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삿 18.1-13)

20211205a(묵상)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Jdgs. 18.1-13

 

    본문 관찰

 

    미가의 제사장과의 만남(1-6)

    라이스 정탐 및 침략 준비(7-13)

 

 

단 지파 소고(小考)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하지 아니하였으며,

      결심하고 헤레스 산과 아얄론과 사알빔에 거하였더니 ”(1.34-35a)

 

먼저, 단 지파에 대한 사사기의 기록을 살펴보자.

본문 1절에 대한 이유가 밝혀진 셈이다. 단은 정복에 실패하고 가나안을 이리저리 배회하며 유랑하는 신세였다. 그런데 어인 일인지 너희는 가서 땅을 살펴보라.”(2b)며 정탐꾼 다섯을 파송한다. 혼돈의 사사시대에 이처럼 가나안 정복언약(19.40-46)의 회복과 성취를 기대하고 있다는 점은 상당히 고무적이다. 이렇게 해서 미가와 그의 제사장과의 만남이 시작된다.

물론 이것은 좀 더 큰 그림에서 볼 때는 불신앙의 연속이 그럴듯한 합법의 모양으로 옷을 갈이입는 꼴이다. 사실 이미 분배받은 땅이 있었는데 그것을 정복하지 못하고(1, 불신앙1), 다시 그 땅을 버리고(2, 불신앙2), 역시 합법으로 위장한 불법의 제사장에게 묻고(5, 불신앙3), 이처럼 그 뒤에도 계속해서 도미노처럼 죄는 죄를 낳는 것으로 점점 강화된다. 이게 단 지파의 한 단면이다.

   

 

우리가 가는 길이 형통할는지 우리에게 알게 하라.”(5b)

 

제사장에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은 전통적으로 관례에 해당한다. 이처럼 단 지파가 정복신앙의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는 행위는 영적 암흑시대를 밝히는 한 줄기 빛과 같은 행위였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 읽어내면 단 지파 역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라는 이스라엘 신앙의 생태적 한계를 이들 역시 안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진짜와 비슷한 것이 더 문제다.

가나안을 정복하는 것을 새삼스럽게 다시 물어야 하는 것인가를 따지는 것은 그만두고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최소한 실로에 있는 하나님의 집(18.31a)이 아닌 다른 곳에, 그러니까 에브라임에 제사장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황당한 파행적 행위라는 것을 모를 리 없다. , 3절의 질문에 미가가 나를 자기의 제사장으로 삼았느니라.”(4)처럼 대답한 무자격 제사장의 반율법적 언행에서 단 지파는 분명 이 유령 제사장의 정체를 파악하게 되었을 것이다. 만약 몰랐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아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당시는 하나님께 제사(예배)하는 곳은 단 한 곳 실로에 있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사사기를 처음 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묻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1.1b) 그런데 단 지파에서 파송된 다섯 정탐꾼은 그가 [미가교회](Micah Church) 가짜 제사장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이 아닌 사이비 제사장에게 정탐 프로젝트의 성공 여부를 묻는다.

모양은 여호수아가 두 정탐을 보낸 것(2.1- )을 재현한 것 같은데 내용은 유사상표다. 이럴 수 있다. 뭔가 흉내를 내고, 구색을 갖추고, 과정을 수료하고, 연륜이 쌓이고, 그럴 듯해 보이고, 전통도 있고, 직분도 있고, 그런데 사도가 통찰했듯이 다섯 정탐꾼에게는 불법 제사장을 보는 가장 중요한 것이 없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3.5)

영적 전투에 임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능력(통찰력,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영적으로 분별하는 능력이 없으니 떠돌이 야바위꾼에 불과한 돌팔이 제사장이라도 붙잡아야 될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살아가는 것이다. 두통을 이겨낼 자력에 대한 자신감이 없으면 뭐라도 먹어야 치료될 것같은 느낌이 드는 것처럼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의 아편과 같은 거짓된 편리(실리, 실용)주의가 어느새 가나안 교회 깊은 곳까지 침노해 들어와 버렸다. 이런 무식한 성도들이 있으니까 무식한 제사장이 거룩한 행세를 하게 되는 것이다.

