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어리석음보다 지혜가 희망이다(전 9.11-18).

  20221214(Eccl. 9.11-18)

  

 

 

그래도 어리석음보다 지혜가 희망이다.

  

 

    본문 관찰

 

    하나님 - 주권(11-12)

    인간 - 배은망덕(13-16)

    지혜가 어리석음보다 낫다(17-18).

 

 

불확실성의 시대

 

    “불행한 때와 재난은 누구에게나 닥친다.

      사람은, 그런 때가 언제 자기에게 닥칠지 알지 못한다.”(11b-12a, 표준새번역)

 

불의가 판을 치는 만큼 인생은 여전히 불확실하다(11-12).

인생은 역설이요, 부조리요, 미궁이다. 언제나 상식과 통념과 확률과 예측대로 결과가 맞아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다. 인생은 자기가 예상한 시나리오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무수한 변수와 예측불허(豫測不許)의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것이 인생이다. 빠르다고, 용사라고 언제나 이기는 것이 아니며,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해서 필요한 것을 얻는 것만이 아니다. 또한 배웠다고 잘 되는 것만도 아니다(11).

이런 조건들이 반드시 좋은 결과만을 만들어주지 못한다. 불행과 재난과 악한 때는 누구에게나, 그것도 갑자기 덮침으로써 피하지 못한다. 이것은 인간이 홀로 독립변수가 아니기에 그렇다. 인간사(人間事) 모두가 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 인생에는 무수한 변수들이 공존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이 있다.

 

 

가난한 지혜자가 멸시를 받는다(13-16).

 

하지만 세상에서는 여전히 지혜가 멸시를 당한다. 지혜자는 한 예를 통해서 이를 고발한다. 큰 왕이 작은 성을 공격해 왔는데 이때 가난한 지혜자가 이 성을 그 지혜로 건졌다. 그러나 누구도 그 가난한 사람을 오래 기억하지 못하였다(13-15). 솔로몬은 지금껏 지혜가 힘보다 낫다.”(16a)고 말해 왔지만,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는 것을 보면서 흔들리고 있다.

인간의 지혜라고 하는 것이 힘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무기력하다는 것을 경험하는 것은 비단 솔로몬만의 일은 아니다. 사실 인간은 지혜의 도움을 받으며 살면서도 지혜의 힘과 능력을 언제나 망각하며 사는 배은망덕(背恩忘德)한 근성을 가지고 있다. 지금 지혜자가 고발하는 것은 지혜의 허무함이라기 보다는 지혜를 필요에 따라 가까이했다가 멀리했다가 하는 인간의 변덕스러움이다.

인간은 지혜의 도움을 받아 살아감에도 문제가 해결된 이후에는, 그러니까 평상시에는 지혜의 부요함을 인정하거나 누리지 못한다. 이는 마치 가난한 지혜자를 오래 기억하지 못하고 전쟁의 승리를 따라 살아가는 작은 성읍의 사람들처럼 말이다. 하나님의 지혜와 세상의 방식 사이를 오가며 이쪽저쪽을 끊임없이 줄타기한다: “아무도 가난한 사람의 말에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16b, 표준새번역) 그것만큼 자기 방식대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지혜와 상관없이 살아가기에, 그래도 큰 불편을 느끼지 않기에, 별 어려움이 없기에 지혜는 기억으로부터 잊혀지고 멸시를 받는다. 이게 세상이다. 세상이 언제 진리의 소리를 듣고 거기에 가난한 지혜자처럼 반응한 적이 있는가. 마치 오병이어의 기적이 끝남과 동시에 생명의 떡이신 살아있는 진리의 곁을 떠나버린 무리들처럼 말이다(6.66).

 

 

부스러기 묵상

 

    “지혜가 보다 더 낫지만,

      죄인 하나가 많은 선한 것을 망칠 수 있다.”(16, 표준새번역)

 

그래도 희망은 지혜가 어리석음보다 낫다는데 있다(17-18).

어리석음이 지혜의 빛을 가려버릴지라도 아직 지혜의 빛은 유효하다. 우매자의 큰소리보다 지혜자의 조용한 말을 듣는 것이 더 낫다(15). 세상이 이렇듯 요지경일지라도 아직 지혜가 있기에, 그것만큼은 희망이다. 아무리 불의와 배은망덕이 판을 쳐도 지혜에 대한 기대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생()이다. 비록 세상에는 이 둘이 어쩔 수 없이 공존할지라도, 그러면서 어리석음이 지혜를 우습게 만드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지혜에 대한 소망을 버릴 수 없다. 지혜는 여전히 세상을 향한 변하지 않은 희망이다.

비록 가난한 지혜자의 지혜처럼 취급을 당할지라도 묵묵히 지혜 편에 서서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가는 자로 남고 싶다. 지혜가 오래 기억함을 얻지 못해도, 멸시를 받아도 상관없다. 그럴 때마다 내가 지혜로 더불어 살아가고 있음을 아무도 흔들 수 없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라면 그것 하나만으로도 만족하며 살아 보자. 지혜롭게 산다는 것은 이미 삶이 좀 불편하다는 것을 긍정하는 것 아닌가. 문제는 불편하고 익숙하지 않을 때에도 지혜를 따라 사는 법을 배우는 것 아닐까.

지혜자와 우매자가 어쩔 수 없이 공생(共生)하는 삶의 현장에서 불변하는 지혜를 변하는 세상에 뿌리며 사는 자, 그 이름이 성도요 교회라 생각한다. 이 지혜가 지혜되는 것을 가로막는 죄인의 모습을 직시하는 지혜자의 통찰을, 그래서 놓치지 않고 살아야겠다는 생각, 지혜와 죄를 연결하는 솔로몬의 영적 혜안(慧眼)이 내 안에도 지혜로 자리하기를 소망한다. 지혜가 힘을 잃고 무기력해지는 것은 죄 때문이다.

죄는 이렇듯 지혜의 심장까지를 노리는 무서운 파괴력이 있다. ‘사람의 본분’(12.13)을 망각하게 하고, 그것으로부터 분리되게 만드는 것이 죄()라는 점, 그러기에 죄를 이기고 지혜를 따라 살아가는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와 붙드심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 그만큼 나의 지혜 뒤에 계신 하나님의 은총을 노크한다. 지혜를 향한 끝없는 목마름이 다시 시작되는 것 같아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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