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18(묵상)
회복: 성령님께 길을 찾다.
욜2.18-32
본문 관찰
회복1(18-20) – 매뚜기 떼 재앙이 물러가다.
회복2(21-32) - 땅과 후손이 회복되다.
땅의 회복(21-22) - 땅이 즐거워하다.
이스라엘의 회복(23-32) - 성령을 받다.
회개, 그 이후
“그 때에 …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18-19)
“시온의 자녀들아 …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23,28- )
회개, 그 이후가 눈부시다.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시는 분이시지만, 그럼에도 ‘그 때에’(18a) 다시 마음을 돌이켜 회개할 때 그가 드리는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시다. 이것이 요엘의 메시지가 다시 ‘그 때에’로 급변하는 이유다. 마침내 회복이다. 앞서 땅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닥친 메뚜기 재앙이 물러가고 회복의 은혜가 약속으로 선포된다. 이 대목에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32)에 임할 성령이 약속으로 주어진다.
회복1(18-20) – 매뚜기 떼 재앙이 물러가다.
회복2(21-32): 땅과 후손이 회복되다.
땅의 회복(21-22) - 땅이 즐거워하다.
이스라엘의 회복(23-32) - 성령을 받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 주리니 … 흡족하리라
내가 다시는 너희가 나라들 가운데에서 욕을 당하지 않게 할 것이며”(19)
마침내 땅과 이스라엘의 회복이다. 바로 ‘그 때에’(18- )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초토화시킨 ‘메뚜기 떼’(강한 군사, 북쪽 군대; 5b,20a)를 물리치시고, 그 땅과 이스라엘이 황무함에서 벗어나는 ‘회복’(19)하는 때는 언제인가. 바로 회개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先 회개(1.13-20, 2.12-17)에, 하나님은 後 회복으로 응답하신다(18- ): “그 때에 여호와께서 자기의 땅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그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라.”(18)
이스라엘의 회복(23-32) - 성령을 받다.
여호와께서 마침내 매뚜기 떼 재앙이 “멀리 떠나게 … 쫓아내”(20)시자 땅(21-22), 그리고 시온 곧 이스라엘이 회복된다(23- ). 이로써 여호와의 날이 심판이 전부가 아닌 구원의 날이 되게 하신다. 그날에 하나님은 당신의 영인 성령을 부어주셔서 놀라운 구원을 이루신다(28-32).
요엘서의 성령
놀라는 것은 신약이 이를 말하고 있는데 이 일이 바로 요엘의 메시지(예언)의 성취로 선언되고 있음이다(행2.16-21 → 욜2.28-32). 이어지는 베드로의 설교 결론 또한 정확하게 요엘 2장의 순서(흐름, 선후)와 일치한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행2.37-39)
구약의 성령
① 성령의 임하심은 제한적이거나, 특정한 상황, 특별한 사람에게만 인가?
② 성령이 임한 사람은 어떤 특징이 나타나는가?
③ 성령은 누구에게 임하시는가?
성령님은 구약에서도 일하셨다. 하지만 신약과 비교해 보면 좀 다른 방식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요엘의 예언은 아주 특별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을 만민(‘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시겠다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28). 하나님은 만민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점은 사도행전에 성령님이 임하신 이후의 모습을 보면 좀 더 분명하다.
성령의 임하심은 제한적이다: 특정한 상황과 특별한 사람에게 한시적으로 임하셨다. 먼저, 여호와의 성막을 건축하는 것을 위해 브살렐에게 임하셨다(출31.1-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또한,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셨다(삿6.34):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이 그의 뒤를 따라 부름을 받으니라.”
