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다윗, 그러나 하나님이여!(시 3.1-8)

   20200503(묵상)

  

 

 

아버지 다윗, 하지만 하나님이여!

Ps. 3.1-8

  

   본문 관찰

 

   대적

   다윗

   하나님

  

 

부자전쟁(父子戰爭): 압살롬을 향한 애가(哀歌)

 

    사무엘하 13.23-18.33절이 전하는 압살롬

    [압살롬의 난(13.23-39)]: 다말/2암논 죽음(29) 압살롬 도망

    요압의 중재 3년 후/예루살렘 귀가(14.1-33) 4년 후/A

    A 압살롬의 난(15.1-12): 반역

        B 예루살렘을 떠나 도피하는 다윗(15.13-23)

            X 다윗의 신앙(15.24-37)

        x1 시바 vs 시므이(16.1-14)

        x2 후새 vs 아히도벨(16.15-17.23)

    A' 압살롬의 죽음(17.24-18.33)

        B'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다윗(19.1-15)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망명 길에 오른 아버지 다윗을 생각한다.

그런데 사무엘하가 전하는 압살롬과 다윗 이야기에 의하면 암논이 다말을 범한 지 2년 후에 압살롬에 의해 암논이 죽고(13.23),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을 피하여 망명한 지 3년이 지난 후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13.38). 그리고 다시 4년이 지난 후 아들 압살롬은 왕권을 찬탈한다(15.7). 이런 배경 하에서 볼 때 다윗의 통치 기반은 사무엘하 11장을 기점으로 점차 무력해지고 있다는 것을 주목하게 된다.

시편 3편은 이런 배경 하에서 다윗이 무너지고 있는 한 장면이다(위 구조 B). 바로 이러한 때에 다윗은 자신을, 그리고 자신을 무너뜨리기 위해 덤벼드는 대적을, 동시에 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며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각각 어떻게 인식하고 있고, 또한 이를 어떤 신앙고백에 담아 토해내고 있는 것일까. 이점이 묵상의 창에 비춰보고자 하는 긴장감 넘치는 그림이다.

 

 

대적 vs 다윗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2b)

 

다윗은 많은 사람’(천만인, 2a,6)에게 생명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그들은 다름 아닌 대적이자 다윗을 치는 자들이다(1). 또한 원수이자 악인이다(7). 더 놀라운 것은 그 핵심부에 다름 아닌 아들 압살롬이 자리하고 있다(표제어). 다윗이 어떻게 이런 일에 휩싸이게 되었을까. ()은 내부에 있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들이 아버지를 칼로 꺾어버리겠다니, 이건 아니다. 어쩌다가 다윗가문이 이렇게 되어 버렸다는 말인가.

한편 다윗언약(삼하7.1-17)을 떠올려 보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영원할 것을 언약하신 나라이며, 더욱이나 이방과 달리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17.15a)라는 율법을 따르는 나라라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압살롬은 하나님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겠다고 아우성치고 있다. 하나님께로서가 아닌 자기 스스로 왕관을 쓴 것이다. 이건 하나님에 대한 항명이자 반역이다.

이렇듯 압살롬은 하나님을 향해 정면으로 반역을 선언하고 움직인다: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2b) 다윗도 하나님을, 하나님도 다윗을 떠났다는 것이다. , 다윗은 끝났다는 얘기다. 하나님을 가장 잘 보여주고 증거했던 다윗이지 않은가. 그런데 압살롬은 다윗과 하나님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참으로 놀라운 교만의 극치다. 이렇듯 원수(악인, 대적) 편에 선 아들은 자기 목적을 위해서는 하나님까지 들먹이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우리 안에도 종종 원수의 참소가 반복되곤 한다: “OOO 너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내 죄와 연약함을 틈타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7.23) 형국이 그것이다. 지금 다윗의 형편이 그렇다. 어찌된 게 아들과 진검승부를 벌여야 하다니, 세상에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때문에 이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토해 내는 다윗의 고백이 애처롭기만 하다. 과연 여기서 무너질 것인가. 아니면 일어날 것인가.

