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하나님(사 44.1-23)

20210719(묵상)

 

 

 

구원의 하나님

Isa. 44.1-23

 

    본문 관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1-5)

    무익한 우상을 부어 만든 자가 누구냐?(6-20)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21-23)

 

 

성령님 vs 인조신(人造神)

 

약간의 혼돈스러움은 감수해야 하는 것일까.

희망과 절망이 계속해서 엎치락뒤치락 거리기 때문이다(1-5 6-20 21-23, 42.1-17 42.18-25, 43.1-21 43.22-28). 이스라엘은 죄 때문에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와 함께 그에 따른 바벨론의 포로라는 시련을 만난다(42.24-25). 그러나 하나님은 바벨론이라는 새 일을 통해 너는 내 것이라!”는 소유권과 변함 없는 사랑을 약속하시며, 이스라엘로 하여금 당신의 이름을 찬송하는 자리로 나아오도록 초청한다(43.1-21).

하지만 이와 같은 은혜를 말씀하는 동일한 43장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야곱이 진멸 당하도록 내어 주며 이스라엘이 비방거리가 되게 하리라.”(28b) 이렇듯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탄핵(彈劾)을 받는다. 그리고 다시 44장은 희망으로 그 문을 연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수준과 관계없이 저들을 향한 구원의 역사를 주도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1-5)

 

이스라엘은 여전히 나의 종 내가 택한”(1), 그것도 저들의 애칭(愛稱)여수룬’(의로운 자, 2, 33.5,26)으로 불리운다. 잠시 하나님이 변덕스러운 분이시란 말인가 싶다가, 순간 이스라엘이 그렇다는 생각으로 바뀌면서, 그럼에도 하나님은 친근하고 부드러운 모습으로 저들을 다시 찾아오시는구나 싶어 가슴이 뭉클해진다. 변하는 이스라엘(‘)에게 불변하시는 사랑으로 대해 주시는 하나님, 그건 하나님 아버지만이 하실 수 있는 절묘함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변함이 없다. 못나고, 철없고, 배은망덕(背恩忘德)할지라도 끝까지 소유권을 포기하지 않으시며, 저들을 향한 사랑의 손을 거두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선택의 은혜 또한 철회하지 않으신다(2). 잘못(42.18-25, 43.22-28)을 추궁 당해도 할 말이 없는 형편인데 이건 오히려 찾아오시고, 또한 뇌사(腦死) 혹은 말기암(末期癌)처럼 영적 회생불능(回生不能) 상태에 빠진 이스라엘을 바다보다 더 넓은 품으로, 당신의 온 몸으로 받아주신다.

차라리 네 이놈, 나쁜 놈이구나!”시며 불같은 진노로 회초리를 드리면 시원할 것 같은데, 이스라엘(‘’)을 속속들이 다 아시면서도 사랑의 눈빛으로 찾아오시더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러시니 이건 오히려 좌불안석(坐不安席)이다. 하나님은 죄인을, 약한 자를, 당신에게 생명을 내어놓아야 할 못난이들까지도 가슴 밖으로 밀어 내버리지 않으시고 그들을 용납하고 품으실 수 있는 분이심을 곰곰이 생각해 본다.

이 뿐만 아니다.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행동하신다. 그분은 목마른 자에게 가장 필요한 물을 주시고,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신다(3a). 이것은 포로의 고난과 고통이라는 암울한 과거와 단절하고 이제는 시냇가의 버들처럼, 또한 풀처럼 무성하게 자라는 놀라운 부흥을 경험하는 것으로 열매를 맺는다(4).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7.37-38)

 

한편, 다른 무엇보다도 나의 신’, 즉 성령을 부어 주실 것을 약속하신다(3b). 성령님은 이처럼 시들어 가는 이스라엘을 외적으로는 다시 물 댄 동산’(58.11, 31.12) 같이 풍성한 복을 받도록 하신다(4). 그뿐 아니라, 성령님의 은혜는 내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령에 생기를 불어넣는다(5). 마침내 하나님을 향한 언행심사(言行心事)가 근본적으로 변화된다. 생각이 바뀌면 태도가 바뀌고, 태도가 바뀌면 삶이 바뀐다.

