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부를 노래, 준비중입니다(시 9.1-20).

20230618(양무리교회)

 

 

 

내가 부를 노래, 준비중입니다.

Ps. 9.1-20

 

    본문 관찰

    

    나(1-4)

       이방 나라들(5-8)

    너희(9-12)

    나(13-14)

       이방 나라들(15-17)

    너희(18)

       이방 나라들(19-20)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다윗(‘’)과 원수들(‘이방 나라들’)로 지칭하는 자들 사이의 영적 전쟁이다.

이 싸움은 다윗이 악인(원수)들에게 겹겹이 쌓여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 전쟁은 다윗의 승리로 끝이 난다(1-4). 다윗의 능력에서 된 일인가 싶은데 그게 아니다. 하나님 때문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이 노래가 곧바로 너희’(9-12,18)의 찬양과 기도가 되기를 소망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음이다. 이처럼 다윗은 자신만의 독주(Solo)가 아닌 너희이스라엘 온 백성과 함께 이중주(Duet)로 부르고 싶어한다. 이는 다윗, 자신 한 사람에게만 하나님의 일하심을 독점하지 않으려는 다윗의 또 다른 아름다움이다.

 

 

다윗, 감사와 찬송의 노래

 

감사와 찬송으로 다윗의 노래가 시작된다(1-2). 하지만 감사와 기쁨의 노래(1-2)가 있기까지 다윗은 원수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3). 여기서 놀라운 것은 이것이다. 다름 아니라 다윗이 노래하는 감사와 찬송의 시작점이다. 그것은 원수들’(이방 나라들)이다. 그렇다면 비록 오늘은 1-4절처럼 찬양이지만, 그러나 어제는 5-8절처럼 원수들이 물러가기 전에라는 생사(生死)의 갈림길이었다는 것 아닌가.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런데 바로 거기에서, 과연 누가 승리를 만들었다고 찬송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감사와 찬양으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원수들이 물러갈 때’(3a), 바로 거기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원수들이 물러가는 거기에서, 놀랍게도 기쁨과 감사의 찬송이 터져 나온다. 우리들의 인생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먼저는 다윗처럼 절망과 전쟁과 위기라는 무대에 서게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때 승리라는 결과만을 놓고 보자면 찬양과 감사가 이어지는 것은 특별하지 않고, 그래서 쉬워 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러나 이것이 희망의 출구가 아니라, 오히려 절망의 입구라는 원수들 앞에서라고 한다면 결코 만만하다 할 수 없는 대목이다.

다윗은 칙칙한 어제의 고통을 극복하고서 승리의 찬가를 부를 수 있게 된 이유를 다름 아닌 하나님에게서 찾는다. 평범하고 늘 반복적으로 노래되는 후렴구처럼이지만 그러나 이 고백은 진리이고 믿음이다. 하나님 쪽으로 걷는 사람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다윗의 손을 들어주셨고, 마침내 원수들은 망하여 물러갔다(3). 다 공의로운 하나님의 심판 때문이다(4). 이것이 다윗의 찬송이 만들어지고 고백되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하게 심기어진 하나님의 씨앗이다.

어제의 은혜에 대한 오늘의 감사, 그것으로 끝인가. 아니다. 다윗은 거기서 다시 하나님을 바라본다. 계속되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다윗의 반응은 이 일을 이루신 주님을 전하고, 자신은 기쁨을 따라 살아갈 것을 찬양에 담아 주께 고백으로 드린다. 더 놀라운 것은 이것이 온 이스라엘 백성들 너희’(11-12)의 것이 되고, 이어서 바로 그 너희’(9-12,18)와 더불어 함께 찬양하기를 소망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윗은 감사와 찬송이 나 한 사람에게만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럼 무엇인가. 나에게서 온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너희에게로 흘러가기를 원한 것이다.

 

 

이방 나라들, 멸망과 심판의 노래

 

하지만 원수들은 다윗의 노래처럼 되는 것이 얼마나 싫고 또 미웠을까. 때문에 다윗으로 하여금 실패와 좌절의 노래를 부르게 하려고 몸부림쳤다. 그러나 원수들의 발버둥침이 오히려 자신들이 심판을 받게 되는 부메랑이 될 것까지는 알 수 없었다. 이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절묘함이다. 이방 나라들은 선()을 악()으로 바꾸려고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들의 악()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진다.”는 말처럼 자신이 실패하는 것을 빤히 알면서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는 처지, 이게 원수들에게 딱 맞는 그림이다(15). 한 때는 기고만장(氣高萬丈)했겠지만 그 마지막 결과는 이렇듯 참담하다. 심판의 대상이기 때문이다(7-8,16,19). 이로써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잘 모른 채 덤벼들었던 원수의 결말이 백일하에 드러난 셈이다. 그는 뛰어봤자 벼룩에 불과한 인생이다(20). 문제는,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멸망하고 난 이후에, 이렇듯 돌이킬 수 없는 수업료를 지불한 후에야 비로소 심판 아래 처한 인생인 것을 알게 된다는 점이다(20).

