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하여’에도 하나님입니다![1](시 42.1-11)

20201229(묵상)

  

 

 

어찌하여에도 하나님입니다!(1)

Ps. 42.1-11

  

    본문 관찰

  

    목마른 사슴처럼 하나님을 찾다(1-5).

       A 고라 자손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X1 사람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A1 고라 자손 낙심 불안 소망 찬송

    절망의 끝에서 하나님을 찾다(6-11).

       A’ 고라 자손 낙심이 되므로 주를 기억하나이다.

          X2 대적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A2 고라 자손 낙심 불안 소망 찬송

   

 

어찌하여 어찌하여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 때다.

세상 사람(대적)들은 시도 때도 없이 이래도 저래도 늘 언제나 한결같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비웃음과 조롱으로 소리친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어찌하랴! 고라 자손은 이 절망의 시그널과 하나님 사이에서 요동친다. 한 입으로 다른 두 말을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저들이 토해내는 하나님을 향한 멜로디의 진정성은 의심된다.

때문에 이들의 탄식에 가까운 낙심의 멜로디는 불신앙과 하나님을 향한 분노의 외침이라 할 수 없다. 누구나 절대절망과 한계상황에 다다를 때에 터져 나오는 신음소리요 그렇게라도 소리치며 자신들의 형편을 토로할 수 밖에 없음이라는 절박한 구조 사인, 즉 하나님에 올려드리는 SOS인 셈이다. 이를 위해 시인은 사슴, 그것도 목이 말라 곧 죽을 수도 있는 절박한 사슴의 모습으로 자신의 실존을 토해낸다.

 

 

목마른 사슴처럼 하나님을 찾다(1-5).

 

하나님을 갈망하고, 그분을 향해 갈급한 영혼은 어떤 것일까. 목이 갈한 사슴이 신기루가 물인줄 알고 비틀거리며 찾아 나서지만 결국 가도가도 물을 만나지 못해 쓰러지고야 마는 모습에 자신의 영적 목마름과 갈급함을 담아낸다(1).

하지만 이런 모습은 본 사람들’(3) 대적’(10)은 다르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3) 고라 자손의 영적 고독과 처절함은 극에 달한다. 하나님은 응답이 없고, 원수들은 조롱하고, 그 사이에서 자신은 점점 생기를 잃어가는 중이다. 이에 낙심 불안’(5a)이라는 불청객이 어김없이 찾아와 무너지게 만든다.

사실 대부분은 이 한계상황에서 무너지고야 만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4)며 살았었다. 그래서 지금의 바닥이 더 시리고 아픈 것이다. 그러니 어제와 너무나 다른 오늘의 모습을 보며 원수 대적들이 조롱하고 비난하는 것은 어쩌면 충분히 예상하고도 남을 일이다.

그럼에도 더 이상 차고 올라갈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막장에서 그는 하나님을 붙든다. 긍휼과 사랑으로 다시 일어나 예전처럼 주를 찬양하고 예배하는 자로 서기를 갈망하면서 다시금 희망의 노래를 토해낸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5,11)

   

 

절망의 끝에서 하나님을 찾다(6-11).

 

고라 자손이 참 대단한 것은 자신의 문제도 알고, 그것의 해답도 알고 있다는 점이다. 시인은 이런 형편 때문에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6a)었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그는 이 문제를 어찌보면 참 가볍게 해결한다. 다름 아닌 예루살렘의 여러 변방을 전전할 때에 그때 주께 부르짖었을 때 자신을 만나주신 하나님에 대한 경험(간증)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난의 언덕길을 통과할 때도 하나님이 지키시고 인도하셨다면, 그렇다면 삶의 파도가 시인을 휩쓸어갈 만큼 강렬하다하더라도(7), 그럼에도 주야로 날마다 주를 찬송하며 이기고 싶다는 소망을 기도로 올려드린다(8).

그러나 이 고백이 어찌 쉽게 나온 것일 수 있겠는가. 그의 솔직한 간증이다: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9) 안으로 뿐 아니라 밖으로부터 밀고 들어오는 대적의 비방이 여전히 후렴구처럼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오고 있어서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10)

또 다시 흔들리며 고통스러워하는 시인의 낙심 불안’(11a)에 찬 신음소리가 하나님의 보좌를 향해 기도의 향이 되어 올라간다: ‘하나님, 그럼에도 무너지지 않겠나이다. 하나님, 다시 일어나 하나님을 따라가는 순례자의 길을 포기하지 않겠나이다.’ 이 멈출 수 없는 하나님을 향한 고백이 이처럼 기도로 토해진다: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11b) 이 신음소리와도 같고, 절규와도 같은 기도를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으실 수 있겠는가. 삶의 처절한 막장에서도 하나님을 향해 기도의 무릎을 꿇는 시인의 모습이 오늘 하나님이 전해 주시는 메시지요 선물이다.

   

 

부스러기 묵상

 

    땅끝에서

    주께서 주신 동산에 땀 흘리며 씨를 뿌리며

    내 모든 삶을 드리리 날 사랑하시는 주님께

    비 앞을 앞을 가리고 내 육체는 쇠잔 해져도 

    내 모든 삶을 드리네 내 사모하는 주님께

    땅끝에서 주님 맞으리 주께 드릴 열매 가득 안고

    땅끝에서 주님을 뵈오리 주께 드릴 노래 가득 안고

    땅의 모든 끝 찬양하라 주님 오실 길 예비하라

    땅의 모든 끝에서 주님을 찬양하라

    영광의 주님 곧 오시리라

 

하나님 안에 있어도 영혼의 목마름에는 끝이 없다.

아니 더 처절하고, 아프고, 시리고, 눈물 난다. 이게 신앙의 길이고, 제자의 길이고, 구도자의 길이고, 주님을 따르는 성도의 길이란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낙심과 불안이 한 모퉁이를 점령해 들어와서다. 물론 다른 한 쪽은 소망과 도우심에 따른 찬송이 있기에 이 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지만 그럼에도 현실은 이처럼 고달프고, 고통스럽고, 고난으로 가득 찬 십자가의 길이어서다.

한 때 고라 자손이 고백하며 살았던 어떤 전성기’(4,8)는 지금 그가 걸어가는 십자가의 길과는 달랐었다. 어쩌면 그래서 더 아픈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다 주시지는 않으시는 분이실까. 그럴지도 모른다. 이미 그는 하나님의 깊은 곳을 통달했기에 고난과 시련의 집체만한 거대한 파도가 밀려와도, 혹여 그래서 깨어지고 상처 난, 그래서 조금 남아있는 것조차 다 쓸고 가 버릴 것만 같은 고난 앞에서도 눈썹 하나 흔들리지 않은 모습으로 하나님과 고난 앞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이 불굴의 믿음과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그 누가 막아서고 무너뜨릴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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