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起) - 히스기야 이야기1(사 36.1-22)

20200827(묵상)

  

 

 

() - 히스기야 이야기(1)

Isa. 36.1-22

  

   구조 관찰

 

   ① () - 히스기야의 위기(36.1-22)

   ② () - 히스기야의 기도(37.1-38)

   ③ () - 히스기야의 치유(38.1-22)

   ④ () - 히스기야의 몰락(39.1-8)

   

 

랍사게, 네 이놈!

 

히스기야(Hezekiah)는 유다 제13대 왕으로 29년 동안 유다를 다스렸다.

그는 열왕기하 18~20, 역대하 29~32, 이사야 36~39장에 [공관역사]로 다뤄지고 있을 정도로 성경의 주목을 받은 사람이다. 여기에는 그럴 만 한 이유들이 있다. 이를 앞으로 4(36-39)에 걸쳐 묵상코자 한다. 무엇보다 히스기야 14(1)은 그가 15년 생명을 연장 받은 것을 감안한다면 그의 생애에 매우 중요한 해이기도 하다.

한편 에돔(34)과 시온(35)으로 대비되는 두 길이 제시된 직후에 [히스기야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음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역시 36-39장도 두 지평을 걸어가는 인생들의 행로가 그려지고 있다. 앗수르(산헤립, 랍사게)와 유다(히스기야, 이사야)로 구분되는 두 꼭지점이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는 것이 그것이다. 이 역시 짝을 이루는 말씀인 셈이다(34.16).

하나님은 다시 반복되는 돌림노래를 통해서 어떻게 사는 것이, 무엇으로 사는 것이, 누구와 더불어 사는 것이 영영한 심판’(에돔/에서, 34)이 아닌 영원한 거룩한 길’(유다/야곱, 35)로 행하게 되는가를 들려주신다. 에돔에 이어 산헤립을, 유다에 이어 히스기야가 각각 주제 멜로디가 되어 반복됨으로써 분명한 메시지를 던지신다.

   

 

히스기야(Hezekiah)

 

   “히스기야가 온 유다에 이같이 행하되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선과 정의와 진실함으로 행하였으니 율법에나 계명에나 그의 하나님을 찾고

    한 마음으로 행하여 형통하였더라.”(대하31.20-21)

 

히스기야(‘여호와는 강하시다.’)는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에 필적한 왕이 없을 정도로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왕하18.3) 산당과 모든 우상을 제하였다. 하나님과 연합하여 떠나지 않았으며(왕하18.6), 그 결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매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왕하18.7).

그는 자신의 재임 기간 중에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BC 722)하는 것을 목도한다(왕하18.10). 아마도 이 사건은 결과적으로 남왕국 유다로 하여금 강력한 종교개혁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도록 했을 것이다(역대하 29-31). 이스라엘처럼 멸망하지 않는 길은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산헤립의 침공(36, 왕하18.13-37) 앞에서도 히스기야는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37, 왕하19:1-37, 대하32.1-23).

이런 와중에 자신의 죽음 선고를 받고도 하나님께 기도했고, 15년의 생명을 연장 받을 만큼 그는 한 사람 성도로서의 신앙생활에서도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38, 왕하20.1-11). 하지만 그는 마지막 시한부 인생을 교만으로 마무리함으로써 지금까지의 빛난 삶이 마지막 마디에서 그만 빛바래고 만다(39, 왕하20.12-21, 대하32.24-33). 하나님이 그의 심중에 있는 것을 다 알고자 하사 시험하셨”(대하32.31)음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랍사게(Rabshakeh)

 

   “랍사게가 그들에게 이르되 대왕 앗수르 왕이 이같이 말씀하시기를”(36.4b)

   “내가 이제 올라와서 이 땅을 멸하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 없음이겠느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올라와 그 땅을 쳐서 멸하라 하셨느니라.”(36.10)

   “너희는 대왕 앗수르 왕의 말씀을 들으라.”(36.13b): 하나님을 훼방’(37.4)

     [1] 애굽을 의지하면 손에 찔리리니(6,9b)

     [2] 여호와께서 우리를 긴지시리라 할지라도 속지 말라(7,15,18).

     [3] 히스기야에게 미혹되지 말라(14).

         ↔

   “이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37.6)

 

한편 앗수르 군대는 이미 라기스(Lachish, 예루살렘 남서쪽 40, 2)까지 밀고 들어와 있다. 그 와중에 앗수르에서는 랍사게가, 그리고 유다에서는 궁내대신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사관 요아가 협상을 벌인다(2-3). 그러나 유다는 앗수르의 랍사게의 일방적인 통고를 듣는(4- ), 그것도 성 위의 백성들이 모두 다 유다 방언으로 그것을 듣는 치욕스런 장면이었다(2,11,13).

