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자로의 초대: 하나님이 명하시다(시 15.1-5).

20220424(양무리교회)

  

 

 

예배자로의 초대: 하나님이 명하시다.

Ps. 15.1-5

  

    본문 관찰

 

    주의 성산에 사는 자(1-5a)

       …을 하는 자

       …을 하지 아니하는 자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5b)

  

 

성막 초대장, 받을 수 있습니까?

 

    “또 문지기를 여호와의 전 여러 문에 두어

     무슨 일에든지 부정한 모든 자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대하23.19)

 

하나님은 준비된 예배자를 찾으신다.

1절의 주의 장막성산은 제사, 성막(26), 성전(시온, 왕상8.1)과 관련된 하나님의 임재와 연결된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의 자리에서 이해하면 예배다. 예배자는 보이는 성전 문지기에 의해 출입이 결정된다(대하23.19).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전의 주인이신 보이지 않은 하나님에 의해 그 출입의 결정이 명령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지금 다윗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위해 성막이 있는 거룩한 산을 향할 때 지금껏 배우고 익힌 율법의 명령 안에서 예배자의 모습을 정리해 보고 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자신은 물론 온 이스라엘이 이처럼 예배자의 법칙을 따라 살아가기를 기대한 것이다.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인가?

주의 성산에 사는 자(Q & A)

 

     [하다]

    ∙정직(깨끗)하게 행하는 자(2)

    ∙공의(옳은 일)를 실천하는 자(2)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자(2)

    ∙눈은 망령된(악한) 자를 멸시하는 자(4a)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는 자(4a)

 

     [아니하다]

    ∙혀로 남을 허물(모함)하지 아니하는 자(3)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3)

    ∙이웃을 비방(모욕)하지 아니하는 자(3)

    ∙마음에 서원(맹세)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는 자(4b)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는 자(5)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5)

 

다윗은 묻고(1), 제사장은 답한다(2-5a). 그리고 제사장은 바로 그 예배자를 축복한다(5b). 하지만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 예배자의 조건을 말씀하신다. 한편 다윗은 율법(제사장)을 통해 특별히 바른 예배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처럼 배우고 알아갔을 것이다. 그러면서 제사장적 기도를 노랫가락에 맞춰 예배자로서의 자신을 하나님께 살아있는 제물로 이 신앙고백에 담아 드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모든 백성들 역시 이 노래처럼 그렇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제사(예배)를 드리기를 소망하고 있음이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다시금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는 누구인가에 불을 당긴다. 예배자의 조건은 하나님이 정하시고, 또 명령하신다. 먼저, 긍정적인 면에서다. 수평적으로는 마음에서부터 진실을 말하는 것은 물론 정직과 공의를 실행하는 자여야 한다. 또한 수직적으로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언행에 충실한 자가 바른 예배자라 선언한다.

둘째로, 부정적인 면에서다. 특별히 가난한 이웃과의 관계가 집중적으로 제시된다. 이렇듯 바른 예배자는 그가 머물며 살아가는 삶의 자리(field)에서 준비되고 또한 결정된다. 그렇다면 결국 예배는 성전에서 드림이라는 행위만으로가 아닌 성전에 오기 이전이라는 삶에서부터 이미 시작되고 또 드려지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결국 예배에 있어 윤리적 순결이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기준인 셈이다. 이것은 가장 중요한 예배자의 법칙임에도 불구하고 구약 제사가 자칫 잃어버리기 쉬운 주제였다. 예배는 언제나 형식과 제도가 기준처럼 제시되었고, 따라서 보이지 않은 내면이 아닌 보이는 외면이 예배의 성패를 가르는 시금석처럼 행세하곤 했던 것이다. 이 어찌 구약 예배에 대한 반성만이겠는가.

물론 내면이 건강하면 형식도 탄탄한 균형을 잡는 법이다. 동시에 살아있는 형식이라면 건강한 내면을 바르게 드러내 준다. 이런 점에서 엄밀하게 본다면 안팎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한 상상일 수 있다. 때문에 오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것은 그야말로 예배를 두 번 죽이는 꼴이다. 요점은 예배자로서의 나다. 나는 지금 오늘 다윗의 고백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인가? 나의 예배는 예배 시간으로 제한되어 있는가? 아니면 삶에서 시작된 예배를 예배 시간 안에 그대로 옮겨놓은 삶과 예배의 하나됨을 따라 살아가는가?

 

 

흔들린다 할지라도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배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7.24-25)

 

    세상 흔들리고(오직 믿음으로)

    세상 흔들리고 사람들은 변하여도 나는 주를 섬기리

    주님의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네 나는 주를 신뢰해

    믿음 흔들리고 사람들 주를 떠나도 나는 주를 섬기리

    주님의 나라는 영원히 변하지 않네 나는 주를 신뢰해

 

예배를 삶으로 이어가고, 바로 그 삶을 또 다시 예배로 그려내는 사람에게는 영원히에 해당하는 복이 약속된다(5b):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다윗의 예배신학은 이처럼 영원한 하나님의 복까지를 바라본다. 한편 예배자에게는 만사형통(萬事亨通)이 약속되고 있다고 쉽게 단정할 수 있을까. 다윗이 예배자에게 주시는 축복을 이렇게 기대했고, 또 반드시 그러리라고 선언(약속)하고 있는 것일까.

