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야 vs 이스라엘(사 42.1-25)

20210716(묵상)

 

 

 

메시야 vs 이스라엘

Isa. 42.1-25

 

    본문 관찰

 

    메시야(1-17)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내가 새 일을 알리노라.”(1-9)

    “여호와께 새 노래로 찬송하라

      내가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리니”(10-17)

    이스라엘(18-25)

    “너희 못 듣는 자들아 들으라 너희 맹인들아 밝히 보라

      우리가 그에게 범죄하였도다

      그들이 그 길로 다니기를 원하지 아니하며 그의 교훈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깨닫지 못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도다.”

  

 

메시야의 오심, 그 분명한 이유들

 

    [종의 노래]

    첫째: 42.1-4

    둘째: 49.1-7

    셋째: 50.4-9

    넷째: 52.13-53.12

 

삼위일체 하나님이 운행하신다.

하나님은 내 백성을 위로하시며 구원하신다(40-41). 이를 위해 메시야를 보내사 마침내 온 열방으로 하여금 승리의 노래를 부르게 하실 것이다(42). 이 일에 성령님께서도 함께 하신다(42.1). 이를 위해 삼위 하나님의 일하심이 선포되고 있다(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이렇듯 [메시야 영광송]은 찬란하게 빛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오늘(18-25) 모으셔서 이처럼 찬가(1-13)를 부르실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이스라엘은 미래의 메시야와 어떤 관계일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처한 오늘의 실패를 진노와 심판이라는 미래로 응징하지 않으신다. 메시야가 오실 수 밖에 없는 이스라엘의 영적 형편이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다는 점, 그럼에도 메시야는 오시겠다는 점, 그만큼 하나님의 깊고도 높고도 넓으심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메시야 - 새 일, 새 노래(1-17)

 

나의 종은 누구인가. 그는 하나님이 붙들어 주는 사람, 택한 사람, 마음으로 기뻐하는 사람이다(1). 하나님은 바로 그 종에게 성령을 부어주심으로서 이 사명을 맡기신다: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1b) 그렇다면 그는 메시야로서 종이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마태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이를 예수님에 의해 성취되는 것으로 선언한다(1-4 12.17-21).

놀라운 것은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며(1b), 세상에 정의를 세우며(4b), 섬들이 그 교훈을 받기를 간절히 기다리는(4b) 이 일을 성취하기 위한 메시야로서의 자기 이해와 일하심이라는 방식이다. 먼저 자신의 언행(言行)을 드러내 놓지 않으실 것이다(2). 또한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등불 같은 이방’(섬들, 1,4)을 꺾지 않으며 끄지 않으시는 지고한 사랑으로 일하실 것이다.

또한 창조주 하나님께서(5) 당신의 의를 이루려고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6a), 마침내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6b, 2.32)실 것이다. 그는 이 영광스런 소명을 따라 영적인 소경들의 눈을 고쳐서 보게 하고,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에 갇힌 자들을 자유케 하는 구원을 성취하실 것이다(7).

이것이 새 일’(9)이다. 메시야를 통해서 이루실 영광을 당신의 이름을 걸고 선포하시는 분, 그가 하나님이시다(8). 그분은 결코 당신의 받으실 영광과 찬양을 다른 사람에게, 우상에게 양보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8). 이 모든 일을 오직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열심을 엿보게 된다.

땅과 바다와 만물이(10), 그리고 게달과 셀라와 같은 이방 사람들까지(11-12) 모두가 다 새노래를 부르며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가 분명해졌다. 그것은 구원자이신 여호와의 종으로서의 메시야의 오심 때문이다. 메시야이신 그리스도가 아직 오시지 않았으나 승리는 이미 약 700년 전에 선포되었다. ‘이미’(9) 이처럼 하나님이 일하실 것을 예고하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메시야 찬양시](10-13)와 상관없이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그 대적을 크게 치시리로다 황폐하게 하며 마르게 하며 물리침을 받아 크게 수치를 당하리라.”(13,15,17)는 말씀이 동시에 선언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그렇다면 메시야의 오심은 영광만이 아니라 동시에 심판이 집행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셈이다(13-17). 이는 예수님의 [양과 염소의 비유](25.31-46)를 기억하게 한다.

   

 

이스라엘 - 범 죄(18-25)

 

이스라엘의 처지는 안타깝기만 하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알리는 아름다운 멜로디를 이스라엘은 지금 듣지도, 보지도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불순종에 따른 범죄로 말미암아 영적 귀머거리와 소경이 되었기 때문이다(24b-25). 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자신들이 지금 얼마나 듣기 민망한 불협화음의 주인공인지조차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20).

