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29-30(Eccl. 2.1-17)
인생전망대에서 해 아래를 내려다본다(2).
본문 관찰
헛됨② - 쾌 락(1-11)
헛됨③ - 탁월한 지혜(12-17)
자승자박(自繩自縛)
인생전망대에는 ‘헛되도다!’의 안경만이 있다.
자신의 지혜(1.12-18)에 이어 계속해서 2장에서는 쾌락(1-11)이나 탁월함(12-17)으로 해 아래서의 헛됨을 모면해 보려고 몸부림친다. 과연 이것들은 헛됨을 탈출하도록 도와줄 것인가.
헛됨② - 쾌 락(1-11)
“내가 어떻게 하여야 내 마음에 지혜로 다스림을 받으면서 … 즐겁게 할까
또 어떻게 하여야 …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3)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10)
“그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11)
솔로몬은 3절의 질문을 1-2,4-10절을 통해 얻어보려고 몸부림친 것을 자인한다. 그 결과 10절이 얻어졌다고 말한다. 인생전망대를 높고, 더 든든하게 세워서 해 아래를 내려다 본 결과 즐거움과 기쁨이 주어졌다(10). “어떤 것이 ‘쾌락’인지 알까 하여”(3a), 이것을 얻어보려고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온갖 향락을 추구했을 뿐 아니라(1-3), 자신을 위하여 집들과 포도원(4), 정원과 과수원(5), 저수지(6), 노비와 소와 양떼(7), 은금과 보배와 가수와 처첩들(8)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기쁨과 즐거움을 얻어보려고 했고, 무엇이든지 어느 정도 그것을 얻은 모양이다: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10)
그러나 쾌락이 가져다 준 결론은 11절이다. 이 세상으로부터 얻는 즐거움(쾌락)은 결코 만족이 없다. 덧없고 괴로움일 뿐이다. 역시 하나님과 단절된, 하나님과 상관없는 찰나적인 즐거움이기에 모든 것이 있지만 여전히 부족하고 일시적이다. 언제나 새로운 것을 찾고 구하지만 바람을 잡는 것과 같을 뿐이다. 솔로몬은 자기 경험을 통해서 나에게 중간평가를 하도록 권고한다. 나는 무엇을 통해서 즐거움을 얻고 있는가?
헛됨③ - 탁월한 지혜(12-17)
“…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16b)
세상에는 지혜만 있는 것이 아니다(12). 망령되고 어리석은 일들도 있다. 하지만 지혜가 우매(愚昧)보다 더 낫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13)고 말한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당하는 일이 똑같다(14)는 것이 문제다. 즉 지혜가 우매자들이 당하는 것을 막지는 못한다(15). 또한 지혜자도 우매자처럼 그렇게 잊혀진다는 점(16a), 한편 죽음도 동일하게 임한다(16b). 그러니 산다는 것이 다 덧없는 것 아닌가(17a). 역시 지혜를 따라 살아간다고 한들 ‘괴로움’(17, 1.13)이요 다 헛되다고 말한다.
지혜자도 결국 죽는다.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다(16). 지혜자는 우매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금 더 뛰어날 뿐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혜라는 것이 우매보다 조금 더 상대적으로 좋은 것일 뿐이라는 전도자의 고백을 잊지 않아야겠다. 절대적인 것이 아닌 상대적인 것을 가지고 마치 도토리 키재기하듯이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지혜가 또 있을까.
부스러기 묵상
솔로몬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서 하나님과 무관한 것들의 헛됨을 예증한다.
최고의 환경(1-10)에서 의식주(衣食住)를 비롯한 모든 것을 누리며 살았지만 결과는 “우매자의 당한 것을 나도 당하리니”(15a)에서 이것들 역시 바람과 같이 사라질 것들임을 보았다. 그런데도 좀 더 얻어보겠다고, 누리겠다고, 즐기겠다고 발버둥을 치는 게 인생이다. 다 일장춘몽(一場春夢, 11,17)임에도 말이다.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1899-1961)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노인과 바다????가 그렇다. 노인은 필사적인 승부수를 통해 큰 고기를 잡아 항구로 몰고 오지만 남은 것은 앙상한 뼈뿐이었다. 작가가 말하려고 하는 메시지는 현대인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서 생사를 건 인생의 항해를 계속하지만, 결국 얻게 되는 게 거대한 뼈뿐임에도 그걸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지불한다. 이게 인간이다.
내가 가진 것을 돌아본다. 그러면서 바울의 고백을 기억한다(딤후4: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것이 바울의 종점이다. 나 역시 상대적으로 좀 많이 누리며 사는 것이 나의 종점이 되지 않기를 원한다. 솔로몬처럼 누릴 것도 없지만(1-10). 이미 솔로몬에게서 헛됨이 입증된 것으로 족하자. 내 안에 우매자의 욕망이 자리하지 않도록 다시 내 안을 들여다본다.
솔로몬의 설교를 긍정하는 것만큼 아직 나에게는 희망이 남아 있다. 그 희망이 바람처럼 헛되게 사라져 버리기 전에 내 안에 있는 천국을 ‘나를 위하여’(4) 가꾸지 말고 주님을 위해 새롭게 해야겠다. 나를 십자가에 못박는 일만이 ‘나’(4-8)의 즐거움과 기쁨을 좇는 어리석은 지혜자로 죽음 앞에 서지 않을 수 있다. 인생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나의 모습이 더 이상 초라해지지 않기를 소망한다.
솔로몬의 경험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도 경험해 보고야 헛되다고 말해야 되는 것은 아니다. 솔로몬처럼 살 이유는 없다. 내가 서 있는 내 인생의 좌표를 다시 두드려본다. 인생의 본분을 따라 걸어가는 노정인가, 아니면 썩어질 유한한 세상이 주는 것을 좇는 길목인가. 이걸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
내 인생의 보고서를 생각해 본다. 길과 진리와 생명되신 주님께서 밝히 보여주시지 아니하시면, 성령님께서 영적인 지각과 통찰을 주시기 아니하시면, 정도(正道)를 걸어가고 있는지 어찌 알 수 있으랴. 2장이라는 중간시험지를 받아들고 다시금 하늘을 행해 눈을 든다. 정답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위로부터 주어진다. 정답 아닌 헛된 것을 정답인 양 붙들고 있지 않도록 성령님의 지혜를 구하는 아침이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15.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