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vs 하나님, 그 사이에서(시 13.1-6).

20200513(양무리교회)

  

 

 

고통 vs 하나님, 그 사이에서

Ps. 13.1-6

  

   본문 관찰

 

   두렵건대(1-4)

   기뻐하리이다(5-6)

   

 

어느 때까지니이까?

 

배 안에 있어도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것은 마찬가지다.

시인은 지금 인생 교차로에 서 있다. 그는 원수의 계속되는 공세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다(3-4). 때문에 이 공포가 과연 어느 때까지계속될 것인가에 대해 하나님께 울부짖는다(1-2).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역설적인 모습으로 자신을 감싸고 있는 고통 앞에 선다. 그것은 다름 아닌 기쁨과 찬송이다(5-6). 얼른 이해하기가 쉬지 않은 반전이다. 인생전반전의 고통을 지나 인생후반전을 향한 소망이다.

이렇듯 시인은 전혀 이질적인 두 모습 사이에서 고난의 파도를 타고 있다. 자신의 전반전은 두렵건대이지만 하나님이 행해 주실 후반전인 기쁨그 사이에서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찬송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 원수들에 의해 두려워하고 있다. 동시에 원수들에게 포위되어 두려움에 떨고 있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하나님을 향한 찬송과 기쁨을 잃지 않는다. 이 요동치는 삶의 흐름을 어떻게, 무엇으로 넘어설 것인가. 다윗에게서 우리 자신을 보는 순간이다.

 

 

두렵건대(1-4)

 

다윗은 원수들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분리됨이라는 영적 고독에 몸부림친다. 그는 솔직하다. 자신의 내면세계를 볼 줄 알았고, 또한 이를 정직하게 진단할 줄도 알고 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누려본 경험이 있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 즉 그분과의 멀어짐이라는 혼돈과 두려움이라는 관계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다: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2a)

다윗은 지금 하나님 앞에 빈털터리이자 벌거숭이로 선다. 창피한 줄도 모르고서 정직하게, 그러나 눈물 나도록 시리고 아픈 자신의 텅 빈 영혼을, 지금 자신의 상태가 영혼까지 피곤한 상태에 있음을 그대로 시인(노출)해 버린다. 감히 하나님께 무얼 숨길 수 있으랴! 한편 다윗으로 하여금 더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이런 자신을 향한 원수의 기쁨 가득한 비아냥과 허풍스러운 참소다(2b,4): “내가 그를 이겼다!”(4a)

일이 이쯤 되면 보통 죽음을 생각하는데 다윗도 예외는 아니다(3). 이 때 그는 자신에게서는 사망의 잠이지만(3), 그것이 원수에게서는 실패에의 두려움이 한계상황으로 몰리게 된 주범(主帆)임을 직시한다(4). 그만큼 다윗은 과연 이 위험천만한 상황이 어느 때까지계속되어야 하는가에, 아니 결국은 그러지 않아야 함을 역설적이게도 목이 터져라 외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지금 다윗은 허공에 대고 향방 없는 메아리처럼 쏘아대는, 말하자면 소위 고양이에게 몰린 쥐처럼 그냥 한 번 몸부림쳐 보는 그런 언행은 아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 앞에서, 그분을 향해, 그분으로 말미암아 새 희망의 솟아나기를 갈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너져도 하나님 앞이고,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도 하나님 앞이고, 원수들의 표적이 되어 휘청거리고 있어도 변함없이 하나님 앞이다. 이게 다르다. 이것이 하나님 없는 사람들이 토해 내는 자기 울분과는 차원이 다른 이유다.

생각해 보면, 더 놀라는 것은 자신의 총체적인 무너짐에서도 원수와의 일전(一戰)이 실패로 돌아가는 것만큼은 용납할 수 없다는 고백이다(4). 자신의 무너짐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소박함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때문에 그는 이런 영적 전쟁을 읽어내는 힘이 약화되지 않기 위해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3a)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삶의 실전은 이렇듯 늘 두려움과 근심의 연속이다. 그러나 이러고만 있을 수는 없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그분의 품안에 있는 자녀이기 때문이다.

