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대와 시기, 해 아래의 그림이다(전 4.1-6).

  20221204(Eccl. 4.1-6)

  

 

 

학대와 시기, 해 아래의 그림이다.

  

 

    본문 관찰

 

    학대받는 자에게 위로자가 없도다(1-3).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4-6).

 

 

해 아래서의 파노라마

 

해 아래서’(1.2-2.23)의 후속편이 316절부터 이어지고 있다.

4장에서는 삶이 곧 헛됨의 또 다른 초상이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위로자도 없고, 안식도 없다. 인생은 학대(억압)와 이웃의 시기를 통해 수고로울 뿐이다.

 

 

학대받는 자에게 위로자가 없도다(1-3).

 

    “나는 또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억압을 보았다.

      억눌리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려도, 그들을 위로하는 사람이 없다.

      억누르는 사람들은 폭력을 휘두르는데,

      억눌리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사람이 없다.”(1, 표준새번역)

 

학대를 받아 눈물을 흘리고 있고, 그러나 그것을 벗어날 방법도, 도와줄 위로자도 없다. 이게 해 아래의 현실이다.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가. 눈물을 흘려도 위로해 줄 사람이 없으니 말이다. 참 불행한 인생이 아닌가. 세상은 온통 탈법과 불법과 악법이 난무할 뿐이다. 사람이 사람을 억누르고 억압과 폭력을 휘둘러도 모두가 다 모른 척하고 산다. 위로가 있어야 할 자리에 무관심과 극도의 이기주의가 득세한다. 이게 해 아래의 세상이다.

학대(억압)와 권세(폭력)를 행사하는 사람이 있고, 이들 때문에 눈물을 흘리거나 힘에 억눌려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이 둘을 연결하는 위로자는 없다. 서로 분리되어 각기 자기 길을 따라 살아간다. 해 아래의 비극이 아닌가. ‘살아 있는 산 자’(2a)이지만 죽은 자나 태어나지 않은 자보다 못한 자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의 사람들, 이들이 바로 해 아래서헛된 수고를 하는 자들이다(1.2-2.23).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4-6).

 

    “온갖 노력과 성취는

      바로 사람끼리 갖는 경쟁심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나는 깨달았다.

      그러나 그 수고도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어리석은 사람은 팔짱을 끼고 앉아서, 제 몸만 축낸다.’고 하지만,

      적게 가지고 편안한 것이,

      많이 가지려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낫다.”(표준새번역)

 

해 아래서이루어진 성취라는 것이 알고 보면 추하다. 경쟁자를 교묘한 방법으로 따돌리고 쟁취해 낸 불의한 탈취물이기 때문이다(4). 이 세상에 소위 성공이라는 신화 속에 깊숙이 포장된 것이 바로 이런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부산물이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무위도식(無爲徒食, 5)하는 것 역시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더 많이 가지려고, 더 높아지려고, 더 성공하려고, 더 위대해지고 싶어서, 더 이름을 내고 싶어서 욕심을 부리는 것이 안식을 빼앗아 가는 것이다.

정말 사람들은 무섭도록 일한다. 휴식이라는 걸 모르고 산다. 더 많이 소유해야 행복한 줄 알고, 자족(만족)함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비교 의식 때문에, 상대적인 열등(박탈)감을 만회해 보려고, 그러니까 인생이라는 수레바퀴를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그럴듯하게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만큼 끊임없이 일한다. 행복은 해 아래의 소유에 비례한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그것도 이웃과의 관계가 깨어지면서까지 헛된 수고를 한다. 오직 자기 자신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얻은 게 뭐 대단할까 싶다. 지혜가 없으니(1.11-17)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6a) 무엇인지 알 턱이 없다. 그것만큼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6b) 그것으로 끝나고 만다.

 

 

부스러기 묵상

 

해 아래의 허무함이 하나 둘 그 실체를 드러낸다.

4장으로 넘어와도 인생의 희망과 즐거움은 저 멀리 아득하기만 하다. 학대와 권세(폭력) 때문에 눈에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고, 뭘 많이 얻어도 삶은 공허하고 무의미할 뿐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그 기뻐하는 자”(2.26)에게 주시는 것으로부터 사람의 본분’(12.13)을 다하며 사는 자가 아닌 헛된 인생(1.2-2.23)의 초상이다. 그러므로 땅의 소산을 위해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헛되고 헛된 경쟁심이라는 수고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인생의 해답은 거기에 있지 않다.

해 아래 인생은 여전히 두 길의 교차로에 서 있다. 1.2-23절의 길과 2.24-3.15절의 두 길이다. 하나님은 헛된 수고를 위해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탕자처럼 쓴맛을 본 이후에 돌이키는 허비된 인생을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전도자를 통해 말씀하신다. 나는 지금 어느 교차로를 향해 인생의 핸들을 붙들고 있는가. 인생은 후진기어가 없으며, 잘못된 것들을 지우개로 지울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혹시 후회한 들 그것 그대로 남는 것이기에, 이 소중한 기회의 때들을 허랑방탕(虛浪放蕩)함으로 소일할 수 없지 않은가. 눈물만 흘리고, 위로자만을 기다리고 있을 순 없다. 또한 이것을 해소하기 위해 무한경쟁의 수고만으로 인생을 역전시키려고 해 보아야 다 부질없는 헛수고에 불과하다.

내 인생도 언젠가 이처럼 부도가 나는 것은 아닐까. 전도서의 탄식처럼 눈물로 인생의 허무함을 아파하는 것으로 밖에 나를 설명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많은 수고를 했지만 내 인생의 보고서가 이처럼 헛된 것만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은 아닐까

나의 희망이 전도서의 사람들처럼 꺾이는 그 날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의 본분 앞에 무릎을 꿇는다. 교차로를 바꿀 수는 없다. 나를 바꾸어야 한다. 갈 길은 아직 저 멀리에 있는데 이미 너무 많은 행로(行路)를 우회하였고, 방황했다. 전도서를 통해 나를 중간 점검하면서 내 수고 너머에 계신 하나님의 희망을 바라본다. 하나님은 나를 인내해주시겠지만 시간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것만큼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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