   

 

너희의 가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6b)

 

제사장은 한 술 더 뜬다. 그는 하나님을 경험한 적이 없는 사람이다. 떠돌이 약장수처럼 정처 없이 살다가 자신을 속이고, 미가를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면서까지 육신의 것을 취했던 타락한 성도일 뿐이다. 그런 그가 모든 죄와 허물을 제사장의 에봇 속에 감추고 진짜 행세를 하고 있다. 이러한 이중성은 레위인에게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미가와 그 어머니, 그리고 단 지파의 다섯 정탐꾼 모두에게서 노출되고 있다. 동시에 좀 지나칠 정도로 이중적이며 교묘하다는 것 외에는 나와 하등 다를 바 없는 지극히 인간적인 죄성 아닌가.

평안히 가십시오. 이 여정에 여호와께서 여러분을 보살펴 주실 것입니다.”(6) 이 소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는 시골뜨기 레위인의 티를 완전히 씻고 세련되고 깔끔한 모습으로 옷을 갈아 입었다. 그렇다고 그가 변하여 새사람이 된 것은 아니다. 그는 종교를 연습하여 연출(연극)하는 사람일 뿐이다. 마치 대본(臺本)을 암기한 배우처럼 이제는 제법 제사장이 된 것 같지만 실상은 속 빈 강정처럼 황폐한 심령의 소유자다.

주님의 말씀이 생각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7.21-23)

나 역시 사도의 고백처럼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고전9.27) 두려운 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사실 제사장에게 손가락질 할 여유가 없다. 문제는 나다. 하나님은 나의 이 땅에서의 어떤 성과물들을 보시고 나의 구원을 참작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나에게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인가?, 아니면 불법을 행하는 자인가? 이다.

사람들은 혹 속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럴 수 없다. 레위인은 영원한 것을 오늘이라는 시간 속으로 도적질하여 그럴 듯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유한하고 저 세상은 영원하다는 것까지를 계산했어야 했다. 그가 이 땅의 것들에 취해서 살아가는 동안 저 땅의 것들은 한 방울도 남지 않고 완전히 고갈되고 있다는 것에 무지한 만큼 그는 불행한 사람이다.

   

 

부스러기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 아침에도 가짜 제사장 요나단(18.30)이나

단 지파 때문에 하나님을 놓치는 그런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무리 악하고 추한 사람들과 대면한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그런 불신앙으로 나아가지 않기를 원합니다.

 

다 잘 되는 줄 알고,

그래서 그 다섯 정탐꾼들은 거기서 떠나 라이스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요나의 다시스로 가는 배(1.3)처럼 이들의 정탐 여정은 성공적이었고

-“하나님이 그 땅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10b)-

마침내 600명의 군사가 정복 프로젝트에 참가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이 부분이 함정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하는 단 지파가 안타깝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한 부분까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칫 잘못하면 어리석은 인생들은

이렇게 살아도 잘 되기만 하는구나!”라고 착각하기 쉽습니다.

저 역시 이 유혹을 이길 만큼 그렇게 강하지 못함을 주님이 더 잘 아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오로지 자신들의 목표와 원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돌팔이 제사장 요나단과 단 지파의 언행이 여러 면에서 마음에 걸립니다.

 

저 역시 이렇게 서서히 침몰해 가는 어리석은 인생은 아닌지요.

주님, 말씀해 주십시오.

내가 나를 알지 못하는데 내 어찌 하나님을 안다 할 수 있으리이까.

잘 되는 것 같을 때,

이게 정말 하나님의 인도하심인가를 상고하며 깨닫는 지혜와 은혜를 구합니다.

이거 아니면 저 역시 자행자지(字行自止)하다가 자멸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 도와주십시오.

쓰시려거든 고쳐서 쓰시옵소서.

다윗의 심정으로 아버지께 나아갑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51.10-11)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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