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스 프로젝트4(사 47.1-15)

20020523(묵상)

 

 

 

고레스 프로젝트(4)

Isa. 47.1-15

 

    본문 관찰

 

    심판주의보(1-7)

    네가 다시는 곱고 아리땁다 일컬음을 받지 못할 것임이라

    네 부끄러운 것이 보일 것이라

    네가 다시는 여러 왕국의 여주인이라 일컬음을 받지 못하리라

    내가 내 백성을 네 손에 넘겨 주었거늘

   

    자업자득(自業自得, 8-15)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도다

    한 날에 갑자기 일이 네게 임할 것이라

    주문과 많은 주술을 가지고 맞서 보라

    하늘을 별을 초하룻날에 예고하는 자들에게 너를 구원하게 하여 보라

    그들은 초개 같아서 불에 타리니

  

 

멸망 초읽기

 

바벨론은 처지가 역전된다.

심판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 백성’(6a)인 이스라엘, 저들을 심판하는 도구였던 바벨론이 오히려 이제는 심판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심판의 도구로 쓰였을지라도 심판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바벨론이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원인들, 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들이 하나씩 밝혀지면서 멸망으로 가는 길은 초읽기에 들어간다. 한편 강대국들의 몰락은 우리 시대에도 귀한 메시지를 전해 준다. 그게 뭘까?

   

 

심판주의보(1-7)

 

시온의 영광(46.13)과 바벨론의 멸망(1)이 대조적이다. 세상의 영광은 일시적이다. 동시에 하나님 백성(‘내 백성, 6a)의 고난 또한 한시적이다. 이제 바벨론은 곱고 아리땁다”(1b)는 소리를, 그리고 왕국의 여주인”(5b)이라 칭함을 다시는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보좌에 앉아 있던 처지에서 맷돌질을 하여야 하는 추하고 부끄러운 입장으로 추락하여 멸망의 길로 미끄러진다(2-3). 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다.

바벨론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들어 쓰신 이유와 목적을 잊지 않았어야 했다. 중요한 것은 바벨론이 잘나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문제가 있었다. ‘내 백성이지만 죄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은 저들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거늘”(6a), 그러니까 바벨론을 통해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것이다. 그러자 저들은 영영히나라의 영광과 존귀함이 있을 줄로 착각하고서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지 아니하며 그들의 종말도 생각하지 아니하였”(7).

이렇듯 바벨론은 형통해 보일 때, 즉 이스라엘을 벌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쓰일 때(6) 뭔가 착각하고 있었다. 이처럼 잘 될 때, 내가 뿌리고 흘린 땀에 비교할 수 없는 것이 주어질 때 그때가 더 위기의 순간이다. 허세(虛勢)를 부릴 겨를이 없다. 마치 말기 암() 환자가 마지막 순간에 잠깐 좋아지는 것처럼 보이다가 곧바로 숨을 거두듯이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멸하고 승승장구(乘勝長驅) 할 때가 그런 때였다. 찰나적인 성공이 부러울 수 없는 이유가 이런 것 때문 아닐까.

   

 

자업자득(自業自得, 8-15)

 

영적 무감각은 눈앞에 파멸이 임박해 있는데도 사치하고 평안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8a) 계속해서 이렇게 교만을 떤다: “나는 과부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8b) 하지만 이러한 허풍(虛風)홀연히’(갑자기; 9a,11b) 역전된다. 이때 무수한 주술과 많은 주문을 빌릴지라도”(9) 재앙은 반드시 닥치게 된다.

()에 물든 지혜와 지식이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만드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인다(10). 그러니 재앙이 와도 그 근본을 알지 못할 것이며 이를 물리칠 능력이 없을 것이며 알지 못”(11)하는 것이다. 주술과 주문(마술과 주술), 하늘을 살피는 자, 별을 보는 자, 월삭에 예고하는 자는 결코 바벨론을 구원할 수 없다(12-13). 결국 하나님이 아닌 것들을 의지하며 사는 자들은 불에 타고 말 것이다(14). 바벨론이 몰락하게 되는 것은 이처럼 우상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은 어리석음 때문이다.

   

 

부스러기 묵상

 

바벨론의 멸망은 갑자기’(홀연히; 9a,11b) 찾아왔다.

마치 종말론적 심판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이로써 부귀와 영광이 영영히영원하리라는 교만은 착각에 불과한 것이었음이 밝혀진 셈이다(7). 멸망한 이후에 이를 깨달아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와 비슷한 사람들이 생각난다. 노아의 방주 밖에서, 혼인잔치의 문 밖에서,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 가운데 부자처럼 지옥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간들 그렇다고 역전될 가능성은 전무(全無)하다.

바벨론이 자신의 몰락을 예측하지 못했듯이(6), 저들을 멸하는 도구인 고레스 역시 거기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섭리와 심판의 프로젝트(섭리)를 이해했을 것 같지가 않다. 이게 어려운 부분이고 답답한 대목이다. 하나님은 일하시고 계시는데 정작 그것의 집행 대상은 그것을 모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당하는 것이고, 당하면서도 헛소리를 하는 것이고, 그렇게 마무리되면서 조차 깨닫지 못하는 총체적 무지(無知)에 휘청거리는 것 아닐까.

한편 이스라엘은 죄 가운데 있을지라도, 그래서 그 값을 포로기를 통해 지불하고 있을지라도,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는다. 당대의 패권(覇權)을 주고받는 정상에 서 있는 바벨론과 고레스는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는데 가장 밑바닥을 전전하는 이스라엘은 이 소식을 듣는다. 하나님은 왜 이처럼 다른 기준을 가지고서 일하실까? 이 부분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끊임없이 되물어보게 만든다(45.9-10).

한 나라는 심판으로, 또 한 나라는 회복으로 역전되는 그림을 보면서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드는가를 더 생각하게 된다. 결과만을 보고서 아파하고, 아쉽게 생각하고, 좋아하기에는 이제는 좀 더 깊은 생각이 필요한 때도 되었다. 무엇보다 이와같은 결과를 낳는 원인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야 할 때다. 결과에 희비가 교차되는 것은 곧 자업자득(自業自得)을 낳을 수 밖에 없는 원인 때문이다.

나의 오늘은 어제의 열매다. 또한 오늘은 내일의 씨앗이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연속적이다. 물론 하나님은 나의 죄를 하나님의 의로 바꾸심으로서 하나님 편에서는 비연속적으로 역전시키시곤 하시지만 말이다. 그래서 어렵다. 하나님이 아니라 하시는 것을 심어도 당장은 아무런 문제가 노출되지 않을 수 있다. 이 부분이 언제나 넘어지는 곳이다.

바벨론의 몰락(6-7 8-15)이 무엇 때문인가를 읽어가면서 내 영혼을 들여다보게 된다. 몰락은 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하루 아침에 찾아온다. 그날에 후회하고 울어봤자 다 부질없는 일이다. 대표적인 게 노아의 방주 그 밖에 있는 그 시대 모든 사람들이다. 그처럼 초라하게 무너지기 전에 오늘은 다르게!’ 살아야 할 이유, 선명하게 다가온다. 나를 이스라엘처럼 다루어 주신다고 안심하고 있다가는 언제 다시 포로로 뒤집어질지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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