한편 다윗은 아버지(부모)로서 자기 자녀들이 보여주는 여러 일그러진 언행과 사건을 돌림노래처럼 겪으면서도 부모로서의 역할을 보여주는 흔적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이게 당혹스러운 대목이다(삼하13.20-22,30-39, 왕상1.6 참조). 지금도 그렇다. 그는 아들의 모반(반란)을 피해 예루살렘을 떠나는 중이다. 그럼에도 아들의 반역 전후사(前後事)를 읽어보면 단지 아들의 생사(生死)에 관련된 소식에만 관심이 집중될 뿐 이러타할 부모(아비)로서의 고민과 자기 반성, 혹은 부자(父子)로서 왕권을 놓고 이렇게 충돌하는,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세우신 다윗왕권’(삼하7.1-17, 다윗언약 참조)을 사람이 무너뜨리는 희대의 사건을 놓고도 다윗은 이 일을 저지른 아들에 대해 하나님의 시각에서 일언반구(一言半句)의 언급조차 없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렇듯 '부모는 자식의 죄와 허물에 대한 지적을 직설적으로 요구하고 기대할 수 없는 것인가'이다. 예를 들어보자. 자식이 교회를 방학하고 쉬고 있을 때, 주일예배만 효도와 가정의 평화를 위해 의무적으로 드리는 것만 하고 있을 때, 하나님과 교회와 말씀 중심이 아니라 세상과 돈과 즐기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살아갈 때 부모는 하나님, 우리 OO가 정신 차리게 해 주세요. 다시 믿음을 회복하게 해 주세요. 하나님과 교회와 예배를 사랑하는 첫 신앙을 회복하게 해 주세요.”라는 수준에서 기도한다.

다윗도 그렇다. 자신과 하나님을 향한 탄원과 간구가 거의 전부다. 오직 원수들에게는 이 한 줄 기도가 전부다(7b): “나의 모든 원수들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이게 아버지다. 자식을 향한 일반적인 총론은 있는데 그의 죄와 허물과 불신앙에 대한 세밀하고 구체적인 각론이 없다. 시편에 생각보다 자주 등장하는 원수들에 대한 저주시에 비하면 아들 압살롬을 향해서는 오히려 너그럽고 관대하다. 어쩌면 잠언 기자의 메시지처럼 따끔한 회초리로 다루지 않아서 그의 가정이 만신창이가 되어 몰락한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렇다면 왜 그런가. 이것은 부모가 영적 주도권을 잃어서다. 젊을 때는, 그러니까 자녀가 어릴 때는 늘 전쟁터(사업, 직장, 회사)에 있었고, 왕으로서 나라를 다스리기 바빴다. 그러다가 자녀가 성장하고 어른이 되었을 때는 자녀는 이미 자기 의지와 야망의 지배를 받으며, 아버지의 주도권으로부터 서서히 밀려가고 있다. 그러니 오늘 시편 3편처럼 자식 때문에 피눈물 흘리는 것 아니겠는가.

  

 

다윗 vs 하나님

 

    “구원(승리)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8a)

 

그는 밧세바를 통해 휘청거리며 추락하더니, 이번에는 아들에 의해 무참하게 무너진다. 하지만 이 일 앞에 누구를 원망하거나,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 나머지 울분을 폭발하는 식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이점에 있어 다윗은 자신을 조절(절제, 통제)하면서 문제를 바라보고, 그러면서 이것을 해결해 가는 방식을 택한다.

다윗은 자신은 무너지지만,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하나님은 더 견고하게 붙든다. 보통 이처럼 외풍이 불면 내전(內戰)에서 그만 먼저, 그것도 일지감지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 면에서 다윗은 자신의 약함과 무능함, 그러니까 자기의 죄()에 휩쓸려서 자포자기(自暴自棄)하거나, 또는 일단 금이 간 그릇이다 싶어 될 대로 되라는 식의 반응을 보이기 쉬운 쪽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모든 것이 무너진 것처럼 보이는 참담한 상황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붙드는, 하나님께 호소하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답을 구하는 쪽으로 해답을 찾는다. 이점이 다윗의 최대 강점이다. 보통의 경우는 이 정도면 자멸한다. 인간적인 바닥이 보이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단 불부터 끄는 식으로 문제를 풀어갈 수 있다. 하지만 다윗은 달랐다.

