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스 프로젝트2(사 45.9-25)

20210721-22(묵상)

 

 

 

고레스 프로젝트(2)

Isa. 45.9-25

 

    본문 관찰

 

    하나님의 주권(9-19)

    하나님의 구원(20-25)

  

 

열방의 하나님

 

우문현답(愚問賢答)에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더 강렬하게 알게 된다.

하나님(토기장이, 부모)이 제시하신 고레스 카드에 대한 질그릇의 한 조각 같은 이스라엘(진흙, 자녀)의 계속된 반응이 눈에 띤다(9-10). 하지만 하나님은 창조주로의 권위와 주권을 따라 응답하시며(11-12), 이미 밝히신 것처럼 고레스를 통해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것을 분명히 하신다(13).

이스라엘의 바벨론 이후는 애굽과 구스와 스바 족속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고(14), 그것은 두 그림으로 그 희비가 교차된다(16-17). 이를 통해 열방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되는데(18-19), 이는 하나님께서 이방을 구원 안으로 초대하시기 때문이다(20-25). 이렇듯 고레스 프로젝트는 온 세계 열방을 겨냥한다.

   

 

하나님의 주권(9-19)

 

고레스의 등장은 아무래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는 좀 그렇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4-5), 그것도 이방인이 어떻게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일에 쓰일 수 있을까 하는 점에서 말이다. 고레스 딜레마는 그것 자체로도 이해하기 곤란하고, 또한 난해하지만 하나님이 좀 언짢게 생각하시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에 대한 이스라엘(인간)의 반응에 있다.

사람(‘’)은 자기에게 이해되지 않을 때, 그래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을 때 불평을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마음대로 이러쿵저러쿵 딴소리를 낸다. 더더욱 하나님께 설득을 당하고 이를 받아들이려는 자세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을 설득하여 자기가 원하는 바를 관철시키려고까지 한다.

바로 이런 일들이 벌어질 때 내가 취해야 할 삶의 자세는 무엇일까. 하나님(토기장이, 부모, 창조주)과 인간(진흙, 자녀, 피조물)은 동격이 아니며, 주종(主從) 관계에 있다. 하나님의 섭리는 깨달아 아는 것보다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순종이 우선한다. 따라서 고레스 카드는 인간과 협상을 하고 의논해서 결정해야 할 사항이 아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이걸 망각하면 나에게도 화가 있을 것이다.

혹시 나 또한 나에게 이해되지 않고, 받아들이기 곤란한 것이 있을 때 그걸 놓고 하나님께 따지고 있는 것은 없는지 돌아본다. 하나님의 준엄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11): “그래 너희가 내 아들들에 대하여 나에게 물으려느냐? 내 손의 작품에 대하여 너희가 나에게 명령하려느냐?”(새번역) 하나님은 다시 고레스 프로젝트(Cyrus project)를 재확인하신다(13). 고레스를 의()의 도구로, 그래서 그를 통해 예루살렘을 재건하고, 포로의 자리에서 귀환하게 할 것을 분명히 하신다. 토기장이이신 하나님께서 다시금 나의 성읍 사로잡힌 내 백성을 위해 새 일을 행하실 것이다.

한편 애굽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듯이 바벨론 역시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하나님의 목표는 애굽과 구스와 스바 족속들이 네게로 건너와서 네게 속할 것이요 그들이 너를 따를 것이라 하나님이 과연 네게 계시고 그 외에는 다른 하나님이 없다.”(14)는 영광의 그날이다. 하나님은 이 일을 은밀히, 그러나 분명하게 행하신다(15).

중요한 것은 열방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과 함께 인생에게는 희비가 교차된다는 점이다(16-17). 우상숭배자는 부끄러움과 치욕으로 끝나지만 이스라엘의 구원은 영원한 것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열방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될 것이다(18-19). 그분은 결코 세상을 헛되이’(혼돈 상태로, 18) 창조하신 것이 아니며, 당신을 헛되이’(허무하게, 19) 찾으라 하신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께는 허언(虛言)이 없으시다(23a).

