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굽인가, 하나님인가?(사 30.1-31.9)

20200820-22(묵상)

  

 

 

애굽인가, 하나님인가?

Isa. 30.1-31.9

  

   본문 관찰

 

   이스라엘: 애굽 바이러스(30.1-11,15b-17a, 31.1-3)

   하나님: 은혜 백신(30.12-15a,17b-33, 31.4-9)

 

   구조2: [하나님의 가족]

   A 이스라엘(1-11)_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를 우리 앞에서 떠나시게 하라!”(11b)

      패역한 자식들(1)

      거짓말하는 자식들(9a)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들(9b)

      B 하나님(12-15a)_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15b)

   A' 이스라엘(15b-17a)_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고”(15b)

      B' 하나님(17b- )_ ‘그러나’(18a): 탕자의 복(, 23-26)

         기다리시나니 일어나시리니(18)

         은혜를 베푸시되 응답하시리라(19)

         싸매시며 고치시는 날에는(26)

 

 

애굽 망상곡(妄想曲)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패역(반역)한 자식들’(30.1a)이라 칭하신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처럼 부르실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영적 간음이라는 금지 명령을 적극적으로 어긴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로 하여금 애굽과의 연애를 -()과의 동침- 금하셨다. 이는 분명 금지된 장난이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은 그토록 애굽을 동경(짝사랑)하는가.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시는데 말이다. 하나님과 함께 꼭 애굽이 필요한가. 하나님은 지금 두 사이에 서서 어물거릴지도 모를 나를 겨냥하고서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애굽 바이러스(1-11,15b-17a, 31.1-3)

 

   “바로의 세력 안에서 스스로 강하려 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하려 하여 애굽으로 내려갔으되

    돕지도 못하며 유익하게 못하고

    수치(羞恥)가 되게 하며 수욕(羞褥)이 되게 할 뿐임이니라

    애굽의 도움이 헛되고 무익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애굽을 가만히 앉은 라합이라 일컬었느니라.”(30.1-7)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31.1a)

      →

          “그가 이 나라를 무너뜨리시되 아낌이 없이 부수시리니

           우리가 말 타고 도망하리라.”(30.14-16a)

         “여호와께서도 재앙을 치시며

           애굽은 도움을 받은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31.2-3)

 

하나님은 화 있을진저라는 말을 듣는 자로 전락한 이스라엘과 당신의 관계를 가정(家庭)에 비유하신다(30.1-2). 이스라엘이 자식이기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패역한 자식들이다. 그 이유는 애굽과의 동맹 계획을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자식)은 하나님(아버지)께 물어 보지도 않고 애굽의 보호를 받아 그 그늘에 숨으려 하고 있다.

마땅히 애굽이 아닌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고, 아버지와 의논하고, 또 아버지의 지도와 가르침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핫바지취급해 버렸다. 이건 죄에 죄를 더하는 것일 뿐이다. 하나님은 지금 자녀들로부터 모독을 받고 계신다. 이것이 결국은 수치와 치욕이 되어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이다(30.3-4).

아버지는 천덕꾸러기 취급해 놓고선 고관들과 사신들이 선물을 바리바리 싣고 애굽으로 가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할 백성에게 선물이라니(30.6b), 이런 헛된 망상에 젖어있는 못난 자식들 때문에 아버지는 피눈물을 흘리고 계신다(30.7). 이런 부자(父子) 사이에 무슨 희망이 있을까. 일이 이 정도에 이르렀으니 아버지의 진노는 불을 보듯 뻔하다(하지만 놀랍게도 이스라엘이 아닌 애굽에게 다). 여기서 라합’(7, 89.10)은 하나님에 의해 이미 실패하여 없어진 존재다. 이런 라합처럼 도움을 줄 수 없는 애굽을 유다가 의지하고 있다는 하나의 풍자(비유)인데, 중요한 것은 라합이 그랬듯이 애굽 역시 하나님에 의해 그렇게 될 것이다(31.1-3).

하나님은 반역하는 백성이요, 거짓말하는 자식이요, 율법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는 이 파렴치한 자식들의 죄를 결코 잊지 않으실 모양이다(30.8-9). 이러다가는 자녀들의 대()에서 멸문(滅門)하는 가문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아닌 게 아니라 이게 걱정이다. 이미 저들의 언행은 위험수위를 넘었다.

 

   “환상을 보이지 말아라 옳은 것을 보이지 말아라

    부드러운 것을 보여라. 거짓된 것을 보여라

    정도를 버려라. 바른 길에서 벗어나거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의 이야기를 우리 앞에서 그쳐라.”(30.10-11, 표준새번역)

 

어찌 이럴 수가 있을까. 부자(父子) 사이가 아닌가. 하나님은 업신여기고, 애굽을 더 믿고 의뢰하고 있으니 이 죄악때문에 결국 이스라엘은 경각간에 홀연히 무너질 것이다(30.12-13). 마치 토기장이가 그릇을 깨뜨림 같이 아낌이 없이 부수”(30.14a)실 것이다. 하나님이 심판하심에도 불구하고 말을 타고 도망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30.16), 이런 인간적인 돌파구를 의지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한 이스라엘의 희망은 없다.