 

 

부스러기 묵상

 

     [이스라엘 백성, 너희](9-12,18)

     ■압제를 당하는 자(억압받는 사람들, 9)

     ■환난(어려움, 9)

     ■주의 이름을 아는 자(10)

     ■주를 찾는 자들(주님께 오는 자들, 10)

     ■가난한 자들(고통당하는 자들, 12,18)

     ■궁핍한 자(가난한 자들, 18)

 

이 노래의 절묘함은 바로 너희로 칭해지는 자들이다.

동시에 이 너희를 향한 다윗의 마음이자 자세다. 다윗은 자신의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이스라엘 백성 너희를 바라본다. 이게 은혜의 사람으로서의 다윗 됨이다. 이런 절박한 형편에서도 너희가 보이고, 그래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함께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앞으로 나아간다. 이 또한 다윗의 강점이다. 다윗의 하나님은 지금도 압제와 환난 가운데 영육(靈肉) 간에 가난한 자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낭떠러지에서 주의 이름을 알고 또 찾는 자들을 만나주시는 분이시다.

믿음의 세계에서도 독불장군(獨不將軍)은 없다. ‘나 홀로는 아니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아픔이 보이고, 그래서 나만의 하나님이 아닌 우리들의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이 복되다. 이것이 너희편’(9-12,18)이 갖는 희망이자 절묘함이다.

나에게도 다윗처럼 너희를 목마름으로 품고 함께 가고 있는지 긴 호흡으로 품어본다. 너희를 찬양의 자리에 초대해 내는 다윗에게서 다른 사람을 향한 섬김과 사랑을 배운다. 우는 자들로 함께 울고, 웃는 자들로 함께 웃을 수 있는 사람의 아름다움이 이것이다. 다윗()의 자리에서 너희를 품는 것도 아름답지만, 다윗 같은 사람 때문에 비로소 고통을 끊고 승리의 자리에 서 있는 너희’, 나 다윗과 너희 이스라엘, 이 둘 모두 다 우리가 꿈꾸는 모습이다.

이처럼 나를 통해 다른 사람이, 다른 사람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의 은혜의 날개 안에 있다는 건 빼앗길 수 없는 축복이다. (다윗)의 자리에서 너희를 만나고, 너희의 자리에서 다윗처럼 섬겨주는 자를 만나는 것, 그렇게만 된다면 시편 9편 역시 우리가 부를 노래가 되는 것이다. 나도 양무리와 함께, 양무리 모두도 목회자와 함께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그런 교회를 이루어 가고 있음이 복되다. 오늘도 천상에 울려 퍼질 나와 네가 함께 부르는 노래, 지금 여기서, 우리의 삶으로 연주하며 준비하게 하신 주님을 찬양한다. 시작되는 한 주간도 이 노래를 서로 부르며, 부르심의 자리를 지켜가고, 증인의 삶을 살아가기를 축복한다.

 

분명 다윗의 출발점은 원수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리에 서 있다. 이를 자신의 능력으로, 그러니까 자화자찬(自畵自讚)의 멜로디로 만든 노래인가. 아니다. 그럼 무엇인가. 하나님이 원수들을 심판하셨다는 분명한 고백이고 찬양이다.

[1] 하나님이 하셨는지를 알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하셨다고 거짓을 말하는 것은 위험하다.

[2] 또한 하나님이 하셨음에도 이를 알고 보고 믿지 못하여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더 위험하다.

[3] 같은 맥락에서, 또한 하나님이 하셨음에도 이를 믿지 못하니까 결국 자신이 했다고 말하는 것은 더욱 위험하다.

[4] 그러나 무엇보다 더 크고 위험한 것은 하나님이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신의 영광으로 취하는 하나님에 대한 모독은 정말 위험한 교만이고 죄악이다.

그래서 다윗처럼 비록 원수들(악인들)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을지라도 하나님 안에서 이 위기를 깨어 넘어서는 신앙이 중요하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지 때때로 생사의 문에서 일으켜 주신 하나님을 우리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만나고 경험하고 통과해 가는 노정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아서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때가 있을까. 없다. 그러니 오늘 다윗처럼 흔들리면서도 평범함과 찬양의 자리를 지켜가는 것이 곧 위대한 신앙이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내 삶에 들어있는 하나님을 볼 수 있고, 또한 이 하나님을 노래할 수 있는 자로 우리를 부르셨다. 인생의 순간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진정한 노래를 준비하는 과정이다. 우리가 지금 연주하는 인생은 주께 드릴 노래를 준비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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