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4 - 인생 2막 1장, 또 하나의 스타트(룻 2.1-7)

20191229(양무리교회)-룻기강해4

  

 

 

인생 21, 또 하나의 스타트

Ruth. 2.1-7

  

   본문 관찰

 

   1 친족 중 유력한 자 - 보아스

   2 나로 밭에 가게 하소서

      은혜

   3 우연히 -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5 이는 뉘 소녀냐

   

 

베들레헴 스타트

 

하나님의 섭리는 누룩과 같다.

하나님은 보리 추수할 때를 귀향의 때로 준비하셨다. 다시 베들레헴이다. 이로써 1장의 방황(베들레헴)과 하나님의 진노(흉년)는 끝이 났다. 그러나 나오미는 준비된 다음 세 가지 은혜를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첫째, 하나님은 룻을 붙여주셨다. 둘째, 하나님은 그녀를 베들레헴에서 기다리시고 계셨다. 셋째, 하나님이 보아스를 준비하셨다.

나오미는 아직 이같은 영적인 온도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아직 비밀이다. 하나님의 섭리가 누룩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녀는 하나님이 베푸실 은혜를 수납할 만 한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

우리 역시 어떤 일들과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과 일어난 시점에서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해 알 수 없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면,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때의 사건이 놀라운 은혜가 되었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작품이었음을 알게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것이 우리가 너무 익숙하게 사용하는 은혜라는 말의 뜻이다.

하지만 21, 즉 룻기 21절로 이어지는 현장 온도는 아직 겨울이다. 베들레헴의 계절은 보리 추수 때이건만 이걸 호흡하는 나오미와 룻은 차갑게 식어있다. 1장의 고백, 돌이킴, 회개, 회복, 귀향 등으로 이어지는 뜨겁기만 하던 은혜는 보이지 않는다. 왜 이러는 것일까. 고개가 기우뚱거린다. 이해할 수 없는 흐름이다.

그래도 내가 열심히 살았는데...

그래도 내가 열심히 섬겼는데...

그래도 내가 열심히 기도했는데...

1장의 모압생활은 끝났다. 2장은 다시 베들레헴이다. 나오미와 룻 이상으로 우리 역시 기대하는 바가 컸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까?’ 그런데 21, 21장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1장의 흉년이 끝난 보아스는 유력한 자(‘부자’)로 회복되어 있다. 그런데 같은 흐름에서 회복되어 하나님의 날개 안에 보호를 받기 위해 회개하고 돌아온 나오미와 룻은 무력한 자요 가난하디 가난한 모습이다. 이는 하나님이 불공평하신 것 아닌가 싶을 정도다.

  

 

21장 서곡

 

1- 메시지 성경(The Message, E. H. Peterson)

마침 나오미에게 남편 쪽으로 친척이 하나 있었는데, 엘리멜렉 집안과 관계된 유력하고 부유한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은 보아스였다.

 

좀 더 보아스를 살펴보자. 하나님은 보아스를 준비하셨다. 그는 엘리멜렉의 친척이자 유력한 사람이다. 사사시대의 베들레헴에서 풍년을, 평화와 축복을 따라 살아간다면 그가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비밀병기, 유력하고 부유한 사람, 그가 보아스다!

그런데 보아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부자이지만 아래로 사람들, 그것도 연약한 자들(하인, 이삭줍는 자)과 소통하며 저들을 따뜻함으로 위로하고 살핀다. 오늘날로 하면 영농기업인 베들레헴농장 사장인데 회사에서 일하는 노동자들과 허물없이 지내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은혜를 나누는 자로 산다.

4장에서 더 살펴보겠지만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4.21-22)의 말씀처럼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1.5-6a)에 오른 바로 그 보아스다. 그는 어머니 라합을 통해 믿음을, 그리고 가나안 여인이었던 어머니 라합을 통해서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가고 배웠던 사람이다.

