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부끄러운 이야기(삿 17.7-13)

20211204b(묵상)

  

 

 

참으로 부끄러운 이야기

Jdgs. 17.7-13

 

    본문 관찰

 

      7 유다 가족에 속한 유다 베들레헴에 한 청년 레위인으로서

      8 유다 베들레헴을 떠나 에브라임 산지로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매

      9 레위인(유다 청년) - 나는 유다 베들레헴의 레위인으로서 거류할 곳을 찾으러 가노라

    10 미가 - 나와 함께 거주하여 나를 위하여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12 레위인 - 미가의 제사장이 되어 그 집에 있었더라

    13 미가 -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레위인 소고(小考)

 

우선 모세오경의 도움을 받아야겠다.

그 이유는 본문에 등장하는 레위인때문이다. 레위인(Levites)은 성막 건축(38.21)과 운반 및 세움(1.47-54)이라는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는다. 레위인의 역할은 25~50세까지 제사장들을 수종드는 일을 위해 성막에서 봉사했다(3.5-10). 민수기 3장에 보면, 레위 지파의 세 가문의 가족들은 각각 특별한 책임을 맡았다. 게르손 자손은 성막 덮개와 줄 운반(21-26), 고핫 자손은 성막 기구 운반(27-31), 므라리 자손은 성막 구조물 운반(33-37)을 책임진다.

그러나 이들이 제사장은 아니다. 제사장직은 아론의 후손들이 담당한다. 출애굽기 28장에서 아론과 그 아들들은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아 성막에서 제사를 드리는 사역을 맡는다(1-5): “너는 이스라엘 자손 중 네 형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그와 함께 네게로 나아오게 하여 나를 섬기는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되, 그를 거룩하게 하여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28.1,3b) 그리고 레위기 81-13에서 제사장 위임식을 거행한다.

이것이 레위인과 제사장에 -이들의 역할과 임무와 기능은 분명하게 나누어져 있다- 대한 가장 기초적인 성경의 가르침이다. 한편 이스라엘 백성이면 누구나 자신이 어느 지파에 속하는지를 안다.

   

 

나는 유다 베들레헴의 레위인으로서 ”(9b)

 

그는 레위인이지만 제사장의 가문인 아론의 후손은 아닌 듯 싶다(18.30). 미가의 제사장 청빙의 변은 나를 위하여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10a)였는데 그가 제 정신의 사람이었다면 그는 이 요구가 얼마나 허무맹랑(虛無孟浪)한 수준이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인본주의적인 불신앙에서 비롯되었는가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청빙에 응하면 해마다 은 10개와 의복 한 벌과 먹을 것을 주리라.”(10b)는 보험 앞에 스스로를 삯꾼으로 타락시키는 것이다. 레위인이 제사장이 될 수 없다는 것쯤은 익히 알았으련만 물질에 눈이 어두워 뜨거운 감자를 그만 덥석 물고 만다. 참으로 한심한 목사가 아닐 수 없다(제사장 = 목사는 아니지만 단지 의미를 적용하는 것이다). 그는 지금 모든 면에서 함량이 미달인 사람이다. 단지 거할 곳을 찾아 고향을 떠나 이리저리 유랑하는 떠돌이 방랑객 레위인이었던 것이다. 또한 레위인으로서 살고 있지도 않다. 단지 법적으로 레위인일 뿐이다.

한 유력한 평신도에 빌붙어서 모진 목숨을 연명하는 꼴이 얼마나 못나 보이는지, 목사가 타락하면 이렇게 되나 보다 싶은 생각에 긴 한숨을 쉬며 이 정신나간 레위인을 생각할 때, 참 불쌍하다 싶은 생각이 든다. 이렇게 비굴하게 살아가는 사역자들이 있으니 세상 사람들은 둘째 치고라도 성도들로부터 발 밑에 밟히며 살아가는 자리까지 추락한 것 아닌가 하는 깊은 자괴감(自愧感)마저 든다.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사신화(私神化)하는 일에 미가(평신도)나 레위인(목사)이나 일반인 모습, 어제까지만 해도 무자격자인 레위인이 오늘 갑자기 제사장이 되는 현실, 이 일을 하나님 앞에서 자행하고 있는 대담성, 결국은 복 받겠다며 착각하고 있는 영적 무지, 이 모든 일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그래서 옳은 것이라고 속아 버릴 정도로 적절하게 구색을 갖추고 있는 <미가교회>와 목사인 레위인, 성도인 미가 -그러나 그는 절대로 자신을 성도라 생각하지 않고 있다. 제사장을 마음대로 세웠다 파했다 하는 판에 이 무슨 소리인가-, 그리고 그럴 듯하게 건축된 교회, 뭐 하나 부족한 것이 없다.

