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론이여, 합락되었도다!(사 21.1-17)

20200807(묵상)

  

 

 

바벨론이여, 합락되었도다!

Isa. 21.1-17

  

   본문 관찰

 

   바벨론(1-9)

      엘람이여 올라가고 메대여 에워싸라

      그들이 식탁을 베풀고 파수꾼을 세우고 먹고 마시도다

         ↔ 합락되었도다 바벨론이여!

      그들이 조각한 신상들이 다 부서져 땅에 떨어졌도다

   이스라엘(10)

      내가 짓밟은 너여, 내가 타작한 너여

   두 마(세일, 11-12)

   아라비아(13-17)

      물을 떡을 가지고 도피하는 자를 영접하라

      그들이 칼날을 피하며 도망하였음이니라

      1년 내에 게달의 영광이 다 쇠멸하리니

   

 

바벨론. 두마. 아라비아

 

이방 나라들의 흥망성쇠(興亡盛衰) 이야기가 계속된다.

한편 “3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행하여”(20.3) 자신을 하나님의 심판 예표(등대)로 내놓았던 이사야가 이번에는 혹독한 묵시’(2a)를 봄으로써 해산이 임박한 여인의 고통(3)마음이 어지럽고”(4) 놀라서 떠는 지경에까지 나아간다. 실로 선지자의 고난이 눈물겹다. 하지만 이 와중에서도 바벨론(1-9), 두마(에돔, 11-12), 아라비아(13-17)에 대한 심판 예고를 주저 없이 계속한다.

그 와중에도 비록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의해 타작 마당의 곡식이 되는 것과 같은 고통과 고난이 있지만 그러나 멸망은 아니다(10). 이처럼 안팎으로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혹독한 고난을 통해서 정금처럼 연단되고 있다. 저들은 고통의 틈바구니에서 무엇이 심판으로 가는 길을 막고, 또 무엇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여는가를 배우게 된다. 이런 때에 이사야를 통해서, 그처럼 길을 안내하는 사명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오래도록 묵상해 본다.

   

 

바벨론(1-9)

 

이사야는 이미 13장에서 바벨론의 멸망에 대해 예언했었다. 앗수르가 당시의 패권을 쥐고 있을 때였으므로 바벨론이 열국의 영광’(13.19)으로 등극하는 것은 아직 먼 미래의 일이다. 그런데 연거푸 심판이 선언되고 있다. 결국 이사야는 한 나라의 오고 감의 이 모든 이야기의 주도권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은 것 같다.

바벨론은 엘람(2, 바사)과 메대(13.17)에 의해 무너질 것이다. 앗수르의 영광을 바벨론이 빼앗았듯이, 바벨론도 회오리바람처럼 불어오는 엘람과 메대의 세력 앞에 무릎을 꿇게 됨으로써 영광은 유한하게 끝나고 만다. 이처럼 종말이 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파수꾼을 세워 놓고서 멸망으로 가는 마지막이 될 식탁을 베풀고 먹고 마시”(5a)고 있는 절묘한 대조가 인간의 잔치가 얼마나 초라한가를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함락되었도다 바벨론이여!”(9a)를 외치는 파수꾼의 외침은 시편 기자의 고백을 동시에 떠올리게 만든다: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127.1b)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단지 전달할 수 밖에 없는 파수꾼의 절망의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자신들의 멸망을 자기 입으로 시인할 수 밖에 없는 것, 어쩌면 이게 바벨론의 실상인지로 모른다.

이처럼 저들이 의지했던 인조신(人造神)은 결코 바벨론을 심판으로부터 구원해 낼 수 없다: “그들이 조각한 신상들이 다 부서져 땅에 떨어졌도다.”(9b) 바벨론의 횡포와 그것에 의해 억압받는 사람들의 탄식을 그치게 하는 것은 바벨론이 의지하는 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2b).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세상은 과연 누구로부터 진정한 행복과 평화가 오는가를 모른다. 그러니 축복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 아닌가.

이렇듯 세상에는 언제나 두 종류의 사람들이 살아간다. 노아와 그 식구들처럼 방주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 있고, 동시에 그 시대의 사람들처럼 방주 밖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동일한 사건을 만나지만 결과는 정반대다. 이 둘을 갈라놓는 것은 오직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공의(公義). 바벨론은 이것을 심판이 집행됨을 통해, 그리하여 멸망하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깨닫게 된다.