세상은 여전히 자신의 힘을 믿고 오만불손(傲慢不遜)하며 방자하다(4-5).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을 뿐만 아니라 인간 산헤립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는다(7,10,15,18-20). 이것도 모자라 하나님 행세를 한다(16-17). 스스로를 에돔의 길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34).

사실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과(7-9, 31.1-3) 앗수르가 진노의 막대기가 되어 유다를 칠 것이라는 것은(10, 10.5-6) 전혀 엉뚱한 소리가 아니다. 하지만 앗수르는 심판의 주체(주인)가 아니라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자신들이 의로워서가 아니기에 결국은 역할이 끝나면 저들은 멸망을 받게 되어 있다(10.24-32, 31.27-33). 이걸 모르니 망나니처럼 날뛰는 것이다. 그럴수록 심판의 나락으로 추락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만큼 말이다.

랍사게는 하나님을 알거나 믿지도 않는 불신자(不信者). 그런데 가증스럽게도 하나님을 입에 오르내린다. 이는 마치 독재자들이 성경, 특별히 로마서 131-7절을 믿지도 않으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소리치는 것과 같은 파렴치함이다.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면 하나님의 이름까지도 수단으로 사용하는 인생들에게서 인간으로 이렇게 살 수 밖에 없을까?”라는 연민을 느낄 뿐이다.

이런 종류의 인생들은 이사야 시대에만 있었던 게 아니다. 나 역시 나의 이익과 목적을 위해 교묘하게 성경을 끼워넣기하고 있다면, 그래서 하나님마저도 허풍(교만) 속에 집어 넣어버린다면 결국 나 또한 에돔으로 가는 길에 합류한 동류인 셈이다(34). 무식하고 무지하면 용감한 걸까. 날개가 달렸다고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나방의 자유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게 따른 장렬한 사망이라는 결과 역시 책임져야 한다. 하지만 심판(죽음)으로 그래야만 된다. 이것도 모르고 천방지축(天方地軸)으로 날뛰는 랍사게가 불쌍하기만 하다.

   

 

부스러기 묵상

 

히스기야는 지난 14년 동안 오직 하나님만을 섬겼다(1, 왕하18.1-13).

그럼에도 위기는 찾아온다. 이렇듯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해서 고난과 시련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유다를 다시 율법의 깃발이 펄럭이는 나라가 되게 하는, 형통할 때나 앗수르에 대항하여 싸우는 시련의 때나 전혀 흐트러지지 않는다. 그는 적() 앞에 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준비된 전략을 가지고 싸운다(21-22). 온 유다 역시 랍사게의 헛소리에 현혹되어 우왕좌왕(右往左往)할 만큼 유약하지 않다. 이게 다 히스기야의 영적 지도력에서 비롯된 힘이다.

한 사람이 바르게 살면 그것이 몰고 오는 결과가 무엇인지를 히스기야에게서 배운다. 한편 그의 아버지 아하스는 우상숭배자였다(대하28.1-27). 그런 아버지 아하스 밑에서 하나님이 높이신 아들 히스기야가 나왔다는 것은 기적이다. 동시에 히스기야를 이어 왕이 된 아들 므낫세 역시 아주 악한 우상숭배자다(대하33.1-9). 이것 역시 기적이다.

어느 때에나 히스기야처럼 사는 자와 랍사게처럼 사는 자는 공존한다. 얼른 보면 랍사게가 현명해 보이고, 상식 있어 보이고, 그럴 듯 해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예루살렘의 코 끝 밑인 라기스(Lachish)까지 앗수르의 군대가 진을 쳤고(2a), 그것도 모자라 랍사게가 이끄는 앗수르 대군이 윗 못 수도 곁 세탁자의 발 큰 길”(2b)에까지 진군해 왔으니, 승자(勝者)처럼 보이는 자의 당당함을 나무랄 명분도 없어 보인다.

바로 이 부분이 언제나 사탄이 공격하는 틈새다. 사탄은 늘 강자(强者)의 논리를 앞세워 히스기야(‘’)로 하여금 누구나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만을 부각시킨다. 그것만큼 하나님을 보는 눈이 차단될 수 있다. 그래서 이미 게임이 끝난 것처럼 하나님보다 앞서 포기해 버리도록 교묘하게 유도한다. 서로 상대가 비슷비슷하면 해 볼 만 한 마음이라도 드는데 결과가 뻔해 보이면 그만 꼬리를 내리는 것, 이것은 동물의 세계에만 있는 상식이 아니다.

때문에 랍사게처럼 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그처럼 공동체의 분위기를 자멸하도록 이끄는 말꾼들이야말로 유다(하나님의 백성)가 가장 경계해야 할 악의 축이다. 동시에 이것이 보이지 않는 영적 전쟁이라는 통찰을 통해 사건의 본질을 직시하는 히스기야의 영성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생각한다. 두 지평 사이에서 이사야서를 내려다보고, 또 읽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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