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더 나은 지혜로(智慧路)가 보인다1(전 7.1-7).

  20221209a(Eccl. 7.1-7)

  

 

 

보다 더 나은 지혜로(智慧路)가 보인다(1).

  

 

    본문 관찰

 

    …보다 나으니라.

       ① 초상집에 가는 것(1-4)

       ② 책망을 듣는 것(5-7)

 

 

더 나은 것들에의 지혜

 

받음은 있으나 누림은 얻지 못한 사람의 절망이 터져 나온다.

허무주의자(虛無主義者)의 탄식이다(6):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를 누가 알겠는가?(12) 이것이 해 아래서 또 한 가지 폐단임을 전도자는 통찰한다. 다시 5장의 분위기로 반전되는 구조가 연출된다. 허무로(虛無路)에 빼앗긴 전도서를 다시 보다 더 나음이라는 지혜로(智慧路)로 되찾아온다. 그럼 허무로부터의 탈출을 빛나게 할 지혜는 어떤 것들일까.

 

 

초상집에 가는 것(1-4)

 

인생은 허무를 노래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심령의 낙()을 누리게 하심을 따라 살다가 죽는 것, 그렇게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는 것이 더 낫다(1). 이렇듯 미래로 가는 길목인 죽는 날을 향해 낙을 누리며 걸어갈 때가 가장 행복하다. 생명을 얻는 출생하는 날도 중요하지만 영생을 누릴 죽는 날은 더 중요하다. 그래서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고, 어리석은 자의 마음은 잔치집에 있다(2,4). 죽음을 준비하는 자는 내 인생의 좌표가 어디인가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살핌으로써 결국 마음에 유익을 얻는다(3). 쉽게 웃고 즐기는 것은 역시 쉽게 곁을 따나는 법이다.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2b). 정말 맞는 말이다. 전도자는 지금 허무의 종점이 죽음이라는 식으로 비관하고 있지 않다. 죽음을 오히려 허무로부터 돌아설 수 있는 지혜의 표(sign)로 받아들이고 있다. 살아있는 날 동안을 헛된 것들로 소비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를 충고한다.

죽음이라는 주제 앞에 서고 보니 묘한 기분이다. 나 죽어 남기는 것이 보배로운 기름인들 그게 무슨 소용일까.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받아서 그것을 낙()삼아 누리며 살다가 생()을 마무리하는 자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남길 수 있는 그런 지혜자로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책망을 듣는 것(5-7)

 

    “탐욕은 지혜로운 사람을 어리석게 만들고,

      뇌물은 지혜로운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한다.”(7, 표준새번역)

 

6장과 비교할 수 없는 보다 더 나은 것 하나는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다(5). 해 아래서의 헛된 것이 무엇이며, 그것을 떠난 삶이 또한 무엇인가를 찾고 발견하려면 지혜자로부터 책망을 들어야 한다. 허망한 것을 좇고 있으면서도 어리석은 자의 노래를 듣고 있다면 그에게는 별 소망이 없다. 우매자의 소리는 가마솥 밑에서 가시나무 타는 소리처럼 요란하기만 할뿐이다(6).

사람은 종종 자기가 하고 있는 모든 것이 정도(正道)인가를 점검 받을 필요가 있다. 잘 받고 또 잘 누리고 있는가(6.2), 진짜 낙()이 무엇인지 알고 사는가(6:12), 죽음을 잘 준비하고 있는가(1-4), 나는 지혜로운 청취자인가(5), 이런 질문 앞에 설뿐만 아니라 말씀과 성령님께서 행하시는 책망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내 안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이 나의 삶을 책망하실 때 그 말씀하심 앞에 서는 것이 헛되고 헛된 해 아래서의 삶으로 추락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이다. 그래서 책망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2.7a,11a,17a,29, 3.6,13,22). 헛된 것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들은들 거기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는가. 내가 잘못하고 있고, 이러다가는 헛되고 추한 모습으로 전락할 것을 아시고 나에게 경고하시며, 책망하시겠다는데 감사할 뿐이다. 언제나 책망 받을 준비를 하고 살아야겠다.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나 또한 지혜자의 길을 걸을 수 있음 아닌가. 6장을 허무의 늪으로 몰아 넣은 주범 가운데 하나가 탐학(貪虐)과 뇌물이라는 점이 좀 더 묵상을 요구하는 듯 하다. ‘탐학이란 탐욕스럽고 포악한 강탈 행위를 뜻한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받음과 누림을 통해서 낙()을 얻으면 되는데(6) 그것에 탐학과 뇌물을 섞으니까 어리석게 되고, 그 마음이 병들게 되는 것이다(7).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가짜 지혜를 가지고 살고 있으니 해 아래서 헛된 사람의 편에 줄을 서게 되는 것 아닐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닌 탐욕과 뇌물을 통해서 정작 누려야 할 것을 망치고 있다면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부스러기 묵상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잔치집(연락하는 집)이나 기웃거리면서 우매자의 노래나 듣고 있다면 큰 일이다. 무엇이 진짜 슬픔인가를 아는 자로 살고 싶다(3). 순간적인 향기보다는 영원히 아름다운 이름을 위해 살아가야겠다. 잠시 만들어진 웃음보다는 불현듯 찾아온 영원을 향한 울음의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초상집이 헛되고 헛된 허무의 노래로부터 오히려 나를 지켜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혜자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의 축복을 잊지 말자(5). 그렇다면 주님처럼 가나의 잔치집에서도(2.1-11), 나사로의 초상집에서도(11.1- ) 공히 영적 균형을 잃지 않게 될 것이다. 주님과 함께라면 잔치집에서도 실족하지 않겠지. 결국 내가 어느 곳에 있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함께 있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과 함께 있지 못하고,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 누리지 못하는 나 홀로의 삶이라면 그게 헛되고 허무하고 허송세월(虛送歲月) 하는 것이 아니랴. 이런 영적 기초가 아니면 죽는 날을 생각하면 살아도, 초상집에 있어도, 책망을 들어도 결국에는 어리석음으로 망하게 되는 것이겠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는 것이 아닌 탐학과 뇌물을 통해 인생의 낙()을 누리려고 한다면 그것 역시 헛된 종국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아직 나에게 남아있는 허무로(虛無路)의 거짓 지도는 없는지 촘촘하게 살피는 중이다. 미로(迷路)일지라도, 비록 안개가 영적 시야를 가리고, 갑자기 장애물이 나타나는 위험이 있고, 좌우로 심하게 굽은 길을 지난다 할지라도 지혜로(智慧路)가 더 낫다. 이미 그 길을 달리고 있다면 다시는 헛된 길로 들어서지 말자. 허무로(虛無路)를 빠져나온 하루의 삶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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