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만이 희망이다(시 26.1-12).

  20201016(묵상)

  

 

 

하나님만이 희망이다.

Ps. 26.1-12

  

   본문 관찰

 

   A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1-3)

      B 행악자(4-5)

         X 내가 무죄하므로(6-8)

      B’ 죄인(9-10)

   A’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11-12)

   

 

다윗 vs 행악자

 

    다윗 신력서(信歷書): “완전함 무죄

   ▪흔들리지 아니하고’(1b)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1b)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3b)

   ▪주의 제단에 두루 다니며’(6b)

   ▪주께서 계신 집을 사랑하오니’(8)

 

다윗의 처절한 몸부림이 미열처럼 느껴진다.

그는 하나님과 행악자(악한 자, 죄인, 살인자)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포함하여 이들에 연류 되어 있음 때문에 겪는 고통과, 그것이 가지고 오는 삶의 혼돈스러움을 붙들고 악전고투(惡戰苦鬪)한다. 놀라운 것은 토끼몰이 식으로 포위해 들어오는 악인의 둘러쌈(압박) 앞에 물러섬이 아닌 정면승부로 응수하고 있음이다. 퇴로가 없다. 잔꾀를 부리지도 않는다. 정면승부다. 다윗에게서 영적으로 민감할수록 죄에 대한 저항이 크다는 걸 배운다. 그는 지금 자신을 향해 좁혀오는 포위망을 무엇으로, 어떻게, 누구로 더불어 돌파해야 하는가를 정확하고도 정직하게 간파한다. 이것이 완전함을 토로하는 그의 호흡에서 느껴지는 놀라울 정도의 섬세함이다.

 

 

다윗의 기준

 

바람이 불면 나무는 흔들리는 법이다. 영향을 받는다는 얘기다. 그런데 다윗은 놀랍게도 완전함’(1,11)을 고백한다. 허망한 사람과 간사한 자(4), 행악자와 악한 자(5), 죄인과 살인자(9)의 사악함과 뇌물로부터 결코 흔들리지 아니하고”(1), 오히려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3), 마침내 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12)라며 무죄를 고백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악인의 노략질에도 불구하고 결코 흔들림 없이 하나님 앞에 완전함’(1,11)으로 서 있다. 감히 누가 다윗의 완전함을 무력하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비록 사람은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이 아신다는 것을 믿고 사는 자는 복이 있다. 다윗이 그렇다.

참으로 놀라운 자신감이다. 그렇다고 그는 자신을 가리켜 죄 없는 의인이라고 선언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물론 무죄’(無罪)를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6a) 이는 허망하고 간사하고 악한 자들과 어떤 식으로든 죄를 도모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다윗은 악인의 시녀가 되지 않았음을, 그들의 노리개로 추락하지 않았음을, 죄인들의 전방위 공격으로부터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자신을 끝내 지켜냈음을 확신에 찬 자기고백에 담아 토해내고 있다. 과연 무엇이 다윗을 이토록 선명한 기준을 따라 살아가도록 했을까.

지극히 당연하고, 그래서 평범하기까지 하지만 다름 아닌 하나님이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 그의 모든 범사와 언행의 기준이자 밑그림은 하나님이다. 그는 언제나 행악자요 죄인들의 표적이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넉넉히 이겨낸 승전가를 부르는데 그 기저에는 한결같이 하나님이 서 계신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사니까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부터 자신을 분리(구분)해 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게 다윗에게서 발견되는 일상의 비밀이다.

   

 

두 얼굴의 사나이

 

한편 다윗을 향해 쉴 새 없이 태클을 걸어온 자들이 본문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B,B’). 그들은 다윗 인생도(人生圖)를 할 수만 있다면 일그러뜨리려는 모리배들이다. 다윗에게서 하나님의 흔적을 지울 수만 있다면 어떤 대가를 지불해도 아깝지 않다는 눈치다. 어떻게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망치는 일에 목숨을 걸 수 있을까. 하지만 세상에는 이와 같은 사명을 띠고 태어난 듯이 행세하는 자들이 생각보다 많다. 지금 다윗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포위되어 있다.

하지만 여유만만하게 저들의 포위망을 무력하게 만든다. 이것이 하나님 안에 있는 자의 안전감이다. 다윗은 정확하게 자신의 완전함을 파괴하려는 적()의 움직이는 동선을 알고 있다. 어떤 면에서 그는 겹겹으로 둘러쌈을 당하고 있다(구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무죄함을(6a), 변함없이 예배의 자리에 머물러 있음을(6b), 감사와 간증의 삶을 이어오고 있음을(7), 이를 성전(교회)을 사랑함으로 드러내고 있음을 담담하게 고백한다(8).

