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01(Eccl. 2.18-26)
하나님이 주신 전망대에서 내려다본다.
본문 관찰
헛됨④ - 수 고(18-23)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24-26)
인생 쉬프트(shift)
또 하나의 헛됨인 ‘수고’가 해 아래 인생의 징검다리를 이어간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괴로움(1.13, 2.17), 번뇌와 근심(1.18, 2.23), 죽음(2.16)에다가 실망(20)과 슬픔(23)을 추가할 뿐이다. 이것이 인간이 헛됨을 면하기 위해서 지불하는 수고의 실상이다. 인생은 수고함을 반복하지만 헛됨을 면하지 못한다(18-23).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 바로 그것만이 인간의 수고를 그치게 한다(24-25). 인간은 해 아래서 수고를 낳지만 하나님은 하늘 위에서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신다(26). 인생은 위로부터 주시는 은혜의 선물을 받아 살아간다. 솔로몬은 이 비밀을 통해 인간의 헛된 수고에 종지부를 찍는다.
헛됨④ - 수 고(18-23)
“일평생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된 것이로다.”(23)
‘수고’라는 단어가 무려 9회나 반복된다. 수고의 악순환이 반복되며(18), 수고와 지혜를 다해서 물려주지만 그것을 이을 후손이 지혜자인지 우매자인지 그것마저도 알 수 없는 수고와 지혜의 덧없음(19,21), 그래 수고는 곧 실망이 된다(20). 결국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란 말인가(22). 이것이 해 아래서 헛된 수고를 하는 자의 슬픈 노래다(23).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24-26)
“사람에게서 먹고 마시는 것,
자기가 하는 수고에서 스스로 보람을 느끼는 것,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알고 보니, 이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
그분께서 주시지 않고서야, 누가 먹을 수 있으며, 누가 즐길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슬기와 지식과 기쁨을 주시고,
눈 밖에 난 죄인에게는 모아서 쌓은 수고를 시켜서,
그 모은 재산을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주시니,
죄인의 수고도 헛되어서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표준새번역)
전도자는 갑자기 24절에서 지금까지 ‘헛되다’(1.2-2.23)고 했던 것들을 긍정한다. 사실 좀 어리둥절하다. 그러나, 정말 그러나 이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며(24),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로 받을 때에야 비로소 헛되지 않고 좋은 것이라 선언한다. 먹고 마시고 수고하는 것마저도 해 아래서 사람이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위로부터 주시는 선물이란다(25). 하지만 어찌 하나님 없는 인생들이, -그래서 ‘죄인’(26)이다- 그것도 해 아래서 이걸 깨닫고, 보고, 알 수 있으랴.
마침내 무신론적 허무주의가 그 끝을 알린다. 하나님이 해 아래의 무대에 당당하게 등장하심으로 말이다. 이것이 24절의 반전(反轉)이다. 지혜와 지식과 희락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26a). 누구에게 인가?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다. 인생은 이것을 만들 수 없으며, 해 아래서 인간이 스스로의 힘이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게도 인생들이 얻으려고 발버둥치던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다. 마침내 혼돈스럽던 전도서의 분위기가 일시에 정리되는 느낌이다.
한편, 26b절이 약간 놀라게 한다. 마치 하나님이 주시는 것마저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로 마무리되는 듯한 인상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기뻐하는 자’와 같은 의미의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와 반대편에 서 있는 ‘죄인’을 겨냥하는 말이다. 하나님 없이, 해 아래서 헛된 수고를 하는 사람, 그가 죄인이며, 바로 그에게 노고(勞苦)를 주시고 저로 모아 쌓게 하시지만 그러나 그의 수고는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1:2-2:23절 사이에서 몸부림치는 인생 그는 누구인가? 죄인이다.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산다. 이게 하나님 밖에 있는 인생전망대에 보여지는 그림이다.
부스러기 묵상
“하나님이 그 기뻐하는 자에게 … 주시나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게 하시나니 ….”(26)
인생이 해 아래서 추구하는 모든 수고는 헛되며, 죽음으로 끝이다.
이것이 인생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2장 23절까지의 하나님 없는 인생들의 초상이다. 이처럼 인간이 ‘하는’ 수고(18-23)와 하나님이 ‘주시는’(24-26) 은혜의 부스러기가 극적으로 대조되면서 마침내 전도서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된다. 이것은 인간과 하나님의 질적 구분이며, 인간이 무슨 수를 쓴다할지라도 하늘의 것을 훔치거나, 빼앗아 오거나, 만들어 내거나, 또한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전망대에서 내려다 볼 때에만, 그래서 위로부터 주시는 것을 은혜로 받는 것만이 인생의 유일한 희망이다.
결코 하늘 위에서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시면 인생은 23절과 24절 사이에서 수고하다가 그렇게 죽음으로 끝나게 될 뿐이다. 결국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희망이다. 결코 허무나 패배나 염세가 아니다. 하나님께로 이동(shift)하는 것만이 1.2-2.23절의 긴 방황을 끝낼 수 있다. 하나님은 그 비밀의 커튼을 열어 주시고 계신다. 성경은 해 아래서 만들어지는 것에서 인생의 희망을 찾지 않는다. 하나님이 인생에게 주시는 진정으로 복된 것들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들이다.
“위에서부터 주의 손을 펴사 나를 … 구하여 건지소서.”(시144.7)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눅24.49b)
“위엣 것을 찾으라.”(골3.1a)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약1.17a)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 열매를 거두느니라.”(약3.17-18)
인생전망대에서는 결코 하나님을 볼 수 없다. 오직 해 아래서 헛된 수고를 통해 죽음으로 치닫는 인생의 종점만이 보인다. 그렇다면 인생은 절망인가. 아니다. 하나님이 값없이 은혜로 주시는 하늘전망대에서 위로부터 주님이 주시는 것을 볼 때에만, 그것을 받을 때에만,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26a) 선물로 주시는 것을 받을 때에 비로소 인생은 헛됨에서 희망으로 넘어온다. 오늘 나는 솔로몬이 소개해 주는 하나님이 주신 전망대에서 위를 보고,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것을 통해 해 아래를 내려다 본다.
이제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인다. 하나님이 하늘전망대에서 내 마음과 심령에 씌워주신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니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하나님이 보이니까 세상이 보인다. 이게 희망 아닌가. 세상을 보는 심령으로 하늘을 보려고 했음이 얼마나 부끄럽고 죄송한 일인지 이제야 좀 알 것 같다. 23절과 24절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데 말이다. 이처럼 진리는 가장 가까이에 있다. 천국은 내 마음에 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축복의 부스러기들을 하나 둘 생각해 보면서 하루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