이후 이 레위인은 조그만 개척교회와 같은 미가의 가정교회에서 일약 <단지파 교회>의 청빙을 받아 한 족속이라는 큰 교회로 부임한다(18.27-31). 마침내 실로에 있는 <실로교회>와 쌍벽을 이루는 교회에 이 무자격자 돌팔이가 부임한 것이다. 그러니 미가의 입장에서 볼 때 얼마나 분통 터지겠는가. 죽 쒀서 누구 좋은 일 했다는 식으로, 그래서 목사는 믿을 게 못되! 조금만 좋은 자리 생기면 언제든지 갈 사람이야. 그러니 결국 우리들끼리 끝까지 교회를 지키고 유지할 수 밖에. 맡겨 놔 봐야 어디 되는 일 있던가.”라는 지극히 공식과도 같은 삼류소설로 귀결되는 것이다. 이것이 미가교회현대교회나 서로 다 같이 망하는 길이다. 서로가 다 속고 사는 것이다.

이렇게 살라고 교회, 목사, 성도의 만남을 주신 것이 아닌데, 이것이 내가 현재 느끼는 목사로서의 아픔이다. 동의하든 아니든, 옳든 싫든, 한국교회는 지금 이 길을 공식처럼 꾸준하게 밟아가고 있다. 이제는 아무도 목사라는 타이틀만으로 그 권위를 인정받지 못한다. 목회의 영역은 심각하게 도전 받고 있다: “제사장은 제사나 집례하라는 식으로 목사는 설교와 기도만 하고 나머지는 우리들 미가의 몫이니까 이 영역을 침범해 들어오려고 하지 마시오. 우리도 목회의 영역을 잠식해 들어가지 않을 테니까.” 교회는 병들고, 목회는 표류하고, 인간 심성은 점점 더 강팍해 지고, 끝없는 죄의 악순환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소설이나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다. 많은 경우 이것은 현실이다. 숲 속에 호랑이가 사라지면 토끼들이 뛴다. 하나님이 부재중인 사사기 교회를 보라. 죄를 지어서 하나님을 자신들 주변에서 쫓아 놓고서 -하나님은 죄를 지으면 인간을 떠나신다- 토끼 주제에 숲속의 왕자인냥 뛰는 미가와 레위인의 거룩한 착각을 보라(2,3,13). 하나님 두려워하는 신앙이 없으면 나 역시 이렇게 갈 수 있다.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13b)

 

미가를 보며 약간의 공포감을 느낀다. 불과 얼마 전에는 자기 아들을 제사장으로 삼아 버리더니 곧바로 제2대 제사장으로 훌쩍 넘어간다. 모든 게 자기 마음대로다. 초대 제사장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강제로 해임된 셈이다. 어떻든 제사장인데 그의 꼴이 참으로 우습다. 이처럼 미가는 세울 수도 있고, 교체할 수도 있고, 마음만 먹으면 교회 안에서 못 할 일이 없다. 참 대단한 힘을 가진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사람이다. 이게 평신도가 사라진 교회의 실상이다. 또한 목회가 사라진 교회의 모습이다.

아마 그는 교회를 주식회사(株式會社) 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어머니와 자신은 대주주(大株主)이고, 제사장은 전문경영인(고용사장), 그래서 제사장을 봉급쟁이로 이해한다(10). 자기 돈 준다고 생각하니 -교회 헌금을 자기 돈 쯤으로 믿고서 그걸 집행하는 무슨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있다- 제사장이 얼마나 우습고 만만해 보일까. 그러니까 주주총회와 같은 회의에서 모든 일은 결정되어야 하고, 또 결정하는 대로 시행해 주어야 하는 사람이 제사장이라고 생각하는 오만과 거들먹거림이 미가의 본죄(本罪). 제사장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그는 고용된 심부름꾼이기 때문에 잘못 보였다가는 초대 제사장처럼 하루 아침에 해고된다. 제사장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미가, 그야말로 주님의 교회를 세속화시키는 사탄의 하수인이다.

