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은 무한을 다 파악할 수 없다(전 8.9-17).

  20221212(Eccl. 8.9-17)

  

 

 

유한은 무한을 다 파악할 수 없다.

  

 

    본문 관찰

 

    악행자(惡行者)를 바로잡지 못하면 불의가 득세한다(9-13).

    해 아래는 여전히 하나님의 섭리가 흐르고 있다(14-17).

 

 

악인과 의인, 그리고 섭리

 

해 아래서의 모순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무엇보다 악인의 득세가 그렇다. 하지만 승승장구(乘勝長驅)하는 것처럼 보이는 악인은 그의 마무리가 일그러진다. 그래서 악인이다. 그 이유가 밝혀지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본분을 다하며 사는 자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12). 한편 깨달을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는 그대로 남아있다: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리로다.”(17b)

 

 

악인 드라마(9-13)

 

    “사람이 사람을 주장하여 해롭게 하는”(9b)

    “악인은 장사지낸 바 되어 무덤에 들어가고”(10a)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11)

    “죄인이 백 번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12a)

        →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13a)

    “하나님 앞에 경외하지 아니함이라.”(13b)

        ↔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앞에서 경외하는 자가 잘 될 것이요.”(12b)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본분을 망각하는 것만큼 공의가 짖밟히는게 세상이다.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여 고통을 당하게 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나 보다(9). 그래서 해 아래의 그림을 볼 때마다 좀 씁쓸하다. 이처럼 악인으로 살다가 악인으로 죽는,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악인인 사람의 장례식과 그 이후가 역시 그렇다(10).

왜 이런 결과가 끝없이 반복될까?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악인들에게는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다. 악한 일에 징벌이 늦어지는 것이 징계가 없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더 담대하게 악을 행한다(11).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없기 때문에 자기들 마음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악인이다. 죄를 지어서 악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짖는다. 문제는 그럼에도 죄에 대한 감각이 없다는데 있다.

사실 죄인들이 잘 되고, 장수하는 것을 보면서 약간의 혼돈을 느끼는 게 사실이다. 세상에는 오히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잘 되고, 떵떵거리며 사는 경우가 비일비재(非一非再)하기 때문에 더 그렇다. 하지만 이것은 껍질이지 내용이나 본질이 아니다. 지금 전도자는 거기까지를 통찰하고 있다. 죄인이 100번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는 것은(12a) 결코 그가 잘 되고 있는 징조가 아니다.

전도자처럼 악인의 말로를 보고, 믿고, 느끼며 사는 자는 악인의 삶이라는 것이 그림자’(13)와 같음을 아는 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은 자로 살았기 때문이다. 비록 악행에 대한 인과응보(因果應報)가 늦어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선악간에 심판하심으로써 당신의 공의를 보존하신다. 어쩌면 11절은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을 오해한 죄인의 한심함에 더 가깝다.

사람의 본분인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결국은 모든 일이 다 잘되는 자로 승리하게 된다(12b).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다. 그것을 아는 만큼 죄인이 무수한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는 것을 볼지라도(12a) 흔들리지 않는 자이다. 세상이 아무리 혼돈스럽고 악인이 득세하는 것처럼 보여도 진리는 살아있다. 이처럼 악인 드라마는 역전된다.

 

 

하나님의 섭리 드라마(14-17)

 

    “악인의 행위대로 받는 의인이 있고

      의인의 행위대로 받는 악인도 있는 것이라.”(14)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음이라.”(15a)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사람이 능히 깨달을 수 없도다.”(17a)

 

여전히 해 아래의 세상은 요지경이다. 선과 악이 일정한 원리 없이 섞여있는 모순, 그러니까 악인이 받아야 할 벌을 의인이 받거나 의인이 받아야 할 보상을 악인이 받는 것이 그것이다(14). 이러한 혼돈스런 모순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1.18, 3.16, 4.1, 5.8, 6.2, 7.15, 9.11). 참으로 알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들이 수수께끼처럼 많은 것이 세상이다. 악과 악인이 득세하는 것, 그럼에도 이들의 종점은 13절이라는 사실을 아는 만큼 삶의 긴장을 늦추지 않는 것, 이것이 악으로 동화되어 악의 편에 서는 비극을 피할 수 있는 길이다. 비록 세상은 뒤죽박죽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질서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그렇다.

