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무지가 장미꽃같이!(사 1.18-31)

20200711(묵상)

  

 

 

황무지가 장미꽃같이!

Isa. 1.18-31

  

   본문 관찰

 

   A 하나님_회복(18-19): 오라!

      B 유다_멸망(20): 그러나

         C 유다의 현주소(21-23)

   A' 하나님_회복(24-27): 그러므로

      B' 유다_멸망(28-31): 그러나

   

 

그러므로 vs 그러나

 

유다는 하나님의 해법(16-17)을 해결할 만 한 수준이 못된다.

(2-14)는 결과적으로 이미 그들을 15절로 묶어 놓아버렸기 때문이다. 사실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이 제시한 해법을 행하는 것으로부터 죄가 용서되거나 죄의 짐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어느 누구도 행위로부터 죄의 책임과 그것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아니기에 그렇다. 그래서 회복(AA')에의 초청이 참으로 빛난다. 여전히 구원의 손길은 하나님 편에서 제시되고 시작된다. 하나님과 유다의 화해의 핵심은 하나님이 주도권을 잡고 계신 사죄의 은총이다:

 

   “주께서 말씀하신다. 오너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빛과 같다 하여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며,

    진홍빛과 같이 붉어도 양털과 같이 희어질 것이다.”(18, 표준새번역)

 

마침내 유다는 순종이냐, 배반이냐라는 교차로(19,20) 앞에 서 있다. 과연 신실과 공평(정의)과 의리(공의)가 다시 부흥하는 길을 따라 달릴 것인가(21). 아니면 살인자요(21b), 여전히 찌끼와 물이 섞인 포도주처럼 여전히 죄악의 모습에 제사(예배)라는 종교 행위만을 회칠한 이중성으로 배신자의 길을 달릴 것인가(22). 희망은 이미 도적 같은 방백(지도자)들에게서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23a). 이미 지도층 인사들은 주께 패역(반역)하였을 뿐 아니라 도둑의 탈을 썼다. 그리고 고아와 과부는 안중에도 없고 오직 뇌물을 밝히고 있고 사례물(보수)이나 계산하면서 쫓아다니고 있다(23b).

결국 하나님의 공의의 또 다른 모습인 회복이라는 자비하심이 아니고서는 유다는 아무 희망도 없는 셈이다(24-27). 때문에 그러나’(28a)로 이어지는 선지자의 외침이 다시 반복되고 있는 것은 그냥 쉽게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깨우친다. 저희의 현재(21-23)를 깨끗함으로 회복(18-19,24-27)하지 않으면 말이다.

   

 

그러므로(24-27)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19)

   “그러므로 처음과 같이 회복할 것이라.”(24-26a)

 

하나님은 사죄의 선언(18)을 통해 여전히 불완전한 유다의 현재(21-23)를 거기에 걸맞게 하시기로 작정하신다. 이것이 유다에 대한 그러므로’(24) 이후의 밑그림이다. 하나님은 내가 또 내 손을 네게 돌려 네 찌꺼기를 잿물로 씻듯이 녹여 청결하게 하며 네 혼잡물을 다 제하여 버리고”(25)라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네 인생들이 회복해야 할 목표를 알기는 알지만(16-17) 그러나 그것을 이룰 능력과 자질은 전무(全無)하다는 것을 아셨다. 그래서 인간이 만든 죄()의 밭을 당신의 사랑으로 다시 의()의 밭으로 회복하기를 시작하신 것 아닌가.

하나님은 지금 유다를 다시 처음과 같이 본래와 같이라는 초발심의 자리로 회복시키는 거대한 역사를 시작하신다(26). 하나님의 목표는 원래의 의와 신실이다. 거기까지 유다를 순수하게 정련(精鍊)하시겠단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다(27a). 이러한 하나님의 집요하신 집념을 통해 유다는 새롭게 거듭날 것이다: “회개한 백성은 공의로 구속함을 받을 것이다.”(27b, 표준새번역) 이처럼 아직은 전혀 이질적인 불순물로 가득하지만 회개를 통해서 처음본래와 같이 회복하심으로서 구원하실 것을 언약하신다. 밤이 깊으면 새벽이 가깝다. 유다는 깊은 죄악의 잠을 자고 있으나 하나님은 회복의 역사를 꿈꾸신다. 마침내 유다의 뜨락에는 희망의 태양이 밝아오게 될 것이다.

