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낙(樂)인지 알 수 없는 허무가(虛無街)에 서 있다(전 6.1-12).

  20221208(Eccl. 6.1-12)

  

 

 

무엇이 낙()인지 알 수 없는 허무가(虛無街)에 서 있다.

  

 

    본문 관찰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1-9).

       -재물, 명예, 자녀, 장수(1-6)

       -식욕, 가난한 자, 안목, 공상(7-9)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 누가 알겠는가?(10-12)

 

 

해 아래서의 허무

 

다시 해 아래서의 또 다른 헛된 것으로 주제가 돌아간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받아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답다(5.18-20)고 말한 전도자는, 그럼에도 받았으나누리나니가 각각 다르다는(1), 그러니까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것과 그것을 누리는 것이 함께 주어지지 않음이 해 아래서의 한 가지 폐단이라고 절망한다. 다시금 하나님 없는 인생의 허무(공허)함을 탄식하는 절망의 노래가 슬픈 곡조로 연주된다.

 

 

받음누림의 단절(1-9)

 

    “하나님께 받았으나 능히 누리게 하심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 이것도 헛되어.”(2)

    “그 심령에 낙이 족하지 못하고”(3)

    “낙을 누리지 못하면”(6)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9)

 

받음누림의 주제 안에서 인생 허무와 낙()의 단절을 통찰한다(1-2). 결국 받은 것이 허무한 이유는 누리는 낙이 함께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둘이 함께 공존하는 하나님의 선물’(5.18-20)의 빛깔이 아름답다. 하지만 이 둘이 단절되어 있을 때의 허무함이란 하나님께 받았으나로 끝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받음 그 이후에 하나님이 없다는데 있다. 그 결과 누리게 하심을 얻지 못하였으므로로 끝난다. 하나님은 이 둘을 공히 허락하심으로써 낙()을 누리게 하신다.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분복(分福)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5.19)

 

그래서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2a), 그리고 일백 자녀를 낳고(3a), 천 년의 갑절을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3a,6a) “그 심령에 낙이 족하지 못하고”(3a), 또한 낙을 누리지 못하면”(6a) 다 별수 없이 헛된 것일 뿐이다. 전도자의 탁월한 은유는 계속된다(7-9).

이런 사람들은, 그러니까 오직 받음에 목숨 걸고 사는 사람들은 채울 길 없는 식욕과 같은 욕망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7). 단지 자기 입의 수고라는 얻음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다. 즉 그에게는 누림은 없고 단지 얻기 위한 헛된 욕망을 추구하며, 역시 눈으로 보는 것에만 집착함으로써(9) 하나님께 받았으나 그것을 누리게 하는 낙()에로의 나아감은 실패하고 마는 불행한 소유자로 추락하고 마는 것이다.

받음은 곧바로 누림을 낳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 생각해 본다. 이 둘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선물이다. 이것의 진위의 기준은 심령에 낙()을 누리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이 세상의 욕망으로 바꾸어 버렸다면 그 안에 낙은 없다. 하나님께 받았다면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것이 인생의 본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균형이 깨지는 순간 위로부터 오는 낙()은 사라지고, 그래서 그것을 이 세상의 욕망으로부터 얻어보려고 발버둥치는 것 아닐까. 그것만큼 심령의 낙은 없고, 그러니 더욱 이 세상으로부터 그것을 어떤 수를 써서라도 만들어 보려고 하는 욕망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 누가 알며”(10-12)

 

    “그림자처럼 지나가는 짧고 덧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무엇이 좋을지를 누가 알겠는가?

      사람이 죽은 다음에,

      세상에서 일어날 일들을

      누가 그에게 말해 줄 수 있겠는가?”(12, 표준새번역)

 

해 아래서의 한 가지 폐단’(1)을 역전시키려고 다투어봐야 별 소용이 없다(10). 이럴수록 헛된 것을 더하는 허언(虛言)에 불과할 뿐이다(11). 이처럼 하나님과 분리되기 시작해버린 받음안에 있는 인간 욕망은 결코 누림이라는 낙()으로 흐르지 않는다. 그의 인생 이력서는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같이 보내는 일평생”(12a)일 뿐이다. 참으로 비극이 아닌가. 그런데도 받아보고, 얻어보고, 채워보려고 얼마나 많은 헛된 수고로 귀중한 그 많은 무엇들을 소일하는가.

결국 받음과 누림의 단절이 인간 허무의 핵심이다: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 누가 알며.”(12a) 생사(生死) 전반에 걸친 허무가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12b). 결국 그림자같이 헛된 것을 신기루처럼 좇는 것이 받음과 누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은혜의 하나님 밖에 있는 인생의 정체라는 전도자의 통찰은 지극히 적절하다 아니할 수 없다. 이렇듯 허무주의(虛無主義)는 성경의 지지를 결코 받지 못한다. 그럼에도 표피적이며 찰나적인 욕망의 노예가 되어 누림마저도 세상방정식을 대입하여 풀어보려고 하고 있느니 답답할 뿐이다.

 

 

부스러기 묵상

 

하나님께 받음이 귀하고 복되다면 그것을 누림역시 소중하다.

무엇인가를 자꾸 받으려고만 몸부림친 것 같다. 이것을 위해 내가 스스로 노력하고 만들어 보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은근히 자랑하며, 그것을 하나님께 기억시키면서, 그러니까 나는 하나님께 받으려고 한다는 것에만 든든해했던 것 같다.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받았고, 또 다르게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자족했다는 뜻이다. 결국 나는 받는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납작 엎드려있으면 -종종 이걸 겸손이라 생각한다.- 내가 얻고 싶고, 받고 있고, 채우고 싶은 것들을 받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세상은 이걸 자기 힘과 욕망을 따라 얻고 있고, 나는 가면을 쓰고 위장된 나를 하나님께 보여드리고 그것을 하나님께 받아내고 있는 것이 다를 뿐 아닌가. 그러니 받은 것이 주께서 기대하신 만큼 누리는 것으로 심겨지지 않았을 것 같다. 받은 것은 그대로 나의 욕망을 거두는 씨앗이 되었을 뿐이다.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교묘하게 위장되어 있을 뿐 세상과 다를 바 무엇이란 말인가. 받은 게 없어서 폐허가 된 저수지도 있지만 너무 많이 받아서 무너지는 저수지도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겠다. 또한 받기만 하면 시화호나 사해(死海)처럼 버림받을 수 있다는 것 또한 생각하는 아침이다.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찬송가 429장 후렴)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10.8b)

 

누리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다시금 믿음으로 바라본다. 받은 복을 세어보는 지혜가 필요한 때를 살아간다. 이제는 받은 것을 어떻게,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누리고 있는가를 생각할 때다. 이것이 거짓되고 악한 헛된 허무가 비집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길이다.

하나님은 낙()을 누리도록 하시는 분이시다. 진짜 낙은 받음과 누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때 향기를 발한다. 받은 것 없이, 가짜를 가지고 누리는 채 하고 있다면 그는 8-9절의 신세를 면할 수 없다. 누리는 것보다 받은 것이 훨씬 더 많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도 아직 더 받겠다고 아우성이니 좀 쑥스럽고 부끄럽다. 받은 것과 누리는 것이 서로 건강한 더 나은’(7-8) 일상의 삶을 향해 조용히 두 무릎을 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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