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에게 길을 묻다(시 78.65-72).

20220228(묵상)

 

 

 

다윗에게 길을 묻다.

78.65-72

 

    본문 관찰

 

    다윗을 택하시되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이에 그가 그들을 기르고 지도하였도다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구 조]

       사자와 곰을 물리침

       물맷돌 연습

       음악 치료(시편을 준비하다)

       양을 치다(78.70-72)

     ■첫 번째 기름부음(삼상16:13): 아직 장성하지 않은 막내(삼상17.13-14)

       ▪다윗: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삼상16.13)

       ▪사울: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삼상16.14a)

       *실전 음악치료(삼상16.23, 18.10, 20.9)

       *실전 - 골리앗을 물리치다(삼상17.41-54)

       사울의 칼을 피해 다니는 망명생활(삼상18-31)

    ■두 번째 기름부음(삼하2.4): 30

    ■세 번째 기름부음(삼하5.3-4): 37

       *실전 - 이스라엘 목장을 치다(78.70-72)

  

 

다윗의 영성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71)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27.10)

 

78편의 시인은 비유의 끝에 다윗을 소개한다(2,70-72).

우리가 아는 대로 다윗의 뿌리인 아버지 이새의 가문은 이제 막 시작된 사울왕국과 친분이 있거나, 그래서 그 공로로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명문가는 아니었다. 이새의 집은 베들레헴에서 양을 치는 집이다. 다윗은 이새의 여덟 번째 아들이었고, 선지자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을 받아 왕을 예선하는 자리에도 나아오지 않을 만큼 아버지나 형들에게 그리 존중받는 것 같지가 않다(27.10 참조). 이 다윗 이야기는 사무엘상 16-17장에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는 양을 기르는 목동, 그것도 자기 양이 아닌 아버지의 양을 치는 고용된 양치기였다. 그런 그가 이스라엘 왕국을 통치하는 제왕이 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 다윗을 그렇게 만들었는가이다. 물론 오늘 시인인 하나님이 그를 택하시되 취하시며”(70)라고 한 마디로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바로 앞에 버리시며 택하지 아니하시고 택하시며”(67-68)에서처럼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점에서 토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선택 안에서 다윗의 생애를 조명해 보는 것은 선택받은 다윗을 높이는 것이 아닌 선택하는 하나님의 눈을 이해하는 하나의 앵글이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다윗은 일곱 형들, 아버지, 선지자 사무엘, 좀 더 예민하게 본다면 온 이스라엘에게까지 역시 별 주목을 받지 못하는 별 볼 일 없는 아들인 것처럼 보인다. 왕을 예선하는 자리(삼상16.1-10)에서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사무엘도 장남 엘리압에게 기름을 부을 뻔하였고, 선지자가 묻자 그때에야 비로소 아들이 하나 더 있다 -그가 바로 다윗이다(삼상16.11)- 고 말할 정도로 아버지 역시 다윗을 주목하고 있지 않았었다.

이런 다윗이 불같은 청소년 시절을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는 점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삼상17.26b,34-37). 생각해 보라. 다윗의 아버지와 형들의 면면을 볼 때 그리 행복해 보이거나 형제간의 우애나 사랑이 깊은 그런 가정(가족)처럼 여겨지지 않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삼상17.28; 27.10 참조). 이런 척박한 밭에서 위대한 다윗이 자랐다는 점에서, 그럼 그가 어떻게 그의 어린시절을 살아왔는지를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하루 아침에 로또가 터진 운 좋은 사나이인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2대 왕이 되어 다윗왕조(다윗왕국)의 문을 열게 한 게 무엇인지 그의 영성(일기)을 드려다 보자.

그는 준비된 사람이었다. 다윗의 생애를 조망해 보자. 오늘 기름부음을 받기 이전에 그는 이미 하나님의 눈에 들어왔다. 과연 무엇 때문일까? 비록 그는 소년이었고 양치는 목동이었지만 골리앗 앞에 나아가기 이전, 그는 준비되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목동이라는 자신의 신분과 직업에 언제나 충실하였다. 언제나 반복되는 생활의 연속이었지만 결코 적당히 해치우는 식으로 일하지 않았다. 성실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그걸 보고 계셨던 것이다. 이것이 다윗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등장하는 비밀이다.

   

 

물맷돌 효과

 

    “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삼상17.40)

 

골리앗의 이마에 명중시키는 실력을 생각해 보자. 그는 무수한 연습을 했을 것이다. 시간만 나면 그는 목표물을 정해 놓고 물매를 던졌다. 처음에는 전혀 딴 방향으로 돌이 날아가서 떨어지곤 했을 것이다. 어느 때는 양의 머리에 맞아서 양이 뇌진탕으로 쓰러져 그날 밤 양고기를 먹는 행운(?)도 있었을 것이고, 오늘 식으로 말하면 TV 브라운관도 깨뜨렸을 것이고, 아마 돌이 자신의 머리도 종종 때렸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하기를 하루, 한 달, 1, 마침내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리기도 하고, 그의 고백에서처럼 사자와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따라가서 그것을 쳐죽였을 것이다(삼상17.34-35). 그는 최선을 다 했고, 매우 성실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보다 적극적으로, 자기에게 득이 되는 쪽으로 선용하였다.