오늘 식으로 하면 그는 평신도다. 그런데 평신도가 목사를 마음대로 바꾸어 버린다. 이게 함정이다. 많은 평신도 지도자들이 착각하는 것은 이것이다. 예를 들어 목사가 공석이면 당연히 교회 중직자들이 목사를 청빙하게 되어 있다. 많이 양보해서 무수한 목사 중에 고를 수 있다는 것까지는 좋다. 그런데 이런 청빙이 몇 차례 반복되면 참 희한하고 못된 버릇이 생긴다. 목사를 우리가 모셔왔다는 이상한 기득권과 같은 상전 의식이다. 이것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누구 때문에 왔는데 감히 누구 말을 안 들어.”라며 미가처럼 제사장 길들이기에 나선다. 재정을 쥐고, 인사권에 관여하고, 목회를 간섭하며 이런 방법 저런 방식으로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다가 안 되면, 청빙도 우리 손에서 이루어졌으니 해임도 우리 손에서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덜 떨어진 제사장 하나 얼굴마담으로 세워 놓고 -미가는 그를 내 제사장이라 말한다(13a)-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주장하는, 무엇이든 마음만 먹으면 다 하는 미가를 보라. 그가 바로 평신도가 사라진 교회 안에 -아니, 제사장도 사라진 교회다- 독야청청(獨也靑靑) 뽐내며 혼자 예수 다 믿는 것처럼 행세하는 평신도 미가의 실상이다. 그러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13b)와 같은 돈키호테적 발상이 가능한 것 아니겠나 싶다.

제사장이 오죽이나 못나고 한심했으면 이렇게 되었겠나 싶으면서도 한국교회를 볼 때 미가와 같은 평신도가 점점 많아 질 뿐 아니라 그들에게 어떤 힘이 점점 강화되고 있음을 부정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동시에 미가의 등이나 슬슬 긁어주는 푼수 제사장이 양산되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미가와 같은 평신도들의 주장을 더욱 설득력 있게 강화시키는 것 역시 부메랑(boomerang)으로 거두어야 할 우리들의 몫은 아닌지, 이런 저런 생각이 든다.

   

 

부스러기 묵상

 

사사기 교회는 침몰하고 있다.

미가는 미가대로, 레위인은 레위인대로 각각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며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몰락해 가고 있다. 신앙이 순수성을 잃으면 어떻게 되는가를 주목하고 있는 중이다. 연륜이 쌓여가고, 더 많은 성경 지식이 있고, 반복적인 사사기 사이클의 연속임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고, 은화를 1,100개나 소유한 사람이 있을 정도로 그런 의미에서 축복 받은 사람들이 있음에도 어떻게 된 게 사사기 교회는 점점 돌아올 수 없는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참으로 사사기는 요지경이다. 사사시대인 우리 시대 역시 마찬가지다: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 소리 들려온다. 빛을 잃은 많은 사람, 길을 잃고 헤매이며, 탕자처럼 기진하니 믿는 자여 어이할꼬.”(찬송가 5151)

교회가 침몰하면 우리 역시 무사할 수 없다. 책임이 미가에 있다, 레위인에게 있다며 서로 정죄하며, 토론하며, 가부(可否)간에 투표하며, 결의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지금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의 방식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다. 하나님만이 희망이다. 5복음서인 자기복음서만을 고집하는 것은 서로 다같이 망하자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결국 사사기 교회의 희망은 하나님께로,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 시대의 교회의 희망이 있다면 말씀의 권위 앞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내 인생의 여백이 미가와 레위인처럼 채워지지 않도록 참으로 무거운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선다. 우리 시대의 교회를 이 모양으로 만든 공범(共犯)이라는 죄의식이 나를 아프게 한다. 다시, 하나님만이 희망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부흥만이 새롭게 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희망이다. 나는 이 진리를 믿는다. 내가 가야 할 길은 오직 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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