문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만났을 때에도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의 채찍을 받아들일 마음이 아니라는데 있다. 이 모든 죄를 3015절로 해결해야 함에도 이를 원치 아니하고 하나님과의 거리를 점점 더 멀어지게 만드는 도망을 간다. 적군 다섯 명에 이스라엘 모두가 도망을 갈 것이라는 풍자가 웃을 수만은 없는 이유는 뭘까(30.17a).

  

 

하나님: 은혜 백신(30.12-15a,17b-33, 31.4-9)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그가 네 부르짖는 소리로 말미암아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여호와께서 싸매시며 고치시는 날에는 빛과 같으리라.”(30.15,19,21,26)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는 심히 거역하던 자에게로 돌아오라.”(31.6)

 

이스라엘은 이 모든 불신으로부터 돌이켜’, 즉 회개하고 하나님만을 신뢰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다(30.15). 하지만 저들은 그렇게 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모두가 다 하나님을 떠나고(30.16-17a), 소수의 남은 자만이 깃발처럼 외롭게 펄럭일 것이다(30.17b, 1.8-9 참조). 배은망덕(背恩忘德)도 유분수지 이럴 순 없다. 결국 이스라엘은 1장의 모습이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1.9)

하나님은 사약(死藥)이 아니라 은혜와 긍휼이라는 복을 준비해 놓으시고 이스라엘이 다시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30.18). 죄를 인정하고 다시 하나님 아버지의 용서와 자비의 품을 회복하기 위해 부르짖는다면 은혜로 응답하시기 위해 일어나실 것이다(30.19). 하나님은 친히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30.21) 일러주시며, 이때 이스라엘(‘자녀’)은 모든 우상을 던지면서 나가라!”(‘눈 앞에서 없어져라!’) 소리치며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할 것이다(30.22). , 얼마나 기다리던 부자(父子) 사이의 언행인가.

진정한 풍요와 축복은 회개하고 돌아온 자녀들의 몫이다(30.23-25). 이것이 어둠이 아닌 빛 가운데 사는 삶이다. 언제인가? “주께서 백성의 상처를 싸매어 주시고, 매 맞아 생긴 그들의 상처를 고치시는 날에”(30.26a, 표준새번역). 이것이 패역한 아들 이스라엘에 감염된 [애굽 바이러스](30.1-11,15b-17a, 31.1-3)를 퇴치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백신](30.12-15a,17b-33, 31.4-9)이다.

그렇다. 유다의 보호자는 애굽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31.4-5). 그러므로 유다는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31.6-7).

   

 

부스러기 묵상

 

탕자의 아버지는 못난 아들의 상처를 싸매시며 고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이 철없고 속없는 나에게도 아버지이심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언제나 이 사랑과 은혜 때문에 탕자(‘’)의 귀향은 시작되고, 또한 계속되는 것 아닌가. 그래도 아들이라고 기다리시니”, 그리고 뻔뻔스러운 아들이라도 만나주시려고 일어나시니”(30.18a), 그리하여 상처를 싸매시며”, 또한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30.26a) 아버지 때문에 아들의 새생활이 가능한 것이다. , 그분이 바로 내 아버지이심이 얼마나 다행이고, 복인가.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왕상18.21)

 

바알의 거짓 선지자 450명과 벌일 [갈멜대첩](왕상18.7-40)을 앞두고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던진 엘리야의 절규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세상에 한 발을, 그리고 하나님께도 다른 한 발을 적당히 올려놓고서 줄타기를 시도하는 어리석음을 이제는 버릴 때도 되었다. 이것은 세상과 담을 쌓고 살라는 말은 아니다. 애굽이라는 단순한 지리적인 장소를 출입하지 말라는 명령이 아니기 때문이다(19.23-25).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없는 애굽처럼(애굽) 되어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는 말처럼 이스라엘이 닮아야 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이 일의 근본이 흔들리고 있으니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 이제는 다르게, 그리고 바르게 살 때다. 나의 가는 길이 미덥지 않아 언제까지나 가슴 조리시도록 허송하고 있을 순 없다. 애굽을 경고하시는 말씀을 마음에 물고 하나님의 마음을 한번 처다 본다.

하나님께 나는 어떤 아들일까. ‘패역한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자식으로 불러주시는 것을 혹 오해하고서 깊은 영적 잠을 자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게 살아도 아들이다는, 여전히 아들로 불러 주신다는 것을 뻔뻔스럽게도 아무 부끄러움 없이, 그래서 형편없이 일그러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상인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다면 이건 큰 일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도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피눈물 떨어지기 전에 지금은 먼저 내 영적 기초를 다시 손질해야 할 때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을 멈추고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새롭게 놓아야겠다 싶다. 애굽처럼 살았어도 은혜로 이스라엘(‘’)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30-31장에서 만난 후 이를 이리저리 생각해 보는 하루다. 애굽은 심판이라는 바이러스(virus)를 몰고 왔지만 하나님은 은혜라는 백신(vaccine)으로 이스라엘(‘’)을 치료하신다. 이처럼 하나님은 참 멋진 아버지시다. 할렐루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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