   

 

기뻐하리이다(5-6)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찬송가 4121)

 

한 바탕 하나님 앞에서 눈물 콧물을 토해내고 나면 다음 두 가지로 영적 균형을 다시 잡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의 후반전이다. 첫째는, 자신의 한계를 훌훌 털고 일어난다. 그리고서 하나님을 다시 바라본다. 둘째는, 육체의 한계를 넘나든 자신을 보며 통곡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으신 하나님을 보며 기쁨과 찬송을 다시금 토해 낸다. 자신은 절망이지만 하나님은 소망인 것을 알고 믿어서다. 이렇듯 성도에게는 결코 절망이란 없다. 하나님을 믿는 것만큼이 이와같은 절대절망의 자리에서마저도 무너지지 않고 다시 절대희망의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절망의 시대 속에서도 희망의 출구를 하늘로 삼고 살아가는 이유다.

이것이 전혀 상황이 바뀌지 않았어도 하나님 안에서 맛볼 수 있는 인생후반전이라는 기쁨과 찬송의 비밀이자 이유다. 자신을 보면 절망이지만 하나님을 보면 희망이니까. 이것이 다윗의 영성이다. 따라서 이 부분이 우리 역시 다윗이 될 수 있는 거역할 수 없는 희망이 자리하는 대목이다.

생각해 보면 달라진 것은 환경이나 상황이 아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서 있다 하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그대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마음과 생각의 방향이다. 이것이 자신을 둘러싼 상황을 읽어내고 이해해 낼 수 있도록 그의 내면세계를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열어주기 때문이다. 이로써 마침내 인생전반전 두렵건대”(3-4)가 끝이 나고, “기뻐하리이다”(5)는 인생후반전으로 새롭게 역전되는 순간이다. 지금 다윗이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들에게 주고자 하는 선물이 바로 이것이다.

 

[예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찬송가 작사 작곡가인 미국의 선교사, 파니 제인 크로스비(Fanny Jane Crosby, 1820-1915)를 소개하면서 오늘 말씀을 적용한다.

크로스비는 1820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다. 크로스비의 부모는 매우 건강한 청교도 집안의 사람이었다. 한편 크로스비는 태어난지 6주째에 눈병을 앓게 되었는데, 그 당시에 마을의사는 다른 곳에 가고 없어서, 크로스비의 부모가 다급한 나머지 정식교육을 받지 않고 자신이 의사라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크로스비의 눈병 치료를 부탁한다. 하지만 그 의사의 실수로 심한 각막 손상을 입은 크로스비는 시력을 잃고 실명이 되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한 살에 되던 해에 그녀를 사랑하던 아버지도 세상을 떠난다. 생활이 어려운 어머니는 다른 지역에 파출부 일을 나가게 되고, 그녀의 할머니가 어린 손녀를 돌본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할머니는 매일같이 성경을 읽어주고, 어린 손녀를 위해 기도한다. 이렇게 해서 크로스비는 할머니의 신앙교육에 많은 은혜를 경험하게 된다. 그런데 크로스비가 11살 때 그렇게 믿고 의지하던 할머니마져 세상을 떠나고 만다.

한편 크로스비는, 12살에 뉴욕맹아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어 정식교육을 받는다. 하나님의 은혜로 38살 때에, 비록 앞을 보지 못하지만, 좋은 배우자를 만나서 결혼을 하고, 어렵게 아이를 낳았으나 안타깝게도 태어나자 마자 아이는 죽게 된다.

이처럼 그녀의 인생은 계속되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이 고난의 인생, 광야와 같은 인생길에서도 그녀는 절대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살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렇게 고백한다: “감사의 조건들은 아주 많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감사할 수 있습니다. 결코 슬퍼하거나 낙심하지 마세요. 당신을 위한 아침이 밝을 것입니다. 당신은 머지않아 빛 가운데 하나님과 함께 할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고 위대한 고백인가까? 그녀는 평생 이처럼 불평 대신 감사를 드렸고, 급기야 이 고난과 고통의 생애 가운데 체험한 놀라운 은혜를 찬송시에 담아낸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사랑한다는 말일세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 주 참 능력의 주시로다

 

이 외에도 약 9,000편의 찬송시를 지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산 것을 경험한 인생의 고백을 간증한 것이다. 그렇다. 크로스비는 고난과 역경과 아픔을 지나, 하나님을 찬송하는 시를 지어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많은 감동과 은혜를 전하고 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이 가장 복된 인생인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부스러기 묵상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7.22-25)

 

구약의 다윗에게서 신약의 바울을 본다.

