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06(Eccl. 5.1-7)
우매자에게는 희망이 없다.
본문 관찰
예 배(1)
기 도(2-3)
서 원(4-7)
예배자로서의 자기점검
이 모든 헛된 수고의 문제를 안고 5장 앞에 선다.
과연 ‘헛되다!’의 분위기가 반전될 것인가? 기대해도 될 것 같다. 다시 ‘하나님’의 등장에서 희망이 보이기 때문이다. 2.24-3.15절의 향기가 풍겨난다. ‘헛된 수고’(1.2-2.23, 3.16- )와 대조를 이루는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본분’(2.24-3.15, 12.9-14)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전도자의 설교를 만난다: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敬畏)할지니라.”(7b) 사람의 본문을 다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무엇일까?
예 배(1)
헛된 수고를 하는 사람은 제사를 드리는 자신보다는 제물에 더 신경을 쓰는 자이고, 사람의 본분을 다하는 자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는 자기 자신을 살피는 자다. 차이는 여기에 있다. 전자(前者)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하느니라.”의 수준에서, 그러니까 악인으로서 제사(예배)를 드리는 자이다. 헛된 수고로부터 돌아서지 않고서 하나님의 전을 출입하는 예배꾼으로 산들 그게 ‘말씀을 듣는 것’이겠으며, 그러니 본질을 잃어버리고 형식만 붙들고서 ‘헛되다!’의 문을 향해 나아가는 것 아닌가.
오늘 나 역시 이처럼 살아갈 수 있다. 죄악의 손에 제물을 들고 하나님의 전을 출입하고, 악인의 마음으로 제사(예배)를 드리고, 그리고 예배를 드린 후에도 여전히 악을 행하며 살 수 있다. 전도자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렇게 살아서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고, 그래서 7b절을 말하면서, 헛된 수고(1.2-12.8)를 반복하는 모든 짐을 내려놓고, 궁극적으로는 12장 13절 앞에 서야만 헛된 수고의 ‘죄인’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2.26)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한 가지, 그것이 말씀을 듣는 것에서 나온다. 이와같이 예배에 실패하면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실패하기로 작정한 사람과 같다. 참된 예배만이 헛된 수고에 빠져서 파선할지도 모르는 인생을 구원해 낼 수 있는 하나의 희망이다.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는 것, 그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모습으로, 어떤 심령으로, 무엇을 위해 출입하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지만 그것이 나로 하여금 헛된 수고로부터 자유하도록 만드는 것은 아니다. 다시금 나의 예배생활을 돌아보는 중이다.
기 도(2-3)
예배에 실패한 우매자는 역시 기도에서도 실패한다. 예배에 실패했기 때문에 기도에 실패한 것은 아니다. 그는 이미 ‘말씀을 듣는 것’(1)에 실패하였고, 그래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듣는 자로 서는 것이 아니라 함부로 입을 여는(2a), 그러니까 자기가 원하고 바라는 것을 구하는 것으로 밖에 기도를 생각하지 못하는 자다. 뿐만 아니라 급하게 말을 많이 하여야 하나님이 들으시는 줄로 착각한다. 하나님의 자리와 나의 위치를 혼돈하면 이렇게 된다(2b).
말이 많으면 바보같은 소리를 많이 하게 됨으로써 그만큼 실수가 많다. 실행하지도 못할 약속을 하거나, 지키지도 못할 맹세를 하거나, 후렴구처럼 자신의 인생을 반복하여 변명만 하고 있을 수 있고, 또 실언(失言), 폭언(暴言), 망언(妄言), 허언(虛言), 위증(僞證)과 같은 그런 허무맹랑(虛無孟浪)한 소리꾼으로, 그것도 사람과의 관계를 넘어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
이런 것들이 사람의 본분을 떠나 헛된 수고나 하는 그런 보잘 것 없는 인생으로 추락시킨다. 전도자는 기도마저도 이처럼 헛되게 만들어 버리는 정말 소망 없는 사람들이 있음을 생각해 보도록 교훈하고 있다.
