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9 - 하나님의 설복.設伏(욘 4.6-11)

20210228(양무리교회)

  

 

 

하나님의 설복(設伏)*

Jon. 4.6-11

  

    본문 관찰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그늘나무)예비하사

    요나가 박넝쿨을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J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G -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J -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나이다

        G - 네가 수고도,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12만 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으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설복(說伏) - 알아 듣도록 말해서 수긍하게 하다.

   

 

어느 때나 내 마음을 알꼬!

 

요나야 너는 박넝쿨을 아끼는구나, 나는 사람을 아낀단다.”

자신의 필요와 욕구와 이익을 위해서는 기를 쓰고 달려들면서 정작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게도 인색한 요나를 만난다. 하지만 그를 향해 돌을 들어 먼저 칠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요 나!’도 선지자처럼 살고 있으니 말이다. 하나님은 참 외로우셨을 것 같다. 기뻐하며 웃고, 슬퍼하며 성내는 기준이 요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기준을 이제는 좀 바꾸라고 충고하신다. 그걸 위해 박넝쿨과 벌레와 동풍이라는 일반은총을 예비하신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자연을 통해서 시작된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아는 선지자 요나는 이 일에 대해서 까막눈이다. 선지자임에도 일반계시조차 읽어내는 영성이 없다. 그러니 되지도 않는 엉뚱한 소리만 퉁퉁거리고 있을 뿐이다.

   

 

예비하시는 하나님

 

니느웨 12만 백성이 심판이 아닌 구원으로 하나님을 맞이할 준비가 진행되는 동안 유감스럽게도 이 일에 가장 걸림돌이 되어 버린 것은 요나다. 그런데 이렇듯 짐꾸러기(거침돌)가 된 요나를 위해 하나님은 뭔가를 시작하신다. 먼저 선지자 요나를 설득함으로써 그가 당신의 뜻을 깨닫고, 또 알게 하시기 위한 준비를 서두르신다. 하나님은 요나가 당신의 계획과 마음을 알기를 원하셨다. 사실 41-3절처럼 반응함에도 불구하고 인격적으로 대우하신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먼저 좋은 것’(그늘나무)으로 요나에게 찾아가신다(6). 하지만 하나님이 310절처럼 일하신다고 41-3절로 대꾸한 요나였다. 여기에 대해 하나님은 먼저 4절 말씀으로 타이르신다. 그래도 요나는 5절로 고집을 부린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6절이다. “건방지구나!”라고 호통을 쳤을 법도 한데 하나님은 오히려 박넝쿨(그늘나무)이라는 좋은 것을 요나에게 주신다.

   

 

응답하는 요나

 

하나님이 예비하신 벌레와 동풍 앞에 보여주는 반응이 요나의 불행의 전부는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예비하셔도 정작 그는 모르고 있다. 지금 무엇 때문에, , 누가 이 일을 주도하고 있는가를 알지 못한다. 그러니 하나님께 언행하는 요나의 꼴이 우수광스럽고 기가 찰 노릇이다.

이 부분이 요나의 이중성이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놓고서 보인 그의 반응에서다. 심판 구원으로 행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서는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1-3) 하면서, 자신의 괴로움을 박넝쿨 그늘로 막아주신 것에 대해서는 크게 기뻐하였더니”(6b)로 응답한다. 그리고 박넝쿨이 시들자 다시 41-3절의 우산 속으로 숨어 버린다. 그는 단순히 육적(肉的)인 문제 해결에 기뻐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 잘 되는 것에 대해서는 심히 싫어하고, 자기 잘 되는 것에 대해서는 심히 기뻐하는 경우와 같다. 이게 어찌 요나뿐인가 말이다. 남 잘 되는 꼴을 못 보는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마치 탕자의 형과 같은 사람이 요나다. 그런데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 선지자다. 그래서 더 당혹스럽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그러니까 자기 마음에 좋으면 받아들이고 싫으면 거부하는 식으로 반응하는 것은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똑같이 하나님이 예비하셨는데 요나는 자신에게 달면 좋아하고, 쓰면 싫어한다. 하나님이 중심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기준인 사람이어서다. 그는 자기 기분과 상태에 따라 하나님께 이러쿵저러쿵하는 줏대 없는 사람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부스러기 묵상

 

박넝쿨만을 아끼며 살아갈 수 있다.

결국 하나님도 뒤로 밀린다. 그러니 니느웨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이처럼 하나님이 아끼시는 것으로부터 나의 시선과 관심과 마음을 빼앗아가는, 그래서 나의 기분과 입장만을 생각하게 하는 나으 헛된 박넝쿨은 무엇일까. 뿐만 아니라 영원한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정원에 니느웨 백성들이 자리할 때 요나처럼 이 하나님의 뜨락에는 나만 있어야 한다고 아우성치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거부할 수 있다. “하나님이 이처럼 니느웨를 사랑하사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나를 위해서만 일하시는 하나님이셔야만 한다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독선적이고, 속 좁은 밴댕이 심보는 아닌지 모르겠다.

지금 이 시간에도 니느웨의 탄식은 계속되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며 몸부림치는 3장의 울부짖음이 이곳저곳에서 들린다. 하지만 요나처럼 오직 나만을 위해, 나의 기대와 소망만을 위해, 나의 행복과 욕구만을 위해 줄달음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요나는 지금 자기 자신에게 빠져있다. 그러니 그것만큼 하나님도, 이웃도, 사명도, 이방의 구원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을 위해 일하며 살아갈 수 있다. 정말 무서운 일이다. 결국은 하나님을 위한 삶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생활을 붙들고 있으면서 모양은 하나님께 영광으로 나타나고 보여질 수 있다. 이 무서운 착시현상이 혹 나의 이야기는 아닌가. 하나님은 4장 끝에서 요나에게 결국 당신이 합당하다 선언하신다: “내가 내 마음을 분노에서 즐거움으로 바꾸지 못할 까닭이 무엇이란 말이냐?”(11b, Message)

 

     나의 박넝쿨은 무엇인가?

     이를 보좌에서 내려오게 하고 거기에 하나님이 앉으시게 하라.

     두 주인을 섬길 수 있느냐?

    

하나님이 아끼시는 것을 향해 내 시선을 돌려야 할 때다. 하나님은 세 가지를 요구하신다. 먼저 하나님 당신의 마음과 생각을 아는 자리로 나아오라 하신다. 그리고 내 곁에 있는 죽어가는 내 관심 밖에 있는 니느웨를 좀 보라 하신다. 나에게 당신이 필요하듯 니느웨에도 하나님이 필요하다 말씀하신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좀 제대로 알고 깨닫고 발견하고, 그래서 선지자면 선지자답게, 성도면 성도답게 굴라 하신다.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을 통해 우리를 설득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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