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징계가 사랑인 이유(사 28.1-29)

20200816-17(묵상)

  

 

 

하나님의 징계가 사랑인 이유

Isa. 28.1-29

  

   본문 관찰

 

   [히스기야 통치 때]

   북왕국 이스라엘(1-6) - 술취한 자들

      경고(1-4): 교만한 면류관 쇠잔해 가는 꽃

      희망(5-6): 여호와께서 남은 자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

   남왕국 유다(7-29) - 포도주(독주)

      경고(7-22): 제사장과 선지자(7), 백성을 다스리는 오만한 자(14)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12)

         *진노하사(21)

         *그러므로 멸망시키기로 작정(22)

      희망(23-29) - 농부의 비유

   

 

첫 번째 경고

 

이스라엘이라고 심판으로부터 자유한 안전지대에 있는 것은 아니다.

주께서 이방을 심판하시는 것과는 달리 주께서 백성을 적당하게 견책(譴責)”(27.8)셨다는 것은 하나님 쪽에서 베푸신 사랑이다. 만일 이스라엘이 이를 오해한다면 그건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포도원지기가 되사 풍성함으로 인도하시며(27.2-6), 궁극적으로 저들을 회복시키실 지라도(27.12-13) 죄악에 대한 선() 경고/심판과 후() 회복/희망이라는 등식은 결코 포기되지 않는다(1-4 5-6, 7-22 23-29). 이사야 25-27장의 희망 코드는 이스라엘을 방심케 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1-4,7-22) 하나님이심을 깨우치시기 위함이다(5-6,23-29).

   

 

교만 + 쇠잔 = 에브라임(1-6)

 

북왕국 이스라엘은 쇠잔해 가는 꽃”(1b,4a)에 비유되고 있다. 한 때는 찬란하게 피었던 적이 있었다(1b). 그런데 곧 주께서 보낸 자에 의해 땅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2). 심판의 주도권은 하나님이고 앗수르는 하나님에 의해 도구로 쓰인 사람 막대기다(10.5). 결국 에브라임은 사람들의 발에 밟히게 된다(3). 도대체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교만’(1a,3a) 때문이다. 마치 술 취한 자처럼 자행자지(自行自止)한 결과 화 있을진저!’(1)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과거의 영화로움과 축복에 비하면 오늘의 몰골은 한없이 추하고 측은하다. 면류관을 썼다지만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 그것도 교만한 면류관’(1,3; 영화로운 면류관, 5)을 쓴 모습을 생각해 보면 마음이 아프다. 어쩜 우리의 모습일 수 있다 생각하니 더 그렇다. 하나님을 잃어버릴 때 자신을 보는 능력도 없어지는 것일까.

그러나 희망은 있다. 하나님이 친히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화관이 되실”(5) 것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하나님이 에브라임, ‘그 남은 백성의 중심에 직접 개입하신다. 하나님의 친정(親政)만이 에브라임의 살 길이다. 하나님만이 소망이라는 것, 에브라임 꼴 되기 전에 잊지 않고 살아야겠음을 다시 다짐해 본다.

   

 

전적부패(全的腐敗) = 유다(7-29)

 

유다는 한 술 더 뜬다. 당연히 금주(禁酒)하며 살아야 할 제사장과 선지자까지 비틀거린다(7a, 10.9). 이처럼 지도자들부터 율법을 스스로 어기며 사니, “환상을 잘못 풀며 재판할 때에 실수하”(7b)는 것이야 어찌 보면 당연하지 싶다. 이처럼 깨끗한 곳이란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다(8). 이들에게는 이사야의 메시지가 늘 그렇고 그렇다는(“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다.”), 똑같은 소리를 반복하는 것으로 들렸고, 그래서 말씀을 비웃는 빈정거림만이 가득하다(9-10).

소위 말씀을 조금 안다는 자들(술 취한 제사장과 선지자, 7-10)에게 참으로 놀라운 반전이 시작된다(10 13). 하나님에 의해서다(13). 결국 하나님의 진노는 다른 방언을 하는 자가 유다를 치려옴으로 성취된다(11,13): “곧 여호와께서 멀리 땅 끝에서 한 민족을 독수리가 날아오는 것 같이 너를 치러 오게 하시리니 이는 네가 그 언어를 알지 못하는 민족이요.”(28.49)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그 소리가 그 소리다- 거역한 자들이 맞게 될 결과다(12).

한 술 더 떠서 사망과 음부, 거짓과 허위에 각각 언약과 피난처를 삼아 넘치는 재앙이 밀려올지라도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리”(15)라고 거들먹거린다. 이렇듯 유다는 전적으로 부패해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저들의 허튼소리(9-10)를 동일하게 조롱하신다(13,15).

하나님은 시온에 기초석’(16, 8.14, 9.30-33)을 두셔서 공평과 의로 줄과 추를 삼았지만 유다는 거짓과 속임수를 선택함으로(17-18) 하나님의 진노 아래(21), 결국 온 땅을 멸망시키기로 작정”(22b)하기에 이르렀다. 사망과 음부 행()이 될 수 밖에 없음에도 그것들과 언약을 맺고,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부터 보호를 받으려 하고 있으니 재앙이 끊이지 않고 엄습할 것이야 불을 보듯 뻔한 일 아닌가(18-20).

