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10(묵상)
메시야 이야기
Isa. 61.1-11
본문 관찰
A 나(1-7)
B 하나님(8-9)
A' 나(10-11)
시온일보(ZION日報)
과연 이 노래를 부르는 종은 누구인가?
사실 구약에서 이 종의 사명(1-3)을 성취한 자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공생애를 시작하는 예수님께서 이를 읽으시면서 당신이 이를 성취할 것을 선언하신다(눅4.21):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4.16-20 → 21 참조) 그렇다면 신약의 독자 입장에서 볼 때 이 노래를 부르는 자는 명백하다. 하지만 포로기를 사는 이사야 시대의 사람들이 이를 알았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스라엘의 희망이 바로 여기까지 선포되고 있다는 점이다.
메시야 소명(1-3; 눅4.16-21)
vs
이스라엘 미션(4-7)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1a)
여호와께로부터 소명을 받은 바로 그 ‘나’에게 여호와의 신이 임함으로써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1). 여기 ‘임하였으니’의 의미는 단회적이 아니라 “임하여 있다”는 계속적인 상태를 가리킨다. 마침내 하나님은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위해 지속적으로 일하실 것이다. 이스라엘이 포로기를 끝내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일을 위해 아무런 공로가 없는 때에 이 메시지가 선포되고 있다는 점, 곰곰이 생각해야 할 대목이다. 성령이 임하여 계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편 기름부음은 사명과 역할을 위한 것이다. 사울 왕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이것은 그의 인격이 새로워지는 것이 아닌 역할이 주어지는 사건이다. 종의 임무(1b-3a)는 먼저 은혜의 해(안식년, 희년, 출21.2, 신15.12; 레25.10)와 신원의 날(의인이 받는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을 전파하는 일이다(2). 이를 통해 마음이 상한 자가 고침을 받고, 포로고 갇힌 자가 놓임을 받아 자유롭게 된다(1b). 종(메시야)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진정한 쉼과 안식을 가져다 줄 것이다.
또한 종은 모든 슬픈 자들을 위로함으로써 근심과 슬픔이 변하여 희락과 찬송을 발하게 하사 그들로 하여금 여호와의 영광을 나타내게 할 것이다(3). 잃어버린 기쁨의 회복, 어쩌면 메시야의 첫 이적에서 요한이 무릎을 치면서 통찰해 낸 것이 이것이 아니었을까(요2.1-11). 그러니까 요한복음은 혼인집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치의 기쁨을 잃어버린 이스라엘(‘나’)을 염두에 두고서 그들의 기쁨을 회복하는 메시야를 소개함으로써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한다.
메시야에 의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됨으로써 마침내 이스라엘은 ‘다시’ 회복된다(1-3 → 4-7). 역시 잊지 않아야 할 것은 이것이 이스라엘이 자력(自力)에 의한 회복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그들’(너희, 이스라엘)은 이방인들로부터 온 열방의 재물을 먹을 것이지만(5,6b), 또한 ‘여호와의 제사장’(하나님의 봉사자)라는 칭함을 받을 것이지만(6a), 그리하여 수치(능욕)에 대한 보상으로 영영한 기쁨을 얻게 되겠지만(7), 그러나 이것은 메시야가 자신의 소명에 순종함으로써 얻게 되는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의 화답(8-9)
vs
메시야의 찬양(10-11)
놀라운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이렇게 해서 ‘영원한 언약’(8, 24.5, 55.3)으로 들어간다는 점이다. 이것은 불의(不義)를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공의(公義)에 의해 맺어진다는 점에서 은혜언약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이 언약을 감당할 만 한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스라엘이 걸어가야 할 길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공의로운 길이다. 이것이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가 영원한 언약 관계에 있음을 드러내 준다. 누구에게까지 인가? 바로 이방까지다. 이를 이방이 알고 또 보게 될 것이다(9).
종은 자신을 이처럼 사용하신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린다(10). 나(종, 메시야)의 기쁨과 즐거움은 오직 여호와로 말미암는다는 점을 주목하면서 말이다. 사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구원과 의로 감싸 주셨기 때문이지 않은가. 이렇듯 메시야가 자신과 하나님과의 초점을 철저하고도 정확하게 맞추는 걸 보면서 종의 겸손과 순종의 면을 발견케 된다. 종(메시야)이 그러할진대 감히 좁쌀만 한 것을 뽐내고 자랑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고 부끄러운 일인지 세삼 고개를 숙인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 종을 통해 이루신 일은 모든 민족들에게 샘 솟듯이 솟아나게 하실 것이다(11). 이것이 열방에 이루어진(질) 하나님의 영광이다. 여호와의 영광은 이렇게 움트고 싹을 내며 자랄 것이다. 비록 포로의 땅이요, 아직 아무런 희망이 엿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바로 그때 당신의 종을 통해 열방을 향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신다. 지금 종은 이를 통찰하고 있다. 그래서 이것이 종의 기쁨이 되었다. 하나님과 그분이 하신 일에 초점을 맞추고 거기에 반응하는 것, 이것이 종으로 부름 받은 자에게 주어진 가장 영광스러운 길이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부스러기 묵상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1a)
시온의 회복을 위해 삼위 하나님이 일하신다.
아버지 하나님(주 여호와)은 성자 예수님(종인 나, 메시야)에게 성령님(여호와의 신)을 임하게 하심으로써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신다. 이 복음의 은혜를 받은 자는 자신이 회복되는 것은 물론이고 “무릇 이를 보는 자가 그들은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이라”(9b)는 것을 인정하도록 일한다. 그리고 이것이 지금 종이 기뻐하는 이유다(10a). 아!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삼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아름다운 소식을 받은 자는 물론이고 이를 보는 자에게까지 여호와께서 하신 일이 전파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역(逆)으로 보면, 하나님이 나에게 이루신 일(복)이 나에게서 멈추고 있다면 종의 기쁨을 가로막고 있는 게 아닌가. 감히 내가 메시야의 기쁨을 거스르는 자로 살 수도 있다는 점이 나를 긴장하게 만든다. 내가 복음에 어떤 반응을 하며 살아가는가가 참 중요한 주제라 싶다. 마침내 ‘열방’에게까지 움트고 자랄 복음의 영광이 아닌가. 정말이지 복음에 바르게 반응하며 살아보자. 지금 삼위 하나님이 일하고 계시지 않은가. 이 형언할 수 없는 기쁜 소식이 내게로 왔으니 나를 통해서도 열방에까지 하나님이 하신 일이 전파되도록 해 보자.
언젠가부터 복음은 나를 구체적으로 새롭게 바꾸는 일임을 알아간다. 단지 머리 안에서 맴도는 관념의 반응이 아닌, 그분이 나를 고치려 하실 때 거기에 기꺼이 반응함으로써 어떤 대가도 지불하는 것, 그것이 주는 자유함과 기쁨을 맛보고 알아가고 누리는 것, 이것이 복음으로 옷을 갈아입는 나임을 조금씩 깨달아 간다. 이를 통해 내 안에 주님이 계심을 늘 확인한다. 내 영혼 깊은 좌소(坐所) 중앙에 앉으사 나를 다스리시며, 주관하시며, 이끄시며, 나를 새롭게 하시는 주님을 찬양한다. 오늘 이사야 61장이 이처럼 더 가까이 내게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