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의 하나님(사 40.1-31)

20210712-13(묵상)

 

 

 

위로의 하나님

Isa. 40.1-31

 

    본문 관찰

 

    내 백성을 위로하라(1-11)

       외치는 자의 소리여

       말하는 자의 소리여

       아름다운(기쁜)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하나님을 누구와 비기겠느냐(12-26)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라(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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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1a)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어떤 분이신가?

이것은 이사야가 끊임없이 묻고 답한 메시지의 핵심이다. 지금껏 심판하시는 하나님(1-39)에 대해서 들었던 무수한 말씀들은 마침내 구원과 소망으로 반전되기 시작한다(40-66). 하지만 히스기야에게서 보았듯이 그것은 인간의 노력과 힘으로 되는 게 아니다(36-38 39). 결국 북왕국이 그랬듯이(BC 722) 유다 역시 멸망하게 될 것이다(BC 586). 과연 유다에게 미래는 있는가? 있다면 그 미래는 무슨 색깔인가? 그리고 하나님은 유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분이신가?

   

 

다시 희망 속으로(1-11)

 

    “내 백성을 위로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고

      그는 목자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안으시며 인도하시리로다.”

 

심판은 하나님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인간을 향하던 심판은 39장으로 문 닫게 하신다. 그리고 마침내 내 백성을 위로하라!”(1)하시며 구원의 문을 40장에서 활짝 여신다. 이것이 이사야서에서 40장이 갖는 위치다. 심판의 때가 있었다면 이제는 위로의 때가 가까이 온 것이다. 그것도 여전히 내 백성’(5.13, 10.2,24, 32.13,18)에게다. 이젠 더 이상 이 백성’(6.9, 8.6)이 아니다.

한편 영적으로 어둡고 캄캄한 터널을 빠져나오게 되는 용서는 죄 값을 치르는 것 없이 무작정 되는 것이 아니다(2).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가 있기까지 이스라엘은 죄에 대한 형벌에 해당하는 복역(服役) 기간이 끝나야 했다(1-39). 이렇듯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하나님의 공의에 기초한다. 때문에 갈보리의 십자가 없이 부활의 아침은 없다(No Cross, No Crown!). 그런 의미에서 고난은 영광의 씨앗이다. 하나님 안에서 말이다. 마침내 2절은 69절 이하(특히 10)를 넘어선다. 이렇듯 40장을 기준으로 심판에서 소망으로 반전은 자연스럽다.

하나님은 드디어 외치는 자(3-5, 3.4-6), 말하는 자(6-8, 벧전1.23-25),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9-11, 10.15)를 통해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소망을 드러내도록 하신다. 세례 요한으로부터 외쳐지기 시작한 복음은 영원한 말씀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마침내 전도자를 통해 온 인류에게 전파되었다. 정죄함을 넘어선 위로의 복음이 전해지는 새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이사야는 보고 있고, 그래서 이를 증거하지 않을 수 없는 선지자 이사야를 만나게 된다.

기쁜 소식을 알리는 전령들의 움직임이 부산해진다. 이들이 예비하는 것이란 하나님이 이루신 일들을 증거하고 보는 일이다. 그러니까 새시대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 나타나고(5), 또한 시들지 않는 말씀으로 영영히 설 것이고(8), 임하시사 친히 다스리시는(10), 바로 그 하나님으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실 것이다(9).

마침내 하나님은 이미 명령하여 이제 닦아 놓은 여호와의 길’(하나님의 대로, 3)로 임하신다(10a; 3-5 9-11). 이는 2절의 결과다: “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렇게 해서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5)는 바로 그 왕권을 친히 행사하시며 이제 다스리실 것이”(10b).

이 모습은 마치 시편 23편을 옮겨 놓은 듯하다(11): “그는 목자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안으시며 인도하시리로다.” 이처럼 끝나야 할 것이 끝났고’(2) 죄가 해결되면 이렇게 좋은 것을 죄 아래 있을 때는 미처 몰랐다. 그만큼 영원히’(8) 있어야 할 것이,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친히 오셔서 다스리고 계셔야(9-10), 그래야만 만물이 본래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것 같다.

6장에서 유다의 멸망이 결정되었다면, 다시 40장에서 유다의 구원이라는 새로운 시작이 선포되고 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에 의해서다. 그런 의미에서 40장 이후는 새로운 이사야서(2 이사야서)라기 보다는 앞에서 다룬 내용과 평행을 이루면서 탄탄하게 이루어진 이어지는 말씀이다.

   

 

희망의 신학(12-31)

   하나님의 위대하심(12-26)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라!(27-31)

 

하나님만이 이 일을 이루실 수 있음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사야는 곧바로 하나님을 찬양한다(12-26). 그럼 하나님은 누구시길래 이처럼 놀라운 영광의 세계를 펼치시는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능력이 있으신 분이신가?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이야말로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원천이다. 이제 상처 나고 일그러진 자리에서 인간 마음대로 조립했던, 죄 아래 있을 때 그릇 생각했던, 성경 말씀의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어리석은 신지식(神知識)을 버릴 때가 되었다.

