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15-16(묵상)
메뚜기 재앙주의보
욜 1.1-20
본문 관찰
메뚜기 재앙주의보(1-9) - 여호와의 날
여호와의 날이 가까움(10-20) - 부르짖으라!
실상: 황무함(10-12)
해답: 금식 & 회개(13-20)
여호와의 날, 그 예고편
“아,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이 다가왔다.
전능자께서 보내신 파멸이 다가온다.”(15, 우리말성경)
선지자 요엘은 탄식과 애곡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왜 그럴까. 다가올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메뚜기 재앙주의보는 마치 이미 경험한 것처럼 생생하게 등장한다. 이렇듯 이스라엘은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있다. 그렇다면 메뚜기로 말미암는 땅의 황무함은 단순히 자연재앙일까. 선지자는 단지 자연재해와 다름없는 것을 두고 탄식하면서 금식과 회개를 촉구하는 것일까. 희미하게나마 이것의 실상이 드러나고 있다. 무엇인가. 15절이다.
메뚜기 재앙주의보(1-9) - 여호와의 날
메뚜기 떼(팥중이, 느치, 황충 = ‘다른 한 민족’; 4,6)가 이스라엘(‘내 땅’, 6)은 물론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내 포도나무’, ‘내 무화과나무’, 7) 과수원을 쓸고 지나간다. 이에 요엘은 ‘온 이스라엘’(모든 주민들, 2a)에게 슬피 울며 애곡할 것을 선언한다(8). 이방 나라도 아닌 이스라엘에게 임한 재앙이다. 요엘이 기상청 공보관이 아닌 선지자이고, 그에게 임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에서 이 메뚜기 재난주의보는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재앙을 말씀하신다면 그것은 우연한 재난이 아니라 거기에는 하나님이 뭔가 말씀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들어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긍정적인 웃음 분위기가 아닌 부정적인 슬픈 애곡이라면 뭔가 심상찮은 기운이 감도는 것 아니겠는가. 이렇듯 하나님은 진노를 발하고 계시고, 성전의 제사마저 끊어졌고, 이스라엘에게는 기쁨과 웃음이 사라지고, 슬픔 뿐이다. 이것이 요엘에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이스라엘의 형편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움(10-20) - 부르짖으라!
실상: 황무함(10-12)
해답: 금식 & 회개(13-20)
왜 이처럼인가? 분명한 단초는 ‘여호와의 날’(15), 즉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이 왔다는데 있다. 이것이 보이는 실상인 이스라엘의 ‘황무함’(10-12)에 들어있는 보이지 않는 메시지다. 하지만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그 날이 오고 있다. 메뚜기 떼가 몰고 올 재앙은 논과 밭과 포도원과 과수원의 모든 소산이 전무할 뿐만 아니라 모든 나무가 다 시들어 버리는 재앙이다. 문제는 이 재앙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무관하지 않다는데 있다: “이러므로 사람의 즐거움이 말랐도다.”(12b)
하지만 이스라엘은 지금 보이는 재앙으로 슬퍼하지만 선지자의 생각은 달랐다. 요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 통곡하며 부르짖을 것을 요구한다. 먼저 제사장들에게(13- ), 그리고 이들을 통해 장로들과 이 땅의 모든 주민들에게 금식하며 통곡으로 기도하라고 외친다: “너희 하나님의 성전으로 모으고 여호와께 부르짖을지어다.”(14b) 왜 이처럼 긴박하게 움직이는가. 15절이어서다:
“슬프다 이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부터 이르리로다.”
재앙주의보가 ‘여호와의 날’을 통해 실행된 참담한 실상을 보라(16-20). 의식주(衣食住)가 부족한 것은 오히려 다행이다. 문제는 성전이다: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 하나님의 성전에서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16b) 그야말로 영육간의 총체적 고통이고 환난이고 재앙이다. 바로 하나님의 심판이 그렇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렇게 무너지고 그것으로 끝인가. 정말 그런가. 아니다. 이 재앙의 폭포수 속에서도 희망의 무지개는 그 빛을 발한다.
역시 요엘 선지자다(14b,19a,20a):
∙“너희 하나님의 성전으로 모으고 여호와께 부르짖을지어다.”(14b)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19a)
∙“들짐승도 주를 향하여 헐떡거리오니 …”(20a)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제사장들로부터 온 백성에 이르도록 이스라엘이 드리는 기도를 찾으신다. 결국 재앙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찾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핵심이다. 여호와의 날이라는 재앙의 집행에서도 하나님은 금식과 회개의 무릎을 원하시고 찾으신다.
부스러기 묵상
여호와의 날은 이스라엘 역시 예외일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대 아래 놓이게 했는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재앙의 원인을 알아야 그것을 해결할 해법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선지자 요엘은 분주하게 움직이는 중이다.
이제 곧 이스라엘은 메뚜기 재앙과 같은 전쟁 곧 하나님의 심판이 올 것이다. 하지만 이 재앙의 집행보다 더 우선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금식하고 회개하는 것이다. 임박한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은혜의 길이 제시되고 있다는 점에서 요엘서의 미래는 반드시 비극적이지만은 않다. 하나님은 지금 한 손에는 진노의 채찍을 다른 한 손에는 회복의 은혜를 들고 계신다. 하지만 여호와의 날이 예고되고 있을 수 밖에 없을 만큼 이스라엘의 상황은 녹녹하지 않다. 예고는 그냥 해보는 연습이거나 단순한 시뮬레이션이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 시그널을 받을만큼 그 집행 또한 임박하다.
이제 이스라엘은 예비종(예고편)과 시작을 알리는 신호(본방송, Live) 사이에 서 있다.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 이 소식을 전하고 계신다. 하나님이 작정하셨다면 이것은 예사로운 게 아니다. 예고편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어떻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 하나님의 공의 앞에 떨 수 밖에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