성령님의 은혜를 맛보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되고 영광스러운 것인가를 진심으로 깨닫게 된다(5). 그래서 나는 여호와께 속하였다!” 고백하며, 야곱의 후손임을, 또한 나는 주의 것”(표준새번역)이라고 손으로 써서 기호를 삼기도 한다. , 하나님의 자녀됨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며 살게 될 것이라 하신다.

이것은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성령님의 은총을 맛보기 전에는 귀머거리요 소경처럼 살았던 죄인이었다(42.18-22, 43.8,22-24). 그런데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부어 주시자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다. 사람이 진정으로 거듭나고 새로워지는 것은 성령님의 사역이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3.5b)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부어 주실 때에는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불리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5b, 표준새번역)는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다. ,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게 된다는 말이다. 이사야는 이처럼 이미 성령행전을 내다보고 있는 것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1.8)

 

 

무익한 우상을 부어 만든 자가 누구뇨?(6-20)

 

포로생활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깨우쳐야 하는 것은 하나님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6b)는 선언에서처럼 하나님만이 왕이시자 구속자이시며, 또한 의지해야 할 분임을 배우는 것이다(6-8). 참으로 값비싼 수업료를 지불하면서 말이다.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속자가 당신 자신인가, 아니면 우상인가를 당당하게 제시하신다.

이를 좀 더 분명히 하기 위해서 우상과 그것을 의지하는 증인들’(9b)의 헛됨을 공박하신다(9-20). 사람은 생사(生死)를 건 고통 앞에 설 때, 그래서 그가 결국 의지하고 따르는 것이 무엇인가가 드러날 때 그의 승패(勝敗)가 판가름난다. 이사야의 설교를 듣고 있는 이스라엘의 미래는 곧 바벨론 포로기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43.14).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들 가운데 우상을 만드는 자’(9-11)들이 있을 것이란다.

이들은 포로기라는 절망을 우상을 통해 희망으로 돌려보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무익하며 수치만 당하게 될 뿐이다. 우상으로부터라는 출구를 찾았기에 그들은 하나님이라는 희망의 입구를 결코 찾지 못할 것이다. 어제의 죄악(43.24)은 오늘의 우상을 낳았고(9-11), 결국 내일의 절망으로 그 끝을 맺게 된다. 얼마나 비참하고 가련한가.

우상으로부터가 아닌 하나님만으로, 나의 영을 부러주리니”(3)처럼 성령님으로부터의 희망이 예고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으로 살고 있으니 그 결과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인 셈이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6.7-8)

참으로 더 한심하고 가슴 아픈 것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이런 우상을 신이라고 증언하는 자들이다(9b). 오늘 우리 시대에도 이처럼 살아가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말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23.13)

모든 우상은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인조신(人造神)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우상이라는 게 무슨 힘과 능력이 있겠는가? 불을 피우는 땔감에 불과한 나무로 만든 우상 앞에서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17b)며 엎드려 경배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비웃는 이야기(12-17)는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고 한심한가를 보여준다.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들의 눈이 가려서 보지 못하며

      그들의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니라.

      마음에 생각도 없고 지식도 없고 총명도 없으므로 ”(18-19a)

 

마음의 눈이 영적 무지에 빠져있기에 그렇다. 참으로 비참한 이중고(二重苦). 포로로 끌려가 고난을 받으며 한 줌 재만 남기고 꺼져가는 것도 그것이지만 하나님이 아닌 가짜 우상에 빠져 결국 끝장이 나는 모습이 그것이다.