서 원(4-7)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
네 입에서 낸 것은 그대로 실행하기를 주의하라
무릇 자원(自願)한 예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네가 서원하여 입으로 언약한 대로 행할지니라.”(신23.21,23)
서원(誓願) 규례를 행치 않는 자를 역시 우매자라 하신다. 하나님은 그를 기뻐하시지 않으시며(4), 그래서 말만 앞세우는 것은 명백한 범죄다(6a). 이를 실수라 한다고 해서 통할 리 만무하며,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것일 뿐 아니라 결국 자신의 인생을 멸망케 한다(6b). 이와같이 허풍스러운 허언(虛言)은 다 헛될 뿐이다(7a). 이처럼 하나님의 언약(言約)을 따라 사는 삶은 버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따라 사는 것은 더디하면서(4a), 서원했다는 것만 붙들고 있다면 그야말로 넌센스다. 그러니 헛된 수고만 하는 인생으로 끝나는 것 아닌가.
사람의 본분을 다하겠다며 하나님과의 서원을 통해 그분과 복된 관계를 맺고 -서원은 자원하여 하는 신앙인 거룩한 행위다.-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갚기를 주저하는 어리석음 앞에 결국은 무릎을 꿇는다. 이처럼 예배도, 기도도, 서원도 뒤가 약하다. 시작은 좋은데 얼마 가지 못해 그만 중단되거나, 변형되거나, 사람의 헛된 수고로 대치되고 만다.
부스러기 묵상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敬畏)할지니라.”(12b)
우매자의 삼중창이 불협화음이 되어 하나님이 등장한 무대를 빛 바래게 한다.
그는 예배에서, 기도에서, 서원에서 각각 실패한다. 그러면서도 이런 ‘헛된 수고’(1.2-2.23)를 통해서 자기 인생을 반전시키려고 발버둥친다. 그러니 그것만큼 피곤하고, 힘들고, 무의미하고, 헛되고 헛될 뿐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본분을 다하도록 하기 위해서 위의 것들을 인생들에게 허락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닌 헛된 세상의 대용품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기대하는 순간, 바로 거기서부터 사람의 본분을 떠나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이 일그러질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을 따라 사람의 본분을 다하며 살려고 몸부림쳐도 될까 말까 한 것이 세상사(世上事)인데 우매자를 자임하며 사니 될 일이 만무하다.
서원까지 할 정도면, 기도하는 자리에 나아갈 정도면, 예배를 드리는 자로 설 정도면, 그래도 이런 것들은 아무나 하는 것도 아니고, 또 하려고 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닌 것들이다. 사실 어찌보면 여기까지 나아왔다는 것만으로도 보통 이상이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 자신을 보는 일에 실패한 것에 있다. 신앙은 어떤 행위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신앙은 중심이며 마음이다. 이것이 한 사람을 ‘헛된 수고’로 끝나게 할 수 있고, 또한 ‘사람의 본분’을 다하는 자로 세울 수 있다. 지금 전도자가 염려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사람답게 사는 게 얼마나 어렵고 힘든 싸움인가. 누구에게나 다 한 번뿐인 인생이지 않나. 누구든 처음부터 헛된 수고나 하는 인생으로 끝나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런데 결과를 보면 그렇지 않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솔로몬은 전도서의 결론을 희미하게 노출한다: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敬畏)할지니라.”(12b)
인간이 휘청거릴수록 희망은 하나님임이 더 분명해진다.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고(1),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고(2-3), 하나님께 서원(誓願, 4-6)하였어도 별 수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 앞에 조금은 허탈하고 상심이 되지만 살아갈수록 진짜 희망은 나에게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매자에게서 하나님께로 시선을 돌린다. 지금은 우매자에게 시선을 줄, 그런 때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