사실 평안하고 형통할 때 긍정을 토해내기란 그 반대 형편보다는 쉽다. 그러나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면서도 내면세계는 물론 하나님을 향해 밝고 맑은 영혼의 가락이 울려나게 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완전함과 무죄함의 탄탄한 균형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웬만한 용량으로는 흉내내기조차 쉽지 않은 일이다. 이렇듯 다윗은 충분히 흔들릴 수 있고, 의기소침할 수 있는 유무형의 압박이 밀려오고 있고, 그래서 결국 원수들이 목표했던 지점으로 무너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보란 듯이 평탄한 곳에”(12) 서 있다.

한 가지를 더 배운다. 다윗은 악한 자(행악자, 간사한 자, 허망한 사람, 죄인, 살인자, 사악함과 뇌물이 가득한 자; 4-5,9-10/B,B’)의 바싹 말라 죽어버린 영혼의 몰골을 보고 있다(9). 그래서 더더욱 다윗은 죄인들의 편에 서지 않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사악한 뇌물이 손에 가득한 자들(10), 결과적으로 이것을 위해 영혼을 도적질한 것 아닌가. 그래서 완전한 자를 자신의 자리로 끌어내림으로써 망하게 하려 한 것 아닌가. 나 죽고 너 죽자는 식이다.

다윗을 무너뜨리기 위해 이런 일들이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다면 하물며 미물과도 같은 나이겠는가. 세상은 온통 복음과 기독교에 대해 적대적이다. () 기독교 세력이 인터넷을 무기로 얼토당토 아닌 이슈들을 조작하여 전쟁을 걸어온다. “만약 라면으로 몰고 가다가 아니면 말고식이다. 마무리(결론) 없는 허위사실을 만들어 내어 사람들의 생각 속에 마치 그게 사실인 것처럼 기억하게 만들어 버린다. 어찌할까.

   

 

부스러기 묵상

 

한 편의 인생회고록을 대하는 느낌이다.

결코 한 점 부끄러움 없는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것, 이것 하나만으로도 다윗은 성공한 사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현대는 어느 정도의 익명성이 어떻든 보장된다. 하지만 다윗처럼 모든 삶의 앵글이 노출되어 있는 경우에는 투명하게 사는 것도 어렵지만, 자신의 인생행로를 토해내기란 말처럼 그리 만만하지 않다. 혹 사람들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른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도 속이며 포장, 변장, 화장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불가능하다. 이것이 다윗의 평범함에 들어있는 위대함이다.

마치 다윗청문회를 보는 듯하다. 지나온 인생보고서에 대한 거리낄 것이 없는 자로서의 자유함, 그리고 당당함, 이처럼 언행하면서도 하나님과의 교제권 안에 머물러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탁월한 영성이 빛난다. 보통 이런 자신의 조건을 앞세운 나머지 뭔가 좀 균형감을 잃은 모습을 보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거들먹거릴 수 있고, 도토리 키재기 같음에도 알량한 차이를 이용해 다른 사람 깔보거나 무시할 수 있고, 하나님을 향해서도 이런 조건 이용해 먹기에 지능적으로 접근해 갈 수도 있다는 면에서 그렇다.

종종 인사청문회를 보면서 자신에게 유리하면 없는 것도 있다 그러고, 있었던 것도 없다 그러는 파렴치함을 목격할 때가 많다. 세상의 장관 자리 하나도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데 하늘의 사람으로 천국시민권자인 나는 더 그래야하지 않을까. 그래서 완전함(1,11)과 무죄(6)를 선서하듯 고백하는 다윗이 하나의 모델이다. 이런 도덕성에 기초한 영성은 하루 아침에 완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오늘 앞에 서기까지 그가 살아온 인생의 발자취을 바라다본다.

하지만 대가없이 얻을 수 있는 게 없잖은가. 그의 오늘이 있기까지 그가 온 몸으로 승부해 온 악인과의 결투, 그렇다면 이것 생략하고 정상에 서기를 바라는 것은 도둑놈 심보다. 언젠가 우리도 다윗처럼 살아온 지난 인생을 이처럼 정리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가깝게는 가족들에게, 또한 목양 울타리에서 만나는 성도들과 교회 앞에, 그리고 우리의 주이시며 전부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그려야 할 인생보고서 말이다. 이것은 미래의 몫으로, 지금과 무관하게 동떨어져 있는 게 아니다. 지금도 하나 둘 기록해 가고 있는 현재가 곧 미래다. 살아온 인생을 다윗같지는 않다 할지라도 다윗스러울 수 있기를 소망하는 이유다. 다윗은 우리의 현재요 미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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