그러면서도 손에 쥐고 있는 우상이 참 신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20b, 표준새번역)으면서 고작 한다는 최후변론(最後辯論)이 가관이다. 참으로 한심한 인생의 결론이다: “내가 그 나무의 반 토막으로는 불을 피워, 그 불덩이 위에 빵을 굽고 고기를 구워 먹었지. 불을 때고 남은 나무로는 가증한 우상을 만들었지. 이제 나는 그 나무토막 앞에 절한다.”(19b, 표준새번역) 이게 하나님을 떠난, 하나님이 부재(不在) 중인 인간의 실상이다.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21-23)

 

하나님의 의(, 42.1-17, 43.1-21, 44.1-8)와 이스라엘의 죄(, 42.18-25, 43.22-28, 44.9-20)가 여전히 팽팽한 긴장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이스라엘은 늘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는 그칠 줄을 모른다. 못난 자식일수록 더 사랑이 가는 것일까. 짝사랑에 가까운 하나님의 변함 없으신 애정은 도대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생각하게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못남(9-20)과 관계없이 너는 내 종이니라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아니하리라.”(21)하시며 소유권을 주장하신다. 그 이유는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셨기 때문이다(22). 이스라엘의 행위는 철저하게 배제되고 있다. 오직 하나님의 용서하심만이 이스라엘이 심판으로부터 놓임 받게 된 이유이다(23c).

이것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셨으니”(23a). 그래서 온 우주 만물이 하나님의 은총을 노래하게 될 것이다. 세상은 이제 본래 상태로 돌아왔다. 헛된 우상을 만드는데 사용되던 나무들도(13-20 23b),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이 일을 주도하던 우상과 신상을 만드는 철공과 목공들도(9-13 23c) 이제 본연의 자리로 회복되었다.

 

 

부스러기 묵상

 

다시금 성령 하나님을 찬양한다.

빈들의 마른 풀같이 시들어 있던 내 영혼에도 하나님의 봄이 시작되었다. 성령 안에서 말이다. 내가 달라지니까 세상이 다르게 보이고, 다른 사람을 보는 시선이 달라지게 됨을 경험한다. 때문에 비록 이스라엘처럼 황무하다 할지라도(42.18-25, 43.22-28) 하나님처럼 그곳에도 장미꽃을 피울 수 있는 희망을 심어보자. 하나님이 나를 그처럼 포기치 않으셨듯이, 나 또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겠다. ‘오늘은 다르게!’ 나의 삶을 챙겨보자.

두 길이 있다. 하나는 성령님과 함께 가는 길이고(1-5), 다른 하나는 우상과 함께 가는 길이다(9-20). 인생은 연습이 없다. 한 번 살아본 후에 부족하고 후회스러운 것들은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후진기어가 없다는 말이다. AS(애프터 서비스)도 불가능하다. 한 번 뿐인 인생, 본향으로 가는 나그네 인생 길 아닌가.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오늘도 이걸 촉구하는 이사야의 설교 앞에 선다.

 

    예수 믿으세요.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나요 발걸음 무겁게

      이 세상 어디 쉴 곳 있나요 머물 곳 있나요

      예수 안에는 안식이 있어요 평안이 넘쳐요

      십자가 보혈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아요

      예수 믿으세요

      주를 믿는 자 그는 행복해요 영원한 생명 얻으니

      하나님 나라 그의 것이라 어서 예수 믿으세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모든 것이 본래의 자리에 있을 때이고, 그것을 묵묵히 지키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그것이 있지 못할 때 허전하고, 아쉽고, 서운하고, 후회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곤 한다. 반대도 있지 않아야 할 자리에 뭔가가 자리를 잡고 있으면 부담스럽고, 속 상하고, 짜증나고, 분노하기에 이르곤 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떠나 엉뚱한 곳에 가 있을 때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일어난 무수한 갈등이 생겨났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지금 하늘도, 땅도, 산들과 살림과 그 가운데 모든 나무들도 다 자기 자리에 서 있게 하신다.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된 하모니(harmony)가 이루어 질 것이다.

()는 언제나 이런 영적 건강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병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고(22), 그래서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갈 길이 열렸다. 나 한 사람이 바르게 서면 가정(家庭)이 새로워진다. 우리 교회가 건강하게 세워지면 이 민족을 축복할 수 있다. 때문에 지금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얼마만큼 많이 하느냐 보다는 속사람이 얼마나 건강한가가 아닐까 싶다. 하나님이 고쳐주셨으니 이제는 좀 바르게, 다르게 살 때다. 이젠 좀 그렇게 성숙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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