, 보라. 하지만 그런 보아스와 달리 여전히 가난하고, 아무도 환영해 주거나, 쌀 한 바가지 퍼주는 사람 없고, 춥고 가난하고 배고프고 외로운 베들레헴이 또 한 편에 있다. 놀라운 것은 그런데 그 베들레헴에 유력하고 부유한 사람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을 위해, 신앙을 위해, 시어머니 나오미와 며느리 룻이 모압을 떠나 하나님에게로 돌아왔건만 현실은 냉혹하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는 것 같지 않다. 오히려 끼니를 걱정하고, 생존을 염려해야 할 판이다.

, 이것이 교회의 모습 아닌가. 1장처럼 다시 은혜 앞에 서 있어도 2장처럼 두 모습이다. 교회가 그렇다.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러할 때에, 이처럼 연말 앞에 서 있을 때, 그러니까 어떻든 몸부림치며 믿음으로 살아보겠다고 휘청거리며 달려왔는데 보아스처럼이 아니라 나오미와 룻처럼 오늘, 지금, 현재 앞에 서 있는 바로 그런 나를 어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이게 오늘 본문 앞에 선 심정이다.

어찌하란 말인가. 그래서 이어지는 2절이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이지만 가장 위대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이자 신앙의 현재형이 서는 자리다.

 

 

2-3- 메시지 성경(The Message, E. H. Peterson)

하루는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말했다. “일을 해야겠습니다. 나가서 추수하는 사람 중에 누군가가 저를 친절히 대해 주면, 그 사람을 뒤따라가며 곡식 사이에서 이삭을 줍겠습니다.” 나오미가 말했다. “그렇게 해라, 사랑하는 딸아.” 그리하여 룻은 밭으로 나가, 추수하는 사람들 뒤를 따라가며 이삭을 줍기 시작했다. 마침내 룻은 시아버지인 엘리멜렉의 친척, 보아스의 소유의 밭에 이르렀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으나 달라진 것은 없다. 모압에 있을 때나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이후나 가난은 마찬가지다. 세상에 있을 때나 예수 믿기로 하고 교회에 등록한 이후나 문제는 그대로다. 유력한 자와 먹을 것이 없어 보리 베는 자를 따라 이삭줍기를 해야 하는 가난한 자의 대조를 보라.

어쩌면 이것이 베들레헴의 모습,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교회의 현실이다. 묻는다. 그래도, 이처럼 하나님이 나를 우숩게 보시는 것 같아도 다시 모압으로, 다시 세상으로, 원망과 불평으로, 세례를 받고 교회와 주님을 위해 시간과 물질과 내 생활을 드렸음에도 달라지는 것 같지 않은 나와 우리 가정을 보며 나는 어떤 생각과 행동을 도모하고 있는가 말이다.

회개했으니 이제 하나님이 책임지셔야 하는 것일까. 그러니까 회개는 내가 하고, 그러면 그 다음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꿈꾸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내가 할 일은 마음과 입으로 회개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 주셔야 한다는 내가 아는 기독교 공식을 꺼내든다면, 회개는 결국 하나님의 것을 얻어내기 위한 수단인 셈이다. 결국 내가 이만큼 했으니 하나님도 저만큼 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것은 한마디로 거지 근성’(놀부 스타일)이다. 이상하게도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나로 밭에 가게 하소서!

하지만 룻은 하나님이 하셔야 할 일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결코 혼돈하지 않았다. 룻은 1장의 고백이 진실한 것임을 자신의 입술과 행동으로 드러낸다. 그녀가 밭으로 나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보아스를 만났겠는가? 정리하면 이렇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행동을 배제하지 않으며, 인간의 행동은 하나님의 섭리를 앞서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 기초가 되어야 한다.

룻은 한 가정이 나아가야 할 바를 주도한다. 그러나 룻은 이 일을 독자적으로, 단독적으로 결정하여 시행하지 않는다. 어머니와 서로 나누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방식을 취한다. 참 아름다운 것은 나오미와 룻이 이처럼 서로 대화(dialogue)를 나누면서 지낼 수 있는 관계였다는 점이다.