어쩌면 그러기에 전도자는 다시 하나님안에서 모순의 혼돈을 하나님의 주권의 섭리로 받아들이는 해법을 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악과 악인의 캄캄함이라는 시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허락 받은 한평생을 사는 동안에 인생을 즐거워하는 것을 권한다.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이기 때문이다(2.24-26, 3.13, 5.18-20). , 일하는 수고도 있지만 즐거운 것도 함께 있다. 이 둘의 조화와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악에 빠지지 않고 즐거운 인생을 사는 비결이다. 그렇다. 이 둘 사이에 일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16-17a).

솔로몬은 삶의 전부를 하나님 안에서 이해하고, 알게 되고, 살게 되기를 기대한다. 참으로 바르고 건강한 삶의 자세가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생이 어찌할 수 없는 아직 남아 있는 여백(餘白)을 솔직하게 인정한다.

이런저런 얘기들을 무수하게 해 왔지만, 그럼에도 자신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아무리 애써 궁구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함을 솔직하게 시인한다: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리로다.”(17b) 그는 자신의 지혜를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 아래에 놓음으로써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일하시는 영역을 훼손하지 않는다. 자신이 언행(言行)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님을 철저하게 시인한다. 이것은 자포자기(自暴自棄)이거나 어쩔 수 없다는 절망이 아니다.

 

 

부스러기 묵상

 

하나님은 불의와 악행을 반전시키시는 일에 왜 여유를 가지실까?(11,14)

악행을 바로잡지 않으면 불의가 자란다는 것을 아시면서 말이다. 그럴수록 자기 자신이 기준인 사람들은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을 반드시 자신으로 설정한다. 그러면서 악행에 점점 가속도를 붙인다. 마치 브레이크 없는 벤츠처럼.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없다. 마침내 그림자처럼 사라질 뿐이다(13). 이것 모르니까 죄악 가운데 살다가 장사 지낸 바 되어 무덤에 들어간다(10a). 이것으로 끝이다.

과연 악인들의 세상이다. 오늘을 살아가면서 역시 동일한 색깔과 모양을 본다. ()으로 가장한 악()이 있고, 악으로 선을 이기는 일은 상식처럼 되어 있고, 비틀어진 강자(强者)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은 여전하다. 힘이 논리요, 법이며, 권위이자, 틀린 것도 옳다며 그냥 밀어붙인다. 그러다가 힘이 없어 무너질 때에야 악이라 칭해진다. 과연 세상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여 버림으로써 불의와 불법에 이미 회생불능(回生不能) 상태다. 이제 무엇이 악이며 죄악이며 죄인됨인가를 결코 자각할 수 없는 불감증의 시대, 불확실성의 시대가 되어버렸다. 진정한 위기는 이처럼 이성이 죄악으로 오염되어 옳고 그름의 기준과 판단력을 잃어버렸다는데 있다.

그럼 헛되고 헛된 이 세상에서 무엇이 희망인가? 솔로몬의 지혜가 빛을 발하는 것은 이 어둡고 캄캄한 절망의 시대에 한줄기 희망의 빛을 향해 온 몸으로 몸부림치고 있다는 점이다. 죄는 절망이지만 하나님은 희망임을 아는 자로 당당하게 절망의 언덕에 서 있다. 이것이 악()으로 가득한 세상에 하나님을 드러내어 밝히는 전도자의 영성이다.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앞에서 경외하는 자가 잘될 것이요.”(12b)

    “이는 하나님 앞에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13b)

    “하나님이 사람으로 해 아래서 살게 하신 날 동안 .”(15b)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보니 .”(17a)

 

유한은 무한을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무한하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 알고, 누리고, 얻고, 행하고, 말하고, 증거할 수 있다. 헛된 수고뿐인 해 아래서의 삶에서 사람의 본분이라는 보화를 발견하려면 비록 이처럼 비틀거리는 세상일지라도 그 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당당하게 서는 길 밖에는 무슨 다른 방도가 없다. 길은 하나다. 악으로 가는 길을 따라 갈 것인가(9-13), 아니면 하나님께로 이르는 길을 갈 것인가(14-17).

하나님만이 희망이다. 다시금 어렵게 반전시킨 하나님께로의 길을 향해 전도자의 뒤를 따르기로 다짐해 본다. 죽음에 이르는 길에서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는 길로 인도하심을 받았다면 이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이 세상을 걸어갈 이유가 있다. 이왕이면 멋지게, 즐겁게 걸어가 보자. 이 길이 주님 앞서 가신 섭리의 길 아닌가. 걸을수록 편안하고 안전하다는 생각이 내 안을 채운다. 그것만큼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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