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음의 꼬리를 끊으라!(시 14.1-7)

20200514(묵상)

  

 

 

어리석음의 꼬리를 끊으라!

Ps. 14.1-7

  

   본문 관찰

 

   어리석은 자(죄악을 행하는 자)

   하나님: 피난처

   의 인: 구원

   

 

어리석도다!

 

   *시편 53편과 거의 동일하다.

 

다시금 무엇이 어리석음인가를 곰곰이 생각하게 한다.

다윗의 시각(진단), 즉 그가 읽어내는 어리석음에 대한 입장은 의외로 간단하다. 기준점이 자신이 아닌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하는 것이 그렇다. 그는 하나님이 아닌 것들이 어리석음에 대한 그분의 시각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조금의 틈을 허용하지 않고 싶어하는 것 같다. 또한 자신이 어리석은 자로 전락하지 않기를 갈망하는 마음도 느껴진다. 이 부분이 참 절묘하다. 한편 어리석은 자들이 하나님을 찾아내지 못하고 믿음에서 떠나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한결 같이 일하신다. 지금 다윗은 어리석은 자와 하나님 사이에 서서 이를 읽어낸다. 그리고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서 그 해답을 찾아낸다.

 

 

우민가(愚民歌):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을 향해 무능(無能)을 얘기할 만큼 타락해 있는 인간, 바로 그가 어리석은 자의 실상이다. 언뜻 보기에는 무신론(無神論)을 말하는 것 같지만(1a)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전형적인 교만이다. 이것이 인간 타락의 결과로 말미암은 악행이다는 점을 주목한다(1b). 이렇게 해서 착한 일 하는 이’(1b,3)와 철저하게 구별된다. 이처럼 모두가 다 빗나가 온통 썩어버렸다. 하나님 없는 인간 실존의 참담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비극이다.

한 가지가 더 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난 만큼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그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잘난 채 하더니 결국 이 꼴이다. 결국 하나님을 향하여 그 어떤 반응도 할 수 없는 철저한(완전한) 분리를 경험하고 만다. 하나님을 떠난 것은 자유였을지 모르나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은 찾을 수 없는 어리석은 자, 그가 하나님 밖에 있는 자다. 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우민가(愚民歌)를 보라.

   

 

하나님: 의인은 없다!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3.10-12)

 

하나님의 눈은 정확하다. 하나님을 아는 눈이 없는 어리석은 자의 실상을 밝히 드러내신다. 믿음이 없으니 겁 없는 말을 토해 내지만 그게 부메랑이 되어 자신의 심장에 박히는 하나님의 진단과 처방이 되는 것은 몰랐음이 분명하다: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3) 그러니 하나님이 없다!”며 건방을 떤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 역시 하나님의 가시권 안에 있다는 걸 의식치 못하거나, 혹은 그걸 중요하지 않게 여기고 자기 마음과 생각의 방향을 따라 움직이면 어리석은 자라 정죄를 받을 수 밖에 없음을 잊지 않기로 하자. 하나님은 죄악을 행하는 어리석은 죄인이 아닌 선을 행하는 의인을 주목하신다(5). 비록 그가 이런저런 이유들 때문에 가난한 자로 살아간다할지라도 하나님은 죄인의 손아귀에서 그를 보호하시는 피난처가 되심을 분명히 하신다(6).

죄악에 물든 죄인의 편에 서지 않은 것 때문만은 아닐지라도 삶의 한 과정이 가난한 자의 걸음걸이를 따라 살아갈 수 있음을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6). 동시에 그것 때문에 얼마만큼의 부끄러움도 감수해야 될 수도 있다. 바른 길, 하나님의 길,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노정에서 잠시 만난 부끄러움 때문에 부패하거나(1b), 치우치거나(3a), 죄악의 떡을 먹는 자로 추락하거나(4), 하나님이 없다며 배도(背道)하지 않는 자만이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보호를 받을 수 있음을 잊지 말자. 하나님이 계시는 피난처로 가는 길이 보인다. 감사하다.

   

 

부스러기 묵상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7b)

 

다윗은 지금 자신의 형편의 포로기에 비유하고 있는 것 같다(7b).

놀라운 것은 온갖 유혹이, -그 중에 가장 커서 힘든 게 하나님이 없다!”는 불신(不信)이다.- 판을 치는 소용돌이에 자신이 휩싸여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면서 어리석은 자’(죄악을 행하는 자)로부터 자신을 분리해 낸다. 참으로 놀라운 믿음에로의 이동(shift)이다. 하나님까지 부정하기를 요구하는 죄악의 포로가 눈 앞에서 자신을 유혹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의인’(5)의 반열에 서는 것을 포기치 않는다. 이게 다윗이 자신의 신앙고백은 물론 온 몸으로 간증하고 있는 승리의 씨앗이다.

구원은 죄악을 행하는 어리석은 자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7a). 이것이 승리자의 기쁨과 즐거움이다. 다윗은 오늘도 이 승리의 찬가를 가지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면서 지금 혹시 포로의 자리에 있는 것처럼 삶의 질곡 속에 흔들리는 사람이 있다면 피난처되시는 하나님 편에 서기를 간곡하게 부탁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현존(現存, 5b) 안에서 살아가는 의인의 영적 자존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하나님이 없다!”는 잡음(雜音)이 팽팽하게 공존하고 있다. 이 두 갈림길에 어김없이 다윗도 서 있었음을 묵상해 본다. 이 어찌 다윗만의 자전적 고백일까.

종종 진리의 눈을 감고 적당하게 세상과 줄타기를 하고 싶은 달콤한 유혹이 심장을 통과해 가곤 한다. 죄악을 걸러내는 필터가 기능을 잃어버리면 우리 역시도 어리석은 자의 신분으로 추락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세상이 하나님이 없다!”고 아우성치는 것도 부족해서 죄악을 행하는 우리의 어리석음과 못남이 결국 하나님이 없다!”는 걸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부끄러운 도구가 된다면 이건 정말 비극이다. 이 꼴 나면 그리스도인은 그것으로 끝이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감이라는 영혼의 순결을 지키는 영적 신장(腎臟)이 망가지지 않도록 어리석은 죄악의 가지들을 잘라내는 내면의 싸움을 좀 더 치열하게 감당해야겠다.

최후의 승자에게만 허락된 것이 즐거움과 기쁨이다. 우리네 인생의 그림이 이처럼 마무리되도록 죄악의 가지치기를 게을리 하지 말자. 다윗이 승리했다면 우리도 그럴 수 있다.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시니까(5b). 하나님이 피난처가 되시니까(6b). 우리의 등 뒤에서 우리를 지키시며, 격려하시며, 인도하시며, 구원의 문을 통과하여 즐거움과 기쁨의 자리에 세우실 것이니까. 오늘도 어리석은 자의 헛소리를 구분(구별)할 수 있는 영적 기본기에 충실하기 위해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다. 이처럼 오늘도 주님 앞에 머물러 있음이 행복하다. 정말 아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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