동시에 사도 바울에게서 위대한 왕 다윗을 본다. 다윗만 휘청거린 게 아니다. 위대한 사도, 그 역시도 지금 로마서를 기록하고 있는 바로 그 시간에, 이렇듯 하나님께 감동되어 붙들려 있는 계시의 통로가 되어 있는 그 순간에도 바울은 자신 안에 두 법이 서로 싸우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 얼마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역설인가. 이렇듯 성경의 위대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다 연약한,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으로 흔들리곤 했다. 이 어찌 성경의 사람들만이겠는가. 그렇다면 우리들은 더하지 않겠는가.

배 안에 있어도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것은 같다. 바람이 불면 아무리 큰 배 안에 들어가 앉아 있어도 흔들리는 배와 함께 흔들릴 수 밖에 없다. 그렇다. 그리스도 안에 있어도 흔들리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최대 역설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인가. “그래, 예수를 믿어도 세상과 뭐 다를 게 있는가?”라는 비난을 듣는 것만으로 휘청거리고야 마는 우리의 흔들림은 이처럼 그리 값싼 것이란 말인가.

시인은 지금 이 질문에 대해서 한 차원 높은 해답을 제시한다. 고통과 고난의 파도 앞에 보인 전반전의 반응은 누구든 비슷하다(1-4). 그러나 시인이,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고 사는 자들이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원수들의 도전을 역전시키는 후반전의 모습이다(5-6). 참으로 통쾌한 역전승(逆轉勝)이다. 이 아름다운 열매는 누구의 것인가. 그것은 원수들의 참소와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참고 견딤으로써 사태를 역전시킬 수 있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들의 몫이다.

주님은 지금 이 이야기를 우리의 인생에도 허락하고 싶어 하신다. 문제는 자신이다. 우리 모두는 다 인생 전반전의 아슬아슬한 위기를 넘어, 이젠 인생 후반전의 역전을 온 몸으로 갈망하며 살아간다. 그럴수록 문제는 작아지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커진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래서 다윗처럼 끝까지 우리도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5a)기로 결정한다. 오늘은 이 조그마한 결정을 주님께 드린다. 비록 여전히 어느 때까지를 통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니며 흔들리고 있을지라도 말이다. 꽃은 흔들리며 핀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 인생도 그러하다.

파도타기 선수는 보드를 들고 태산 같이 일렁이는 바다를 향할 때 가슴이 뛴다. 그런데 만일 바다가 잔잔하면 어떻겠는가. 곧 실망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네 신앙의 여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책상이나 온실에서 자라는 게 아니라면 비바람과 태풍과 강렬한 태양은 오히려 그 속에서 이 모든 한계상황을 이기며 성장하는 나무로 자라나게 한다.

인생 역시 흔들리면서 피는 꽃과 같다. 우리가 진정 파도타기 초보자가 아니라 인생이라는 레이스를 달리는 선수라면 파도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꽃으로 피어 영광의 열매를 맺는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세워지기를 원한다면 흔들리며 피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비록 힘들고 생사를 오가는 혈투를 치러야 하겠으나 정면으로 대면해 보는 것, 이것이 파도 앞에 서는, 흔들림 앞에 서는, 원수 앞에 서는 성도의 태도요 모습이다. 이것이 다윗에게서 배우는 인생후반전을 성공적으로 살아내어야 하는 자에게 필요한 복음이다

꽃은 흔들리면서 핀다. 성도 역시 이 세상이라는 바람에 흔들리면서 피는 꽃이다. 하지만 흔들림으로 끝인가. 아니다. 주께 드릴 열매 가득 안고 주 앞에 서게 하실 때까지, 후반전이 아직 남았다. 오늘이라는 나그네 인생후반전을 다윗처럼 드려보자

 

 *최종 수정(2022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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