더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여전히 하나님의 종이다는 사실이다(19a, 41.8). 메시야가 나의 종이듯이 말이다(1). 그런데 종으로서의 이스라엘은 지금 눈이 멀었고, 귀가 먹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자요, 주님과 언약을 맺은 자임에도 말이다(19). 왜 이처럼 되었는가에 대한 이사야의 진단과(20),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시고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은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21):

 

    “그는 많은 것을 보았으나, 마음에 새기지 않았다.

      귀가 열려 있었으나, 귀담아 듣지 않았다.

      주님은 백성을 구원하셔서, 의를 이루려고 힘쓰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하여 주께서는 율법과 교훈을 높이셨고,

      백성이 율법과 교훈을 존중하기를 바라셨다.”(20-21, 표준새번역)

 

하나님의 기대는 산산히 부서지고, 그 결과 이스라엘은 약탈과 노략을 당하며, 굴 속과 옥에 갇혀 있다(22a). 하지만 아무도 구해 주는 자 없고, 변호해 주는 자 없다(22b). 이것은 다 저들의 범죄 때문이다: “우리가 그에게 범죄하였도다 그들이 그의 길로 다니기를 원하지 아니하며 그의 교훈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24b) 이렇듯 율법을 순종하는 길을 버렸을 때 하나님도 저들을 그 범죄한 그대로 내버려두신 것이다(1.24a).

그러므로하나님이 범죄한 이스라엘로 하여금 죄의 값을 치르게 하신다(25a).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그것이 무슨 일인지 깨닫지 못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25b)였다. 비극은 하나님께서 맹렬한 진노와 전쟁의 위력”(25a)으로 이스라엘을 심판하실지라도 정작 저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채찍인지조차도 알지 못하는 영적 무지 상태에 빠져있다는 점이다.

   

 

부스러기 묵상

 

하나님의 종이신 메시야를 생각해 본다.

이 엄청난 하나님의 일을 하실 분(1-9), 또 하시는 분이시자 하신 분(복음서), 그래서 영광의 노래를 받으시는 분(10-13, 2.5-11), 그럼에도 그분은 요란하지도 화려하지도 시끄럽지도 않다(2-4). 참 많은 걸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비즈니스 방식과 시장 논리가 교회와 복음의 영역에까지 거침없이 밀려온 지금, 이해득실(利害得失)과 성공의 논리가 옳고 그름을 결정하는 지금, 예수님처럼 일하는 자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외면키 어려운 때다.

한편 이스라엘(‘’)은 왜 하나님의 진노라는 결과가 왔는지, 그것을 낳은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럴 생각도 없는 듯하다(20,25b). 이를 어찌하랴! 하나님이 택하신 내 종’(19a) 이스라엘이 이처럼 무너져 있을 때 하나님은 나의 종’(1) 메시야를 보내실 것을 선언하신다. 인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길고 긴 사랑의 이야기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귀머거리요 소경임을 아시면서도 들으라! 보라!”(18) 하신다. 이처럼 인생의 모든 죄와 허물을 품으시는 하나님, 그분은 도대체 누구시란 말인가. , 사랑이여! 죄 아래 깊이 빠져있음에도 그것을 알 턱이 없는 이스라엘에게서 나의 영적 무지를 본다. 그래도 하나님의 목표는 새 일 새 노래”(9-10)를 따라 사는 자리에 나를 세우고 싶어하신다.

하나님은 메시야를 통해서 이처럼 일하시겠다는데 나는 조그만 것이라도 내게 유리하도록 큰 것으로 포장하여 떠벌리며 사는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메시야도 잠잠히 일하시는데 말이다(2-4).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설명될 수 없는 인생임을 알면서도 조금만 살만하다 싶으면 하나님 앞에 명함(名銜)을 꺼내려고 기회를 보는 못남을 보곤한다.

내 백성’(5.13, 10.1,24, 40.1)이요, ‘나의 종’(19)이 영적인 불치병에 걸려 있으니 주인이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실까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 그래도 도리다 싶다. 주님은 당신의 종인 나에게도 -부끄럽고 송구하지만 그래도 나 또한 주님이 부르시는 나의 종이다.- “너 혹시 귀머거리로 가는 초기 증세가 있는 것 아니냐?” 말씀하신다. 또한 너나 네 가족들이 소경 되지 않게 하려는 무슨 계획이라도 있느냐?” 물으신다. 자극 증세도 못 느끼는 중증(重症, 25b)이 아님이 불행 중 다행이지만 주님의 기대하심과는 달리 너무나 멀리 와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런저런 생각으로 주님 앞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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