어찌 보면 3장의 결과는 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다. 밧세바 사건 때문이다. 그럼에도 뻔뻔스러울 정도로 하나님 앞에 선다. 비록 자신의 죄가 가지고 온 결과일지라도, 그 결과마저도 하나님의 도우심과 간섭하심, 그리고 그분이 진행하시는 섭리라는 관점에서 문제를 직시한다. 때문에 그는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고, 하나님 없이 자신의 해법을 동원하는 식으로 문제 앞에 서는 일을 아예 처음부터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보통은 우선 창피하고, 부끄럽고, 할 수만 있으면 가리고 싶은 못난 치부가 백일하에 드러났으니 일단 일부터 수습해 보는 식으로 접근한다. 물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말이다. 그것도 감쪽같이, 또 비밀스럽게... 하지만 다윗은 말하자면 구정물을 다 뒤집어쓴다. 바보가 되고, 죄인이 되고, 손가락질을 받는 처량한 신세가 되는 것을 감수한다. 하나님이 그려가는 그림을 교묘한 방법으로 합성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도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근본적인 신앙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 그가 바로 다윗이다.

무너진 것은 자신의 죄() 때문이지만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의()와 도우심임을 확신하는 다윗에게서, 문제 앞에 어떤 태도와 모습으로 서야 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오늘의 다윗은 무능하기 짝이 없다. 사자와 곰의 수염을 잡고 아버지의 양을 지키던, 거대한 골리앗 앞에서 표호(豹虎) 하던 전성기의 다윗이 아니다. 오히려 위대한 거인의 참담한 몰락 드라마인데, 그럼에도 다윗에게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아무리 바닥으로 추락한다 해도 결코 놓칠 수 없는, 바로 그것이 다름 아닌 하나님이다. 어쩜 이게 가장 정직한 다윗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가정이 무너지고, 자식이 죽어나가고, 그러면서 영적 주도권이 무너져내려도 자식을 향해서는 뭐 하나 할 수 있는 게 없다. 못한다. 그러니 어찌보면 하나님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처분에 맡긴다. 잘하는 일 같지만 어딘가 좀 뭔가 부족함을 느낀다. 아버지는 아들 압살롬과 싸우지 않는다. 그와 정면승부하지 않는다. 부모는 성인이 된 자식과 싸우지 않는다. 특별히 신앙과 관련해서는 그렇다. 이것이 시편 3편에 그려진 다윗의 모습이고, 결국 우리 부모들의 모습이다.

 

 

      

 

부스러기 묵상

 

다윗은 자녀들이 십계명을 넘나들며 무너지고 있다.

하지만 다윗은 가정(가족)의 몰락 앞에서 어찌 이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무기력하다. 더욱 이 점이 성경에 그려진 다윗의 모습과 조금은 다른 것이기에 좀 더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물론 다윗이라고 자녀들을 반드시 잘 길러야 하고, 그에게서는 선한 자녀만 나와야 한다는 법은 없다. 하지만 다윗 정도라면 이 기대를 할 만 하기에 이 대목에서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닌가 싶다.

사실은 다윗을 탓하고 있기에는 우리 역시 부모로서 자식들에게 너무 무기력한 것은 아닌가 싶다. 어렸을 때였을수록 강하고 담대하게 교훈하고, 회초리도 들고, 요구하고, 명령하고 그랬다. 그런데 그 자식이 크고 성장하고 어린이 될수록 이제 저도 성인이고, 아들과 딸의 아버지인데 알아서 하겠지!” 그러면서 말이다. 이렇게 밀리고, 저렇게 영적으로 분명히 요구하고 가르쳐야 할 복음을 차지도 뜨겁지도 않게 하니까 점점 자식들의 영적 상태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자세가 무디어지고 약해지고, 그러면서 구속한 주는 간 곳 없고 세상과 나만 보이도다.”로 흘러가는 것 아니겠는가.

엘리는 제사장인 두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동침함을 듣고”(삼상2.22)도 이렇게 이야기할 뿐이다: “내 아들들아 그리하지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죄하게 하는도다.”(삼상2.24)

아버지로서의 다윗은 엘리와 다를 바 없다. 이것이 그의 가정이 어쩌면 불행한 이유이기도 하다. 다윗에게는 가족언어가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가족, 가정, 자녀, 부모, 형제, 집 등 가정(家庭)과 가족(家族)을 묵상해 내는 표현들을 찾기가 어렵다는 얘기다. 그 이유가 뭘까? 다윗을 읽어갈 때마다 이게 좀 궁금하다. 오늘 시편 3편도 아들과의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넌, 그러니까 아들이 아버지의 왕좌를 찬탈한 반역이 일어난 일을 겪는 부자(父子)의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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