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아름다와라!(시 8.1-9)

20200508(묵상)

  

 

 

참 아름다와라!

Ps. 8.1-9

  

   본문 관찰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내가 보오니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사람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1a,9)

 

다윗의 영혼이 맑고도 밝아 보인다.

그는 지금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의 세계를 찬양하는 자의 자리에서 바라보고 있다. 그 옛날 태초에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전,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도 하지 못했던 영감 넘치는 천지창조에 대한 찬양이 아닌가. 더 놀라는 것은 우리가 늘 일상에서 만나며 보는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의 주(Lord) 되심과 조물주(造物主) 되심을 읽어내고 있음이다. 말씀과 기도와 찬양, 그리고 이것이 하나로 연결되는 예배에서도 하나님을 그리 바라보기 어려운 때에 자연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숨결과 영광을 보고 찬양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다윗에게서 확실하게 배워야 할 영성이지 싶다.

   

 

창조의 하나님, 찬양합니다!

 

하늘과 달과 별을 보며 하나님이 만드셨음을 고백하는 사람(3), 그리고 그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1), 피조물의 자리에서 창조주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4-5), 창조된 세상을 향한 인간의 책임과 소명을 붙들 수 있는 사람(6), 하늘과 땅과 바다 모두를 하나님의 시각으로 품을 구 있는 사람(7-8), 그가 바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다. 다윗은 지금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하나님을 바라본다.

하나님을 자연계시의 빛 안에서도 이처럼 위대하게 찬양할 수 있는 다윗에게서 신앙의 거장다운 면모를 본다. 평범한 듯 보이지만, 어떤 면에서 자신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이랄 수 있는 것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호흡할 수 있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은 영성임에 틀림없다. 이것이 주의 이름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1,9) 안에서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하는 다윗의 아름다움이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무한하신 하나님 앞에 서 본 자만이 자신의 얼마나 초라하고 유한한 인간인가를 절감하게 된다. 다윗은 창조의 세상을 보는 것만으로 그분 앞에 무릎을 꿇는다. 지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과 연결하고 그 안에서 호흡하며,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또 자신을 아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피조물된 인간의 지극히 당연한 본분이다. 이런 점에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성도의 표상이다.

정말이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4) 이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다운 찬양의 제사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살아간다. 바로 2절의 못나고 어리석은 사람과, 늘 황송한 인생임을 고백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똑같은 눈, , 마음, 심령, 생각을 따라 하나님의 창조 세상 앞에 역시 동일하게 살아가고 있음에도 이처럼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일 수 있다는 것, 평범하지만 예사로이 넘기기에는 여전히 씁쓸하다.

다윗만이 아니다. 나 역시 “OOO이 무엇이기에 나를 생각하시며, 돌보시는지... 내가 무엇이기에 하나님(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는지, 이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할 인생인가를 알게 되었기에 다윗처럼 늘 내 분수를 알고 경거망동(輕擧妄動)하지 않기를 다시금 다짐해 본다. ,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이 세상을 살 충분한 이유 있음을 날마다 펼쳐지는 창조의 아침에 이처럼 주님께 고백한다.

   

 

부스러기 묵상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2a)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하게 하셨나이다.”(21.16)

 

시편 8편은 2절이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좀 어색하다.

만일 이런 생각이 옳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 역시 적절할 것이다: “다윗은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 사이의 절묘한 하모니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2절을 왜 찬양시에 넣었을까?” 그러나 이런 질문과 상관없이 이미 2절 아닌가? 그러므로 2절은 시편 8편이 말하려는 메시지와 다르지 않을 것이며, 좀 더 깊은 어떤 의미를 품고 있을 것이다. 때문에 왜라는 의문보다는 8편의 멜로디와 하모니를 이루는 악상(樂想)을 살려내는 쪽으로 묵상이 되어야 옳다.

다윗은 2절을 통해 말하려고 한 시상(詩想)은 무엇이었을까. 정확한 것은 이 다음에 천국에서 직접 물어봐야 하겠지만 일단 2절을 외톨이로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아름다운 하모니를 읽어내 보자. 한 가지 힌트는 예수님이 성전청결(21.12-17)과 성전에서 행하시는 기적을 보고 어린이들이 예수님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쳤다. 이를 본 대제사장들이 노하자 시편 82절을 인용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이 이루어지고 회복되는 것을 훼방하는 자들의 언행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드러내신다.

이 맥락을 시편 82절의 전후문맥과 연결시켜 보면 절묘한 해석학적 유사점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 하나님이 행하신 창조의 영광을 대적하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의 사악한 언행이 1절을 변주(變奏)하려 들고 있다. 예수님의 사역을 훼방하는 대제사장들처럼 말이다. 바로 이때 다윗은 하나님께서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2a)을 통해 온 땅을 뒤덮은 창조의 아름다움을 무너뜨리려는 원수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을 보고 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방해하는 대적(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케 하는 자는 누구인가? 놀랍게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이다. 이 부분이 시사하는 바, 이것이 묵상의 절묘함이다. 오늘도 나를 어린 아이의 입처럼 사용하시기를 구한다. 세상 곳곳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인들을 모독하는 일들이 자행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 억류되어 있는 23명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믿음의 기업 이랜드그룹을 향해 온갖 험담들을 인터넷이라는 커튼 뒤에 숨어 비겁하게 쏘다내고 있다.

이때 나에게 요청되는 것이 두 가지다. 하나는 창조 세상의 영광이 계속되도록 해야 하고, 다른 하나는 어린 아이들의 입처럼 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증거가 되어야 한다. 전자는 후자를 더 위대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후자가 탄력을 받고 인정을 받으려면 전자가 유지되고 회복되도록 해야 한다. 이 사명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잊지 않아야겠다. 하나님은 어린 아이들을 통해서라도 당신의 영광이 하늘을 덮게 할 것이다. 나 역시 바로 그 어린 아이로 쓰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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