나로 밭에 가게 하소서! - 광야의 이스라엘처럼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할 수도 있었다. 왜 풍요로운 애굽(모압)에서 꺼내어 이 광야(베들레헴)에서 죽게 하느냐고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다. 어머니의 하나님은 왜 이러시냐고 따질 수도 있다. 할만큼 했는데 하나님은 왜 이러시냐고 분노할 수도 있다. 세상 다 버리고 예수께로 왔으면 하나님도 나를 좀 책임져야 되지 않느냐는 식으로 덤빌 수도 있다. 시어머니를 설득해서 다시 모압으로 가자고, 거기서 뭔가 살 궁리를 찾아보자고, 정 안 되면 친정에 의지해서 뭐라도 해 보겠다고 이런저런 궁리를 제안할 수도 있었다.

믿음이 밥 먹여주냐고...

교회가 다냐고...

예수가 전부냐고... 그런데 그렇다라고 룻은, 그렇게 온 몸으로 룻은 2-3절처럼 움직일 뿐이다.

   

 

4-7- 메시지 성경(The Message, E. H. Peterson)

얼마 후에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 왔다. 그는 추수하는 일꾼들에게 하나님께서 자네들과 함께 하시기를 비네!” 하고 인사했다. 그들도 하나님께서 주인님에게 복 주시기를 빕니다!” 하고 응답했다. 보아스가 농장 일꾼들을 맡은 젊은 종에게 물었다. “저 젊은 여인은 누구인가? 어디서 온 사람인가?” 그 종이 말했다. “모압 땅에서 나오미와 함께 온 모압 여인입니다. 저 여인이 추수하는 사람들 뒤를 따라가며 곡식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해주십시오하고 승낙을 구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지금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여태 일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오묘하다. 보리 추수 때에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도록 하시더니, 룻으로 하여금 밭에 나가 이삭줍기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주셨다. 그리고 그 많은 밭들 가운데 보아스의 보리밭으로 인도하셨다. 섭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룻이 이삭줍기를 하고 있는 시간과 장소에 마침 보아스가 나타난 것이다.

보아스 역시 매우 건강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보리 베는 자들과의 대화에서다. 서로를 하나님 안에서 축복하는 사이, 그것도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이처럼 아름다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이임을 볼 때 보아스가 얼마나 전인적으로 건강한 사람인가를 알게 된다.

 

이는 뉘 소녀냐?

또한 보아스는 섬세한 사람이다. 이삭줍기를 하는 가난한 사람에게까지 관심을 줄 정도로 그는 아량과 넓은 마음을 소유한 점이 퍽 인상적이다. 이스라엘은 전통적으로 고아와 과부, 그리고 극빈자들이 이삭을 줍는 일을 통해 끼니를 연명하였다. 모세는 이들을 위해 이삭을 남겨 놓을 것을 명하였다(19.9-10, 24.19-22). 그런데 보아스의 시야에 이런 부류의 사람인 한 여인이 들어왔다는 점이다. 이 부분이 무엇보다 2장의 핵심 포인트다. 사실 그냥 쓰윽 둘러보고서 이렇게 생각했다고 해도 룻으로써는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흉년의 고통을 제하시고 우리를 권고하사 땅의 소산을 먹도록 양식을 주셨는데 왜 하필 젊은 여인이 홀로 이삭줍기에 나섰을까? 아마 뭐 남모르는 사정이 있나보다. 그것까지야 내 알 바 아니지. 이삭줍는 것도 자존심 상할텐데 방해나 말아야지.”

 

그러나 보아스는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마침내 무엇인가 어떤 일이 새롭게 시작될 순간이다. 룻기 전체를 두고 가장 극적인 순간이 찾아왔다. 그것은 보아스와 룻의 만남이다. 만남은 언제나 가슴 뛰는 일이다. 거기에는 기대와 바램과 소망이 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에 비하면 극적이지도 않고 뭐 특별하지도 않다. 그럴듯한 장소도 아니고 보리밭에서의 만남이다.

