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악한 자를 사용하십니까?(합 1.12-2.1)

20200528(묵상)

 

 

 

왜 악한 자를 사용하십니까?

Hab. 1.12-2.1

 

 

 

 

본문 관찰

 

하박국의 질문2(1.12-17): 왜 악한 자를 사용하는가?

하프타임(2.1): 성루에 서리라.

 

 

 

성루에 서리라!

 

현실과 신학 사이의 모순, 여기서 하박국은 하나님의 침묵을 자신의 질문을 통해서 끌어낸다.

하박국의 하나님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이다. 하박국의 하나님은 인간의 눈으로 볼 때 불의하고, 공평하지 못하고, 당신이 말씀하신 율법대로(공식대로) 일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다. 그래서일까. 우리 보고 뭘 하라는 것이냐. 더 직설적으로는 하나님, 똑바로 하세요!’.

 

 

질문2(1.12-17): 왜 악한 자를 사용하는가?

 

하박국은 비록 유다가 율법을 떠나 불의함에 따라 혼돈과 흔들림으로 휘청거리기는 하지만 끝내 사망에는 이르지 않은 것을 알고 있다(12a). 그러니까 북왕국 이스라엘처럼 멸망에는 이르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확인이라도 하는 듯 질문에 담아 하나님께 토해낸다. 그러면서 단지 바벨론을 통해 심판과 징계를 하실 것을 또한 알고 있다고 고백한다(12b).

하지만 하박국은 근본적인 의문에 찬 질문을 다시 꺼낸다: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13b) 무슨 말인가. ‘다 좋은데 하필 악한 자 바벨론을 들어 그들보다는 선한 유다를 삼키는 도구로 사용하십니까?’ 어디서 많이 듣던 말 아닌가요?: “왜 동생 잘못한 것은 그냥 넘어가더니 나만 쥐 잡듯이 잡아먹으려 하시나요?”

바벨론을 들어 유다를 징계하신다는 것은 바벨론에게 모든 나라를 맡기는 행위가 되는데, 그렇다면 바벨론은 의로운가라는 절박함이 그 속에 들어있다(14-15). 과연 낚시하듯 약탈하는 바벨론이 옳으니이까(17). 왜 바벨론을 심판하지 않고 악한 그를 통해 유다를 징계하시는지 하박국은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항변이고 신음소리다: 왜 우리만 혼내시는가. 왜 예수 믿고, 세상 사람들 다 하는 거 하지 않고, 주를 위해 살겠다고 몸부림치는 거 안보이시는가. 하나님 섬기는 않는 저 집은 그리 행복하고 잘만 되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하나님, 왜 차별하십니까. 이러자고 애굽에서 꺼냈고, 이러자고 가나안에 집에 넣고, 이러자고 성전과 율법과 제사장과 선지자를 주셨습니까.

 

 

하프타임(2.1): 성루에 서리라.

 

불의하고 악하기 짝이 없는 바벨론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어쩔 줄 몰라하며 그야말로 승승장구다(15). 그들은 자신들에게 승리와 영광을 준 신에게 분향하며, 경제적으로도 번영과 호황을 누리며 잘 산다(16). 그러면 그럴수록 여러 나라를 무자비하게 멸망시키는”(17) 전쟁을 그칠 줄 모른다. 마침내 유다마저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 아닌가.

어쩌면 이런 상황을 되돌릴만한 아무런 힘이 없는 선지자 하박국의 절망에 찬 신음소리가 두 번에 걸친 질문에 들어있는 그의 절박함인지도 모른다. 마치 힘이나 도움이 되어주지 못한 부모 앞에서, 모든 게 부모 탓인 것처럼 거침없는 말들을 토해내는 자식 앞에 아무 말 하지 못하고 눈을 감고 먼 하늘을 쳐다보며 눈물 흘리는 부모의 모습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이게 어찌 부모 탓이며, 이게 어떻게 하나님 탓이란 말인가.

21절은 이렇다: “아버지, 뭐라 말씀 좀 해 보세요.” 그러니까 하나님, 이 상황을 어찌 이해해야 할 것인지 무엇이라 좀 얘기해 보세요. 이제 하나님이 답을 하실 차례다. 과연 어떤 말씀을 하실까. 말이 먼저 나올까, 주먹이 먼저 일까.

 

주께서 말씀하셔야 한다.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주의 성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생각과 뜻하심과 목적을 알고 듣고 깨닫고 배우고 본받기 위해 주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악하고 추해도 주께로 나가면 힘 주시고 내 추함을 곧 씻어 주시는 우리 하나님 앞으로 빈 손 들고 앞에가 십자가를 붙드는 결단과 믿음이 필요하다.

지금이다. 오늘이다. 하박국처럼 주께서 내게하실 너에게 하실이 아니다.- 말씀을 기다리자. 이 조용한 새벽에 오늘만큼은 주님이 내게 하시고 싶은 말씀을 듣기 위해 조용히 주님 곁에 서 보자. 내가 선 곳이 주님이 말씀해 주실 성루다. 우리 가정이, TV가 목자인 거실이 아닌 주님이 찬송되고 노래되는 거실이 성루다. 내가 조용히 나아가는 주님을 만나는 시간과 장소가 지금 내게 주어진 성루다. 오늘도 그 성루에서 주님을 뵈옵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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