 

 

그러나(20,28-31)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20)

   “그러나 멸망할 것이라.”(28)

 

유다가 승리의 샴페인(champagne)을 터트릴 때는 물론 아니다. 그럴 입장도 못된다. 자신의 지금 현재(2-15,21-23)와 아직 미래(24-27)를 착각해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소위 김칫국부터 마실 수 있는 존재가 미련한 인생들임을 주께서 아셨을까. 그래서 곧바로 이사야는 그러나로 이어지는 설교를 시작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설교를 듣고서도 옛사람의 죄로부터 돌아서는 회개를 동반하지 않는 자, 이들은 패역한 자와 죄인, 여호와를 버린 자’(28)라는 심판의 어인(御印)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회복의 길을 따르지 않는 자들의 결국은 패망과 멸망의 밥이 될 뿐이다. , 심판이다.

유다는 지금 상반된 두 그림을 이사야의 설교를 통해서 듣고 있고, 동시에 이를 보고 있다. 문제는 그러나의 인생들이 유다에 공존하고 있음이다. 이사야의 설교를 듣고도 말이다. 하나님은 돌이키지 않는 죄인을 찾아내신다.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인생은 없다. 특별히 우상숭배에 빠진 이교도의 후예를 자처하는 자들의 죄형은 부끄러움과 수치로 떨 것이다(29). 마치 최후의 심판의 예고편처럼 이사야의 설교는 계속된다. 기어이 시들고 메말라 삼오라기와 불티처럼 취급될 것이다(30-31a).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이처럼 불타더라도 꺼 줄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마치 부자와 나사로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16.19-31).

   

 

부스러기 묵상

 

   “산들은 떠나며 언덕들은 옮겨질지라도 나의 자비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54.10)

 

어떻게 사느냐는 자유지만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은 필수다.

순종로(順從路, 19 24-27)와 배반로(背反路, 20 28-31)는 명백하게 설교되었다. 이렇게 된 이상, 저들의 현재로(現在路, 21-23)를 이제는 더 이상 핑계할 수 없다. 심는대로 거둘 뿐이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6.7b). 다시금 하나님의 눈물겨운 오래 참으심이 진한 여운으로 내 마음을 적신다.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사랑하시는 하나님, 그래서 이사야를 보내사 그를 통해 죄로부터 해방되는 용서와 회복의 길을 당신의 온 몸으로 유다의 심장에 세우고 계신 하나님을 만난다.

응당 심판의 화살이 될 수 밖에 없는 죄행(罪行)임에도 이것을 당신의 심장을 통해 깨끗하게 정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마음, 거기까지 참으시며 유다를 품고 계신 하나님에게서 소돔을 방불케 하는 이 시대를 향한 나의 시각을 조망해 보게 된다. 물론 나 역시 이 시대라는 간음녀를 향해 돌을 들어 칠 수 있는 아무 자격도 없지만 자꾸만 주님보다 앞서려는 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길은 있다. 그것은 이사야처럼 하나님의 균형감을 잃지 않는 것에서 예감된다. 하나님께서도 죄악으로 관영한 소돔같은 유다를 향해 그러나메시지만을 선포하지 않으셨음을 슬쩍 훔쳐본다. 그분은 동시에 그러므로의 메시지를 앞세우셨다. 부정은 긍정의 마지막 보루다. 결코 부정이 긍정을 앞서거나 주도하지 못한다. 긍정이 좌절되었을 때의 부정이지 부정을 휘두르고서 슬쩍 긍정을 끼워 넣는 것이 아니다. 그래, 이 마음이 나에게 절실하다. 소돔과 고모라처럼 무너진 유다를 보시면서도 그러므로를 앞세우시며 유다의 회복을 애타게 기다리신 하나님에게서 사역자의 영성을 자리매김 하게 된다.

겨우조금’(8,9)18절을 거쳐 마침내 처음과 같이 회복할 것이라.”(26)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희망을 본다. 하나님은 가장 어두운 죄악의 암흑에서도 구속’(27)의 광명을 꿈꾸신다. 이 시대를 이처럼 품고 살아야겠다. 하나님도 이러시는데 내가 뭐길래 그러나의 풍선만을 불어대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내게도 하나님의 마음과 시각이 주어지고 자라기를 소망한다. 이것은 내가 사는 길이고 나의 사역이 건강해지는 길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하나님은 나의 죄를 다 아시면서도 그러므로법칙을 지금껏, 그리고 언제나 사용해 주셨다. 나는 늘 하나님을 실망시켰으나 하나님은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키신 적이 없으시다. 하나님도 처방은 죄인이라 하셨지만 묘약은 그러므로의 회복을 사용하셨다. 길이 보인다. 1장의 언덕에 서서 심호흡 한번 크게 더 해 본다. 하나님이 일하시고 있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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