그는 골리앗의 머리를 생각하면서 몰매를 연습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가 성실하게 준비했던 것이 때가 되매 쓰이는 도구가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준비가 갖는 최고의 맛이 아니겠는가? 이 다윗에게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기름을 부으신다(16.13a). 그리고 여호와의 신에게 감동된다(16.13b).

   

 

음악 치료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들고 와서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령이 그에게서 떠나더라.”(삼상16.23)

 

수금을 연주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는 이미 하나님을 노래하고 찬양하는 예배자로 깊은 호흡을 토해내고 있었다(삼상 16.23). 언제인가? 첫 번 기름부음을 받기 이전, 10대 때다. 이 역시 기름부음을 받고나서가 아니었다. 하나님이 선지자 사무엘을 이새의 집에 보내실 때 아무도 다윗의 존재를 알지 못한, 바로 그러한 때에도 그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 소리 좋은데 수준이 아니다. 단순한 기능과 스킬이 아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 수금을 타면 귀신이 물러가는 자, 이렇듯 그는 예배자였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였다. 왕이 되려고? 아니다. 그저 일상생활의 영성에 자신의 인생을 연주해 내는 평범한 10대 소년이었다. 그 다윗을 하나님이 놓치지 않으신 것 아닌가.

   

 

이새 목장의 결투(삼상17.34-37)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36-37b)

 

또 다른 하나는, 10대에 이미 사자와 곰과 싸우는 자로 준비된다. 부산동물원에서 태어나, 부산동물원에서 생명을 다 해 이제 죽어가는 이빨 빠진 사자가 아니다. 밀림의 황제 아닌가. 놀라운 것은 그가 사자와 곰 앞에 설 때에도 자신의 용감과 용맹이 아닌 하나님이 사자와 곰의 발톱으로부터 자신을 건지셨다고 간증하고 있음이다.

이렇듯 이 소년 다윗은 10대를 어찌 보낸다는 것인가. 물매를 던지고 사자와 싸우고 수금을 타는, 소위 예체능만 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이었는가. 아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이를 허락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넉넉하게 감당해 내고 있었던 것이다. 왕이 되려고? 아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어느 날, 우리들이 생각할 때는 너무도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것 같지만 이처럼 그를 주목하시고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가 오늘 우리에게도 알려지고, 드러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다윗이 10대 후반에 첫 번째 기름부음을 받았으나 십 수년이 지난 후인 30세에 두 번째 기름부음을 받아 유다지파의 왕으로 7년 반을, 그리고 세 번째 기름부을 받아 통일왕국의 왕으로 총 40년을 다스린다.

하나님은 왜 10대 후반, 오늘도 하면 대학 1학년 정도인 자를, 아무 것으로도 검증된 게 없고 내세울만 한 그 어떤 자격이나 조건도 없어 보이는 무명의 양치기를 이스라엘의 두번째 왕으로 지목하시는 것일까.

그는 왕이 되기 위해서가 대통령학과에 입학 하거나, 왕이 되기 위한 기름부음을 받은 후에 왕위수업을 받은 게 아니다. 단지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움직이는 표적인 골리앗의 약점 부위에 돌을 박을 수 있는 실력을(삼상17.48-49), 아버지의 양을 훔쳐가는 사자와 곰과 씨름할 능력을(삼상17.35-36), 수금을 타면 연주 잘하는 수준을 넘어 귀신이 물러가는 영감 넘치는 영성(삼상16.23)을 겸손과 열정과 성실과 마음을 다해 일상처럼 해 내고 있었다.

그런 다윗을 하나님이 주목하셨다(78.70-72). 아버지의 양무리를 이처럼 사랑한다면 이스라엘이라는 목장을 맡겨도 충분하리라 생각하신 것이다.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학교에서 자라고 있는 자녀들과 학생들 안에 다윗이 자라고 있다는 소명, 그들이 30세가 되고 50세가 되어 고백하기를 "나를 양육해 준 부모와 다녔던 교회와 학교가 나의 10대 후반을 다윗처럼 자라도록 해 주었다"는 고백과 간증 앞에 서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양육자: 완전함 & 능숙함

 

다윗은 젖 양을 주목한다. 튼실해서 어미의 젖꼭지를 빨며 포만감을 즐기는 힘센 양이었을까. 아니면, 뒤쳐져 비틀거리며 젖꼭지도 차지하지 못해 헤매이는 젖 양이었을까. 그는 힘없고, 약하고, 무능하고, 어미 젖꼭지 하나 조차 제 힘으로 물기에도 벅찬 그런 젖 양을 품에 안고 어미 젖꼭지를 물려주며 그의 배에 젖이 가득차기까지 그를 보호해 주고, 그의 필요를 채워주는 그런 사람이었을 것이다.