성경의 예배자들이 생각난다. 가장 멀리는 아담의 작은아들 아벨이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렸음에도, 하지만 그 결과는 죽음이었다. 선지자 엘리야 역시 바알을 섬기는 850명의 거짓 선지자들과 싸워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위해 도망자가 된다. 그래서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는 말씀이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다윗의 소망은 예수님의 말씀(7.24-25)과 절묘하게 연결된다.

마태복음 5-7장에 이르는 산상수훈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비와 바람과 창수가 있음이 그것이다(7.24-25). 하지만 들었으나 행하지 않는 자(7.26-27)와 다른 것은 그 다음이다. 양자에게 동일하게 비와 바람과 창수가 있었지만, 그러나 듣고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였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바른 예배자로 살아도 그의 인생행로(人生行路)에 비와 바람과 창수는 있다. 그럼에도 그는 예배자에게 요구되는 바른 삶의 자리(2-5a)를 굳게 지켜야만 한다. 바로 그에게 하나님은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는 복을 얻게 하신다. 예배는 이렇듯 영원까지를 바라보게 한다. 얼마나 큰 감동인가. 비록 예배자의 삶의 환경과 상황이 흔들린다 할지라도 변함없이 예배자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 그가 오늘의 시편이 주는 위대한 고백을 자기 멜로디로 이어갈 수 있는 사람이다.

 

 

부스러기 묵상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5.23-24)

 

예배자는 삶의 자리에서 이미 준비된다.

예배는 예배 드림 이후에 좋은 예배자로 세워지는 면이 있다. 하지만 예배드림 이전에 예배자로 만들어지는 면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준비된 예배자를 통해 좋은 예배가 하나님께 드려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예배는 좋은 예배자에 의해 만들어진다. 다윗의 예배자를 향한 열망이 느껴진다. 이것이 하며 아니하며(2-5)에 들어있는 다윗의 중심이다. 아마도 다윗은 하나님이 명하시는 예배자의 조건들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나는 준비된 예배자인가. 나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바로 그 예배자인가.”

이렇듯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예배자의 조건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든 예배자들에게 동일하게 울림이 된다. 누가 좋은 예배자인가를 찾기 이전에 내가 하나님이 찾으시는 바로 그 예배자로 서는 것이 주님이 내게 기대하시는 예배자로서의 조건이다. 설교 시간이 시작되었음에도 예배실에 들어서는 분들을 보며 마음이 상할 때가 종종 있다. 하지만 엄밀히 생각해 보면 정시에 앉아 있다고 해서 바른 예배자인가를 생각하면 찔림이 있는 게 사실이다. 겉보기에는 준비된 예배자일지는 몰라도 속사람은 이미 그러지 않을 수 있다는 걸 깨닫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도 많은 예배를 드렸으면 이제는 예배의 전성기를 구가할 때도 되었다. 그런데 여전히 좋은 예배자로 서고자 하는 갈급함이 있다. 비록 오늘 최상의, 최고의 예배자로 나아갔지만 그러나 그럴수록 더 좋은 예배자로 나아가려는 열망을 발견하곤 한다. 그래서일까. 내가 드릴 최고의 예배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자신에게는 부끄럽고, 주님께는 황송하고... 다윗이 제시한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의 조건 앞에 자신을 세워보는 말씀이다. 바라기는 예배에 실패하는 인생, 삶으로 드리는 예배가 망가진 인생이 되지 않기 위해 다시금 예배의 목마름으로 주님 앞에 서보자. 예배의 감격이 삶에서 시작되어 예배에서 확인되고, 그게 다시 삶의 리듬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예배자로 서보자. 예배에 성공하는 자로 서보자.

앞으로 20년을 주일예배로 드릴 수 있다면 내가 드릴 예배는 1천번 조금 더 남았다. 이제 코로나 제한도 풀리고, 그래서 주의 장막에 머무를, 주여 성산에 사는 자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도전 앞에 서게 되었다. 남은 우리의 인생의 시간표 안에서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예배자로 나아가 보자. 내가 주께 올려드릴 최고의 예배가 드려질 때까지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로 나와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를 그렇게 드려보자.

  

    [적용적 묵상]

    a. 다윗의 수준의 질문을 할 사람이 있는가?

    b. 나는 이 정도의 질문을 할 수 있는가?

    c. 내 가족(순원, 동료)들은 이 질문에 뭐라 답을 할까?

    d. 나는 예배의 영광을 자녀에게 보여주고 전승하는 예배자인가?

        이를 진정한 예배자의 모델인 아브라함과 이삭의 모리아산 번제(예배)에서 그려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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