침이 오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도 그 밤에 시체가 되어 아침을 맞을 것이라 생각이나 했을까.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아들에게 암살을 당한 것 때문이기도 하지만(38), 그것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값비싼 수업료를 지불했음에도 불구하고(36) 그는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고, 그래서 또 다시 헛된 자기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38a)하고 있음을 볼 때 더 그렇다. 그는 그 시간이 죽음으로 가는 것임을 알지 못했고, 그가 자기 목숨과 바꿔 경배했던 니스록 역시 이를 막지 못했다(38).

이사야는 [에돔의 노래](34)[시온의 노래](35) 가운데 어떤 노래가 하나님의 멜로디이며,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영원한 노래인가를 히스기야와 그의 기도를 통해서 확실하게 보여준다. 거품처럼 사라지는 앗수르의 교만을 보면서 아침 안개처럼 사라질 인생임을 다시금 자각하게 된다. 하나님이 영광의 빛으로 나타나시면 말이다.

결국 왜 그토록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열망했는지, 희미하게나마 짐작이 가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기도할 수 있었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 기도의 사람, 그가 바로 우리에게도 그처럼 살라고 격려하는 히스기야다. 바로 그 때에 3년에 아침에 때에”(9,30,36,38)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응답을 누렸던 것만큼 그것은 지금 우리에게도 그대로 이어져야 할 기도의 절대음(絶對音)이다.

기도는 그것이 얼마나 간절한가, 끈질긴가, 확신에 찼는가, 많이 하는가, 의심하지 않는가라는 말하자면 기도자(祈禱者)의 어떤 조건과 상황에 따라 좌우되는 이 땅의 소산이 아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는 이런 류의 변수들에 따라 응답이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기도는 그것을 받으시는 하나님께 그 주도권이 있다. 기도를 요청하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기도를 응답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 기도에 제한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시다.

히스기야에게서 무엇이 가장 우선하며, 중요하고, 또 가치 있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어찌 보면 히스기야처럼 사는 것은 무능해 보이고, 너무 현실성이 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185,000명의 대군 앞에 2,000명의 마병도 준비되지 못한 초라함(38, 36.8), 모든 성을 다 잃고 오직 예루살렘만 남아 있는 무기력함(36.1-2), 이게 일단 겉으로 드러난 히스기야의 모습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장 영광스럽게 드러나는 것이고, 히스기야 편에서는 기도가 가장 탁월하고 강력한 무기였음이 확증되는 것 아닌가 싶다. 결국 인간이 할 게 히스기야처럼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지 못하는 것은 또 무슨 이유일까. 그러면서 기도만 하면 다냐?”는 식으로 주저앉아 있다면 히스기야처럼 되는 것은 요원할 수 밖에 없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그 자리가 히스기야처럼 기도할 수 있는 은총의 기회가 된다면 그만큼 [시온의 노래](35)는 가까이에 있다. 지금은 히스기야처럼 살 때다. 우리도 히스기야처럼 오직 하나님께, 오직 기도로,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응답과 섭리하심의 증거가 되고 싶다. 히스기야가 그린 그림이 조금씩 우리와 교회의 영적 시야에 들어오는 것 같아 안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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