특별한 것은, 사울 왕에게 임하셨다가(ab), 떠나시고(c), 다시 임하셨다(d). 한편 여호와의 영이 다윗에게 임하시고, 사울에게서 떠나신다(c).
a. 삼상10.9-10 - 그가 사무엘에게서 떠나려고 몸을 돌이킬 때에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셨고 그 날 그 징조도 다 응하니라. 그들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
b. 삼상11.6 -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의 노가 크게 일어나
c. 삼상16.13-14 -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d. 삼상19.20-23 - 사울이 다윗을 잡으러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이 선지자 무리가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영이 사울의 전령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어떤 사람이 그것을 사울에게 알리매 사울이 다른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했으므로 사울이 세 번째 다시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이에 사울도 라마로 가서 세구에 있는 큰 우물에 도착하여 물어 이르되 사무엘과 다윗이 어디 있느냐 어떤 사람이 이르되 라마 나욧에 있나이.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걸어가며 예언을 하였으며
다른 하나는, 선지자에게 임하셨다.
a. 스가랴(대하24.20) - 이에 하나님의 영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그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그들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하지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하나
b. 에스겔(겔11.23-25) - 여호와의 영광이 성읍 가운데에서부터 올라가 성읍 동쪽 산에 머무르고, 주의 영이 나를 들어 하나님의 영의 환상 중에 데리고 갈대아에 있는 사로잡힌 자 중에 이르시더니 내가 본 환상이 나를 떠나 올라간지라. 내가 사로잡힌 자에게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신 모든 일을 말하니라
부스러기 묵상
선지자 요엘은 구약교회라는 땅에 서서 미래에 임하실 성령을 소망하고 있다.
그래서 예언이다. 그는 약속된 성령이 신약교회에서 성취될, 그야말로 영광스러운 성령행전이 올 것을 이미 내다 보고 있었다. 한편 성령은 ‘만인’에게 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지금 우리는 이 언약이 성취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자녀들, 늙은이, 젊은이, 남종과 여종에게 주의 영이 부어짐 바 된 새시대 말이다. 그렇다, 요엘 2장 28-32절 말씀이 사도행전 2장 16-21,38-40에서 성취되었다.
그렇다면 이 영광스러운 성령이 오늘 우리에게 임하신 그 증거는 무엇일까? 종교개혁주일을 맞으면서 요엘이 바라본 성령행전을 교회의 모습에 비춰보고 싶었다. 교회는 몇 가지 제도나 시스템을 고치고 바꾸는 차원으로 새롭게 될 수 있을까? 과연 한국교회는 성령 안에 있는가. 그리고 희망이 있는가.
사도행전 교회(행2.43-47)가 희망이다. 성령은 나를 출세시키고,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나를 좀 더 편안하고 안락하게 만들어주는 요술방망이가 아니다. 성령은 내가 부려먹는 종이 아니다. 성령은 ‘아, 저 분 참 능력있네’라는 걸 보증해 주는 도장이 아니다. 결국 성령을 이용해먹기에 바쁜 쪽이라면 그는 성령의 사람이 아니다. 이런 자들은 감히 기독교와 성령을 빙자해 결국 자기 배를 채우는 기독교 무당에 가까운 자다.
오늘 우리는 성령님을 사유화해서 내 욕망과 욕심을 이루어보려는, 그래서 기독교와 복음을 값싼 은혜로 전락시키면서까지 <성령 이용해먹기>를 경쟁하는 죄를 회개해야 한다. 성령님이 오셔서 내가 변하고, 우리 가정이 변하고, 우리 공동체가 변하여 새롭게 된 바로 그것을 향해 무릎을 꿇는다. 성령님이 마음껏 일하시도록, 성령님이 우리 공동체에서 일하심을 사도행전적 교회로 나타내 보이고 그렇게 살아가는 은혜를 구한다.
약속하신 성령이 오심으로 시작된 사도행전적 교회가 답이다. 종교개혁은 구호가 아니다. 삶이다. 생명을 건 순교로 얻어낸 역사다. 우리 교회 역시 성령이 일하시고, 이끄시고, 주장하시는 그런 교회이기를 소망한다. 사람이 주인인 교회가 아닌 성령님이 앞서 인도하시는 바로 그 교회를 향해 다함께 나아가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