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07(묵상)
오늘을 치료해야 내일이 희망이다.
Isa. 58.1-14
본문 관찰
과거의 진단(1-5)
“내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알리라!”
현재의 처방(6-7)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
미래의 약속(8-12)
“그리하면 …”
진단 & 처방
종교적 형식(모양)과 신앙의 질(質, 내용)은 어떤 관계일까.
주님은 이사야를 통해서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정죄하신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외식주의 신앙이다. 겉모양은 그럴듯하지만 실상 속을 보면 이스라엘의 이중성은 놀랍기 그지없다.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죄를 죄로 느끼지 못하며 사는 삶, 거기에 종교적인 모양새만으로 넘쳐날 때 과연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진단하실 때는 무엇인가 어떤 일이 시작된 것이다. 처방전을 받아든 이스라엘이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따라 미래의 모습은 결정된다. 바로 여기에 성도의 책임이 있다. 미래는 오늘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문제는 오늘이다.
현재의 형식(1-7) - 진 단
나의 백성에게 허물을 알리고,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알려라(1-5).
그들이 마치 공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않는 민족이나 되듯이,
날마다 나를 찾으며, 나의 길을 알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무엇이 공의로운 판단인가를 나에게 묻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기를 즐거워한다고 한다.
주께서 보시지도 않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금식을 합니까?
너희는 다투고 싸우면서, 금식을 하는구나.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겠느냐?
굵은 베와 재를 깔고 앉는다고 해서 어찌 이것을 금식이라고 하겠으며,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6-7)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들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양식을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표준새번역)
이처럼 이중적으로 살아도 ‘내 백성’(1)이다. 그리고 무엇이 그들의 허물과 죄인지 알리도록 배려하신다. 죄를 즉각적인 벌로 집행하지 않으시고, 또한 조용한 침묵이 아닌 모두가 다 들을 수 있도록 나팔같이 크게 외쳐서 공개하도록 명하신다. 이스라엘은 이제 핑계할 수 없게 되었고, 선지자를 통해 밝혀진 죄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선택해야 한다. 이처럼 하나님은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에게는 또 한 번의 기회를 주고 계신다.
이스라엘의 죄는 불의를 행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과 함께 하나님을 찾아 묻고,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즐거워한다는 점이다(2).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금식의 규례를 지키지만 역시 그러면서도 오락을 즐기고 일꾼들에게는 무리한 일을 시키고, 다투고 싸우면서 금식을 한다(3). 이율배반(二律背反)인 셈이다(4).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하다: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5a) 정말이다. 굵은베와 재를 깔고 앉아 있는다고 해서 어찌 그것이 금식이라고 하겠는가. 내용은 온대간대 없고 배만 고플 뿐, 그래서 종교적인 형식만 난무할 뿐이다. 마치 생명 없는 죽은 나무와 같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는 것만으로 말씀의 문을 닫지 않으신다. 이러한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신다(6-7). 무엇이 하나님, 즉 “내가 기뻐하는”(6a) 것인가를 밝히 보여주신다. 이게 은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금식하는 사람의 어떠함에 맞추어져 있지 않다. 오히려 금식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그의 이웃과의 관계에 집중되어 있다. 하나님은 금식을 얼마나 자주,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간절하게 하느냐와 같은 문제에는 관심이 없으시다. 금식을 이웃사랑의 맥락에서 접근하시고 평가하신다. 금식하는 사람은 그 행위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하지만 정작 하나님은 금식의 정체성을 이웃사랑의 척도로 풀어 가신다.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죄를 뿌린 것 때문에 심각하게 무너져있는 현재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형식과 모양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바른 삶, 의로운 삶이라는 내용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방향을 돌리는 것만이 현재의 연장일 수 밖에 없는 처참한 미래를 피할 수 있는 길이다. 이미 그 대안은 제시되었다. 하나님은 불의한 이스라엘이지만 그럼에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신다. 마치 해답을 먼저 알고서 시험을 치르는 것과 같다. 이제 미래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기 나름이 된 셈이다. 이렇듯 만사는 심는 대로 거두는 것 아닌가(갈6.7).
미래의 내용(8-14) - 처 방
그리하면(8-12)
네 의를 드러내실 분이 네 앞에 … 주의 영광이 네 뒤에서 호위할 것이다.
네가 주님을 부르면 주께서 응답하실 것이다.
주께서 너를 늘 인도하시고,
너는 마치 물 댄 동산처럼 되고,
너의 백성이 … 재건하며 … 기초를 다시 쌓을 것이다.
사람들이 너를 두고 … 이라고 부를 것이다(표준새번역).
희망과 축복의 미래는 시간이 지나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마치 그 옛날 광야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이 누워서 떡 먹기 식으로 주어지지 않았듯이 말이다. 가나안은 정복(전쟁)으로 얻어내어야 할 땅이었던 것처럼 지금 이사야의 설교를 듣고 있는 청중들 역시 미래로 가는 길이 때가 되면 그냥 임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죄의 싹을 현재의 땅에서 뽑아내지 않으면 미래의 정원에는 잡초만 무성하게 될 것이다. 지금 자라고 있는 죄의 싹을 단절시키지 않으면 미래는 현재의 연속일 뿐이다.
나의 현재가 건강하면 미래는 하나님이 채우신다고 언약하신다(8- ). 하나님은 열린 미래를 따라 나아가는 자를 보호하시며(8), 기도에 응답하시며(9), 언제나 풍족할 것이며(11), 회복의 은혜를 베푸실 것을 약속하신다(12). 그렇다면 역으로 생각해 볼 때 미래(8-12)가 없는 것은 그에게 현재의 내용이 없기 때문이라는 뜻 아닌가. 결국 형식과 모양만 그럴듯 한 현재를 통해서는 복되고 아름다운 미래를 담을 수 없다는 뜻이 된다. 오늘은 영적으로 가난하면서 내일의 부요만을 꿈꾸는 것이 얼마나 허상(虛像)인가.
중요한 것은 오늘을 어떻게 사느냐에 있다. 오늘과 내일은 연속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내일을 보는 거울과 같다. 오늘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즉 하나의 모범으로 제시된 바로 그 금식으로 채워간다면 내일은 이미 약속하신 대로 주어지게 될 것이다(6-7 → 8- ). 과연 답지 못하고 왜곡되어 있는 부끄러운 오늘을 어떻게, 그리고 무엇으로 치료할 수 있을까. 오직 말씀이다. 말씀으로 돌아가는 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부스러기 묵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과 안식일이 보인다.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께 하는 것이지만 그 가치와 평가는 사람에게 이를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달려있다. 따라서 하나님께 드리는 매우 종교적인 행위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이웃사랑이라는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만나는 셈이다. 그러므로 가장 종교적인 것이 가장 위선적이고 위조된 경건이자 종교적 쇼나 오락에 불과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