한편 왜 갑자기 이사야서가 창조 이야기 위에 놓이게 되는가라는 의문이 든다. 하지만 바벨론에 의해 나라를 잃고, 이는 다윗언약의 파기를 의미하는데, 이쯤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깊어만 가고 있었다.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불신, 바로 이때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구원하실 하나님(1-11), 그분은 누구인가에 대한 회상은 절묘할 뿐만 아니라 시의적절하다.

하나님은 홀로 온 우주만물(宇宙萬物)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때문에 전지(全知, 12-14)하시다. 이에 비해 열방은 한 방울 물 티끌 먼지”(15)에 불과하다. 무한하신 하나님과 그분이 만드는 유한한 만물은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비교할 그런 사이가 아니다. 피조물은 창조주 안에서만 그 의미가 있다: “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 것도 아니라.”(17a) 하지만 얼마나 많은 것들이 하나님과 같이 되어”(3.5) 보려고 발버둥 치는지 모른다. 이게 죄()와 그에 따른 심판이다.

이렇듯 어리석은 인간은 헛된 우상과 유일하신 하나님을 착각한다(18-20).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해야 할 인간이 하나 같이 다들 우상을 만들고 있다. 궁핍한 자도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고 있으니 이게 다 뭐하는 짓들인지 한심할 뿐이다. 그래서 이사야는 다시 한 번 이 모든 인간의 허물과 죄를 다 씻으실 하나님, 그분이 누구신가를 외친다(21-26):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교하여 나를 그와 동등하게 하겠느냐.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25-26a)

이제 이스라엘이 위로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가 드러났다. 그 길이 예비되고 있고(3), 그리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5),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임재를(9), 그것도 영원히 보게 될 것이다(8). 그것은 하나님 때문이다(12-26). 하나님만이 희망이다. 하나님만이 죄로 심판 받아 영원히 죽을 인간을 구원하사 마침내 영원한 안식으로 위로하실 분이시다. 하나님 외에 다른 이름은 없다(4.12). 바로 이 하나님이 [이사야행전]을 새 하늘과 새 땅까지 인도하실 것이다(66.22).

   

 

부스러기 묵상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났다 하느냐.”(27)

 

이사야는 다시 청중과 눈을 맞춘다.

이스라엘은 지금 어찌하여’(27)라는 깊은 절망의 늪에 빠져있다. 이건 분명 불만과 불평의 소리다. 죄는 이스라엘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일에 실패하게 하였고, 그러자 하나님께 원인을 돌리면서 엉뚱한 투정을 부리게 만든다.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12-26)이 자기 백성을 위로하시며(1), 영원한 말씀으로 이스라엘치기목자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안으시며 인도하”(11)실 준비를 시작하셨음에도 말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절망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을 찾아오셨다. 그리고 저들을 설득하신다. 이스라엘은 지금 마치 집 안의 탕자인 큰아들이 아버지를 오해하고서 시큰둥하고 있는 모습과 흡사하다(15.25-32). 하나님을 오해한 것은 이스라엘인데, 놀랍게도 영원하신 하나님 편에서 그 맺힌 매듭을 풀어 가시겠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피곤하여 지치고, 맥없이 비틀거리고 있음을 아신다(28-30). 하나님의 진단은 정확하다. 감동스러운 것은 마침내 하나님의 처방전이 공표되고 있음이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31a) 오직 주를 소망으로 삼는 사람만이 희망이 있다. 하나님은 불신앙의 모든 영육(靈肉)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이스라엘은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삶의 태도를 새롭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의 귀를 열고 반응해야 한다. 하나님의 목표는 온 세상에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시온과 예루살렘으로 저들이 다시 회복되는 것이다(9). 얼토당토 않은 영적 무지를 앞세워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는 이스라엘에게서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린다.

지금은 이처럼 밴댕이 소갈머리로 하나님을 맞을 때가 아니다. 잘 난 것 하나 없이, 오직 죄만 있는 이스라엘(‘’)임에도 하나님이 다시 찾아오셨다면 이젠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대로’(여호와의 길, 3)를 수축하며 주의 오심이 얼마나 큰 영광임을 외쳐야 할 때다. 놀랍지 않은가. 주님이 못나디 못난 우리에 대해 가지고 계신 계획과 기대하심이 이 정도란 말인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 힘을 얻으리니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31) 하신다. 그래 정말이지 하나님이 주시는 새 힘이 필요하다. 우리가 만들어 낸 알량한 힘으로는 나를 유지하기도 벅차다. 그러니까 나 한 사람 지탱하며 살기도 버겁고 힘들다. 그러니 이제 내 백성을 위로하라!”(1) 명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며 살아야 할 때다.

하나님 아버지는 이스라엘처럼 지쳐있는 우리를 찾아오셨다. 감사하다. 어찌 생각해 보면 뭘 했기에 지쳤다 싶은지, 그래 지칠 것도 없는 것 아닌가 싶고, 지쳤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치스러운 겉멋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이걸 더 오래하고 습관처럼 반복하면 그래, 너 그럼 내게 좀 올라오너라!” 하실지도 모른다. 그러면 큰 일 아닌가. 천국 가기 싫은 건 아니다. 갈 때 가더라도 지금처럼의 모습으론 아니다. 이런저런 이사야 멜로디들을 소망과 위로의 기억 상자에 담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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