   

 

두마(11-12)

아라비아(13-17)

 

두마는 아브라함이 하갈에게서 낳은 이스마엘의 아들들 가운데 하나다(11-12, 25.14). 또한 세일, 혹은 에돔은 야곱의 형인 에서가 살던 곳이자 그들의 후손을 지칭할 때 사용된다(32.3). 그런데 문제는 이사야가 왜 서로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이 두 그룹을 동시에 언급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데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사야와 동시대이지만 그의 초기에 활동한 선지자 아모스에 의하면 에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잔인하게 대했다(1.11-12). 사실 이미 저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 왕상11.14-22, 왕하8.20)이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아브라함과 야곱의 후손)을 무자비하게 괴롭힌 것을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으신 셈이다.

한편 아라비아는 마실 물과 먹을거리도 없이 도피하는 피난민 신세가 될 것이다(14). 비록 전쟁과 칼을 피하여 도망하였지만(15) 그러나 1년 내에 저들의 모든 허세가 다 쇠멸하게 될 것이다(16). 아라비아 역시 집요한 심판의 화살을 결코 피할 수 없다는 얘기다. 불행하게도 심판의 원인을 제거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단지 당장 급한 불’(불어 닥친 심판)을 모면하고 피하려고만 한다. 속은 그대론데 겉만 바꿔보겠단다.

이게 죄인의 실상이 아닐까. 죄인은 죄를 씻어야겠다는 자각도 없고, 그렇다고 의() 앞으로 나아갈 능력도 없다. 심판은 피하고 도망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생의 비극이다.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으면서 아침이 오고, 또다시 밤이 오고 있을 뿐이다(12). 그럴수록 시한부인 1년이 째깍째깍 흘러가는 것, 그것이 심판인 줄 어찌 알았으리요(16). 따라서 그 누가, 무엇이 하나님이 시작하신 심판을 중지시킨단 말인가.

   

 

부스러기 묵상

 

   “, 짓밟히는 나의 겨레여,

    타작 마당에서 으깨지던 나의 동포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주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이렇게 내가 그대들에게 전한다.”(10, 표준새번역)

 

시한부 나라들의 심판이라는 밀물과 썰물 이야기를 읽어가고 있는 중이다.

이사야는 이처럼 이어지는 심판 메시지 앞에 몸과 마음이 심한 고통으로 떤다(3-4). 이미 자신에게 보여진 혹독한 묵시가 아닌가(2a). 그러니 모른다고, 전하지 않겠다고 발뺌 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묵시이며, 또한 그것을 전하라는 세워진 선지자이기에 그렇다. 그는 지금 이 두 사이에서 떨고 있다.

하지만 바벨론 사람들은 헛된 잔치상을 차려 놓고 먹고 마시고 있다. 이사야와의 대조치고는 참으로 기막힌 그림이다. 한쪽은 임박한 심판 앞에 해산이 임박한 여인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통곡하는데 정작 심판의 대상인 다른 한쪽은 심판을 자축하는 잔치나 벌리고 있으니 말이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리석은 인생의 꼬락서니에 연민을 느낀다. 이 어찌 바벨론과 두마(세일)와 아라비아만의 문제이랴.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의 법을 떠나면 하나님의 진노 아래로 추락할 것을 알면서도 알량하고도 얄팍한 재주를 의지하며 외줄을 타는 광대이기를 자청한 우리의 모습이 저들과 다르지 않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심판을 피해 보겠다고 꾀를 내 도망해 보지만 결국은 다 쇠멸’(16b)하는 것이 죄 아래 있는 나라(인생)들의 마지막 페이지가 아닌가. 그렇다면 이렇게 끝낼 수는 없는 일이다. 떵떵거리던 나라의 영광도 아침 안개와 이슬처럼 사라지는 역사의 흐름을 읽어가면서 지렁이 같은 이 한 목숨이야 하나님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역시 풀의 꽃처럼 그렇게 지는 것 아니겠는가.

이사야의 탄식이 그래서 눈물겹다: “내가 짓밟은 너여, 내가 타작한 너여!”(10a)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예외는 될 수 없다. 바벨론의 심판과 함께 이스라엘의 죄 역시 바벨론이라는 탈곡기에서 정미(精米)된 곡식처럼 고난을 받게 될 것이다. 바벨론은 심판이라는 타작을 통해 사라지지만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것을 통해 으깨어지긴 했으나 곡식으로 남는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은 버리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비록 상처뿐인 영광이기는 하지만 이 얼마나 감격스런 복인가. 비록 죄는 미워하시지만 당신의 택한 자녀들은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게 된다. 생사(生死)를 건 선지자의 소명 앞에 그는 오직 여호와께 들은 대로”(10b) 고한다. 이 변화무쌍한 사역의 현장에서 오직 하나님께 붙들려서 살아가고 있다. 바로 여기가 이사야의 영성이 자리하고 있는 지점이다. 그럼에도 사역의 길은 몸도 마음도 고통으로 점철된(3-4), 그래도 걸어가야 할 사명의 길이다. 이사야에게서 다시금 사역에로의 끈을 촘촘하게 묶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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