   

 

하나님의 구원(20-25)

 

    “너희는 모여 오라!”(20)

       “또 함께 논의하여 보라!”(21)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22)

             “공의와 힘은 여호와께만 있느니”(24)

 

하나님은 이방을 구원 안으로 초대하신다(20-25). 재미난 것은 열방 중에서 피난한 자들”(20a), ‘땅 끝의 모든 백성’(22a), 공의와 힘은 여호와께만 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24a)이 한 축을 이룬다. 그리고 우상을 만드는 자”(16), “나무 우상을 가지고 다니며 구원하지 못하는 신에게 기도하는 자들”(20b), 하나님에게 노하는 자들’(24b)이 역시 다른 한 축을 이룬다.

여전히 헛된 길을 가는 자들이 있음이 놀랍다. 고레스 프로젝트가 진행됨을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선포되고 있는 와중에 말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극명한 대조가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옛부터 이전부터”(21) 공의와 구원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모두가 다 하나님께로 돌아감만이 유일한 희망이다(22-23). 그렇지 않으면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 밖에 기다리는 게 없다(24b).

   

 

부스러기 묵상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22)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고레스까지 동원하셔야만 하는 이유는 뭘까.

예를 든다면 나에게 말씀하셔서 깨닫게 하셔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데, 굳이 이웃집 아저씨, 그것도 이름도 성도 모르는 전혀 나와 상관없는 사람을 통해서 나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물론 감사하다. 하나님은 나의 넓이와 폭과 상관없이 나를 도와 줄 자를 찾으셔서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니까 말이다. 여전히 못나고 처참한 포로의 자리에 있을 때에도 나에게 고레스를 보내사 은총을 잊지 않으시니 황송하기만 하다.

이런 넋두리가 내 생각 안에 맴도는 것은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남아있는 알량한 자존심 때문인 것은 아닌가 싶다. 하나님이 나에게 뭔가를 행하실 때 최소한 당사자인 나에게는 그것을 통고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건방진 생각 말이다. 그래서 사전이든 사후든 내가 받기에 좀 그런 것이면 이런저런 내 의견을 말씀드려야 된다는, 그러니까 여기에는 하나님의 결정에 내 의사가 반영되어야 한다는 참으로 사악하고 완악한 죄의 본성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것을 성취하시는 것, 이것이 고레스 프로젝트의 핵심이다. 일이 이 정도로까지 진행되기 이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수 없이 많은 채널을 통해 언행(言行)하셨다. 그랬음에도 하나님을 떠났고, 해서 이런 자업자득(自業自得)이 온 것이다: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6.11-12)

나 역시 토기장이의 뜻을 우선하지 못하는 별 수 없는 인간(진흙, 자녀, 피조물, 9-10)임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반드시 내가 다 알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이해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며, 더더욱 나의 동의를 구한 후에 집행되어야 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하시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지금껏 나에게 해 주신 것 역시 하나님이 가장 좋은 것’(103.5, 107.9)으로 결과되어지게 하셨다.

진흙과 의논하지 않으셨어도 토기장이의 일하심에는 전혀 오류가 없었다. 하나님은 반드시 나를 거쳐서, 그러니까 내가 뿌려야만 하는 것으로 거두게 하시는 방식으로 일하시지 않으신다. 때문에 내가 기도했기에, 내가 헌신했기에, 내가 드렸기에, 내가 땀 흘렸기에, 내가 심었기에 하나님이 주셨다고 생각하는 [진흙중심사고]로부터 자유해야 할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오히려 나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진행하셨고, 진행하시고, 진행하실 고레스 프로젝트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는 것 아닐까. 지금도 고레스 카드는 하나님에 의해 무수하게 진행되고 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생각을 옮기니까 한결 가볍다. 하나님이 다양한 방식으로 고레스 카드를 나에게 쓰셨다면 나도 이제는 하나님의 섭리와 일하심에 쓰이는 고레스 카드이고 싶다.

하나님이 나에게 쓰신 그 카드들을 알지 못했듯이 나도 하나님이 뭔가를 위해 쓰실 때 이처럼 쓰이고 싶다. 나는 진흙이고 하나님은 토기장이이시기 때문이다. 고레스가 이스라엘을 깨우는 진흙이었듯이 나 또한 하나님의 구원과 영광을 이루는 진흙이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이 써 주시겠다니 감사할 뿐이다. 나는 복음과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진흙이고 싶다. 그렇게 쓰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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