그런데, 하나님을 씨뿌리는 농부로, 유다를 곡식 종자로 묘사하는 [농부의 비유](23-28)는 절묘하다. 하나님의 통치 원리는 결국 긍휼과 사랑이다. 그러니까 유다의 죄를 징계하신 것을 땅을 개간하며 고르고 평평히 한 밭갈이에 비유하신다(23-25a). 문제는 이처럼 밭갈이만을 위해 농부(하나님)의 수고가 있었겠느냐는, 그러니까 이처럼 밭갈이를 한 후에 결국은 소회향과 대회향, 소맥과 대맥, 그리고 귀리를 심는 것이 당연하듯 유다를 다시 풍성한 땅으로 회복하실 것을 예고하신다(25b).

밭갈이를 한 후에 파종한 것으로 끝인가. 아니다. 그 다음에는 추수가 있다. 이것 역시 부서지지 않게 탈곡하실 것이다(27-28). 하나님이 가꾸시고, 보호하시고, 추수하실 때에만이 살 길이 있다. 내가 자라 열매를 맺는 것 같아도 아니다. 마지막 탈곡을 할 때 낟알이 바스러지지 않도록 가볍게 두드려서 떨어야 한다. 이게 하나님의 마음이요 사랑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지혜만이 살 길이다(29).

이로써 그의 경영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29b)는 말씀이 비로소 그 의미를 드러낸다.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한 심판(진노, 징계)이 껍질이라면, 하나님(‘파종하려고 가는 자’, 24)이 그 못나고 죄 많은 저희(이스라엘과 유다)를 밭갈이하여 고르게 한 후에 씨앗들을 파종하여 마침내 열매(추수)를 거둘 것을 비유하고 있는 것이 농부의 비유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마음이기에 그렇다. 징계가 목적이 아니라 징계는 일종의 밭갈이이며 씨앗을 심기 위한 준비 작업인 셈이다. 따라서 그것은 마치 자녀를 위해 사랑의 회초리를 든 아비의 마음과 행동과도 같은 것이다. 이것이 징계 안에 들어있는 고난신학(苦難神學)이다.

   

 

부스러기 묵상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私生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12.7-8)

 

하나님은 쇠잔해 가는 꽃밭을 다시 밭갈이 하신다(1,4 23-25).

그리하여 그 날에’ “자기 백성의 남은 자곡식”(27-28)이 되게 하사, 결국 하나님 자신이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화관이 되실 것이”(5). 심판의 백성이 아닌 회복케 하신 당신의 참 아들들에게 말이다. 히브리서 기자의 징계론(懲戒論, 12.5-13)이 압권이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11)

이쯤해서 끝내셨어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11,18-22). 그런데 하나님은 누가복음 8장 말씀에 보면, “길가에 바위 위에 가시떨기 속에”(5-7,12-14) 떨어진, 그래서 결실할 수 없는 볼품 없는 씨앗으로 끝났을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사 결실치 못하게 만드는 모든 장애물들을 다 밭갈이 하셔서(23-25) 마침내 결실을 맺게 하신다(27-28).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오래 참으신 기다림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다.

결국 문제는 성도인 우리다. 그리스도인의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비록 죄의 값을 지불하는 징계일지라도 그 끝은 심판과 멸망이 아닌 것으로 마무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믿는 것, 이것이 심판의 우박 속에서도 하나님의 긍휼의 우산을 쓰고서 위기를 이겨낼 수 있는 길이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들추어 내시사 이스라엘에게처럼 처리하셨다면 오늘 아무도 육신을 입고 있지 못할 것이다.

 

   “황무지가 장미꽃 같이 피는 것을 볼 때에 .”(찬송가 2421)

 

하나님이 언제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영혼을 밭갈이 하셨고, 하나님의 나라의 거룩한 씨앗을 파종해 주셨기에 비록 휘청거릴지라도 오늘이라는 시간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어찌 부정할 수 있으랴. 세상의 헛된 욕망과 죄를 먹고 마심으로써 취하여 비틀거리는 모습이 어찌 이사야 시대의 제사장과 선지자들만의 모습이라고만 할 수 있겠는가. 때문에 우리를 보면 부끄럽고, 그러나 하나님을 보면 황송해서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다. 은혜여서다.

머리의 비듬처럼 자꾸만 생겨나는 가라지들을 어찌할까. 성령 안에 살아도 죄의 고통은 여전하다. 결국 우리의 알량한 의()가 자신을 지탱하게 만드는 버팀목이 아님을 살아갈수록 깨닫는다. 죄사함을 받았어도, 의롭게 되었어도, 구원을 받았어도, 우리 안에 주님이 계셔도 죄의 쓴뿌리가 너무도 강렬한 세력으로 우리를 짓누르고 있음을 어찌하랴. 그러니 늘 통곡할 수 밖에 없다.

그래도 결국 하나님은 마른 가지와 같은 성도에게서도 열매를 맺으시겠지만 거기까지 가는 길목에서 지불해야 할 대가는 또 얼마나 아프고 처참할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1-4,7-22). 빨리 정신 차리는 것이 신상에도 좋을 듯 싶다. 된통 혼나고서 돌이키는 것도 나쁠 건 없지만 이스라엘의 죄행록(罪行錄)을 보면서 이쯤해서 정신 바짝 차리는 것, 이게 치열한 영적 전쟁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법(生存法)이 아닐까. 다시 은혜 안 모금 마음에 물고 하늘 향해 믿음의 눈을 들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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