다윗의 생애를 기록하는 성경 안에 좀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침묵하는 주제가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다윗의 어머니에 대한 부분이다. 그 이유를 모르겠지만, 여기서 가능한 생각은 다윗은 어머니와 함께 한 삶의 여백이 별로 없었지 않았나 싶다. 어쩌면 그 역시 일곱 형들의 힘에 밀려 젖 양처럼 밥그릇도 찾아 먹지 못한 그런 유년시절을 보냈는지도 모른다. 비틀거리는 젖 양에게서 자기 자신을 보았고, 그래서 그는 늘 약하고 힘없는 자들의 편에 서는 것을 본능적으로 배웠을 지도 모르겠다. 성경이 이 부분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으니까 이 다음에 천국에서 다윗에게 직접 인터뷰해 뵈야 할 것 같다.

어떻든 그는 자기 사업도 아닌 아버지의 양을 지키는 자였다. 하지만 그는 젖 양을 지키는 곁에 있었고, 그 양들을 사자나 곰이 공격해 올 때 자신의 목숨(생명)을 던져 이를 지켰다. 그까짓 양 하나 정도가 어찌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하랴. 그럼에도 다윗은 사자와의 결투를 할망정 양을 잃는 것을 그냥 보고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다윗의 다름이다. 즉 그의 영성이다.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삼상16.13a)

    “유다 사람들이 와서 거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으로 삼았더라.”(삼하2.4a)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니라.

      다윗의 나이가 30세에 왕위에 올라

      40년 동안 다스렸으되.”(삼하5.3-4)

 

다윗은 세 번이나 기름부음을 받는다(삼상16.13, 삼하2.4, 5.3-4). 여기서 우리가 집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펴본 다윗의 영성(일기)은 기름부음 이전에 준비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그는 유명해진 이후에, 사무엘을 만난 이후에, 사울왕을 알게 된 이후에 학습과 레슨(사사)을 통해 만들어진 사람이 아니다. 또한 왕이 되기 위해, 왕이 되고자 하는 야망을 위해 선행학습처럼, 혹은 왕이 될 것이라는 어떤 언질이나 느낌을 가지고 왕궁수업을 받은 게 아니다.

그는 하나님에 의해,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 앞에 드러나기 전에 이미 준비된 비밀병기였다. 그는 무명(無名)의 어린시절에 그의 일평생을 지탱해 줄 기초를 준비했다. 어느 것 하나 확실하지 않은 불확실성의 시대에 그는 묵묵히 자신의 일상에 늘 최상과 최선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아버지와 형들도 그의 존재를 알지 못했지만, 아니 다윗 자신 역시 성공과 출세를 위해서 앞서 묵상한 주제들을 준비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주목하셨다. 그는 하루 아침에 정상에 선 사람이 아니다. 첫 번 기름부음을 받고 바로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게 아니다. 무수한 세월들을 사울의 칼날을 피해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다윗은 이처럼 생사(生死)의 기로에 선 시절에 사자와 싸울 레슬링 훈련을 받은 게 아니다. 골리앗과 싸울 물매를 연습하지 않았다. 언제 사울의 군사에 발각될지 모르는 도망자일 때 수금을 타는 법을 배우지 않았다. 그는 이 모든 것들을 아버지의 양을 치는 10대의 무명시절에 마스터했다.

다윗은 준비했고, 하나님은 그를 쓰셨다. 이것이 다윗의 영성, 그러니까 다윗일기의 핵심이다. 다만, 요즘 우리가 준비하는 것과는 좀 달랐다는 점도 잊지 않아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성공하고, 출세하고, 유명해 지고, 잘 살고, 다시 말하면 폼나게 살아보려는 욕심과 욕망을 어느 정도 품고서 준비한다. 그래서 준비한 만큼 하나님이 써 달라고 은근히 그분을 협박하거나 그분 주위를 맴돈다. 자신은 준비했다는 것이다. 때로 하나님이 이런 인물을 몰라본다며 씩씩거린다. 이게 소위 어설프게 준비된 자의 교만함이다. 이런 못된 영적 거지 근성이 망조다.

다윗은 왕이 되겠다는 비전을 품고 왕의 길을 준비한 것인가. 선왕(先王) 사울의 눈에 들기 위해 정치적인 줄을 잡았는가. 요나단을 디딤돌 삼기 위해 그에게 접근했는가. 사울이 악령에 의해 번민하는 것을 본 이후에 수금을 통한 음악치료를 레슨 받았는가. 서울체대와 서울음대 교수들에게 사사를 받으며 제왕이 되는 엘리트 코스를 밟은 것인가. 어느 것도 아니다. 그는 철저하게 무명의 저 변방에서, 오직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용량 안에서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를 살았을 뿐이다.

움직이는 표적을 맞추는 [이스라엘 물맷돌대회]에 나가기 위함도 아니었다. 곰과 사자와 싸우는 [사울왕배 레슬링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연습한 것도 아니다. [서울 수금콩클] 수상자 보드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 수금을 탄 것도 아니다. 다윗에게 이런 것들은 거의 일상이었다. 그는 이렇듯 일상생활의 영성이 있었고, 이를 건강하게 채워가는 준비된 사람이었다. 바로 그를 하나님이 쓰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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