우리는 흔히 이처럼 별스러워 보이지 않는 만남들에 대해서는 아무렇게나 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아주 특별한 만남, 기념될 사건, 내게 도움이 좀 될만한 사람, 두고두고 추억할 수 있는 것들이 경험되어야 만 무슨 느낌이 온다며 그때부터 비로소 뭔가를 시작할까, 그래서 이것저것 따지고 계산해 보면서 최대한 실리(實利)가 보장될 때에야 행동을 개시한다. 만약 보아스가 그런 현대인이었다면 그는 결코 보리밭 스캔들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이 간격만큼이 우리가 놓치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섭리이다. 하나님은 죄인을 용납하시고, 상하고 찢긴 심령들을 싸매어 주시며, 심판 받아 마땅한 인류를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실 정도로 온 인류를 사랑하신 분이다. 무슨 계산을 하시거나 조건 같은 걸 내걸지 않으셨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처럼 세상을 보는 사람, 당신처럼 약자들을 위해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을 주목하신다. 하나님은 빤한 계산 속이 보이는 태도로 뭔가 얻어 보겠다는 식으로 처세하는 사람에게 당신의 섭리를 보고 듣고 얻고 누리도록 만드시지 않으신다. 섭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는 순수한, 순전한, 순진한, 순결한 사람의 몫이다. 이점에 있어서 보아스와 룻은 아름다운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이들에게서 숨을 쉰다.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

룻은 자신의 이름보다도 자신의 삶이 소개된 사람이다. 모든 것을 버려두고 시모(媤母) 나오미를 좇아 베들레헴까지 왔다. 그리고 비어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의 뜻에 적극적으로 순종하여 밭에 나와 이삭줍기를 하며 베들레헴의 험난한 삶을 시작하였다. 1장처럼 돌이키고 회개했어도 아무런 복이 임하는 것 같지 않아도 오늘이라는 삶에 묵묵히 최선을 다한다. 이게 신앙이고 믿음이고 영성이다. 이러한 그녀의 행동은 이미 베들레헴 사람들에게 자자하게 소문이 난 상태였다.

룻은 자신의 전부를 하나님께 맡긴 사람이다. 홀로 된 시어머니를 따라, 그리고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섬기기 위해 모압 지방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왔다. 그렇다고 내가 이렇게 회개하고 주님을 따랐으니 이제는 하나님이 나를 책임지셔야 한다는 식의 신앙으로 명함을 내 놓지 않았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 부분에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그녀가 베들레헴에 온 게 얼마되지 않은 때임에도 이러한 그녀의 삶이 베들레헴에 알려졌고, 보아스도 이를 알고 있을 정도였다는 점이다. 섭리적 만남이 있기 전, 보아스는 유력한 자로 룻은 믿음을 따라 시어머니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온 것이 어쩌면 이 두 사람의 전부다. 그리고 그날도 주어진 하루를 살아가다가 보리 추수밭에서 잠시 만난 평범한 이야기가 전부인 듯하다. 그런데 이것이 섭리적 만남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씨앗이 되었다. 누가 이렇게 하시는가. 그렇다, 하나님이시다.

   

 

지금 선 자리는 아름답다.

 

룻은 그 섭리를 따라 성실하게, 꾸밈 없이, 뭔가 일확천금(一攫千金)을 꿈꾸지도 않고, 후회하거나 비관하지 않고, 성실하고 진실하게 주어진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간다. 하나님의 생각보다 앞서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비굴하게 타협하거나 잔머리 굴리지도 않는다. 주어진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며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이것이 인생 21장의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일상의 영성이다.

그녀는 하나님보다 앞서 행동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새로 시작된 베들레헴 생활을 자신의 어떤 의도대로 끌고 가려고 하지 않는다. 오직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묵묵히 지켜나간다. 바로 그런 삶의 자리에서 보아스와 대면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느냐를 의식하지 않고 이삭줍기에 여념이 없는 여인, 그녀가 바로 자신의 친족 엘리멜렉의 아내 나오미를 따라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이방 여인 룻이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지금 선 자리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오늘 본문이 말씀하고 싶어하는 메시지의 주제가 아닐까.

우리는 다 지난 2019년을 1장처럼 살았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침묵하시며, 나를 도와주지 않으시는 듯하다. 그래도 21막처럼 살 것인가? 살고 있는가? 그렇게 또 2020년을 살아낼 것인가. 룻기는 오늘 우리에게 이처럼 말을 걸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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