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일하신다(삿 9.22-33).

20211121a(묵상)

  

 

 

하나님이 일하신다.

Jdgs. 9.22-33

 

    본문 관찰

 

    22 아비멜렉이 이스라엘을 다스린지 3년에

    23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시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으니

  

 

삼년 정권

 

마침내 아비멜렉은 몰락한다.

그의 침몰은 너무 갑작스러워 보인다. 그리고 특별한 징후 없이 임한다. 그만큼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중요한 질문이다. 아비멜렉의 파국은 예고도 없이 너무 갑작스럽게 임한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이렇다.

   

 

3년짜리(22)

 

아비멜렉은 3년 동안 정권을 잡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3년이라는 단순한 시간이 아니다. 요담의 예언, 더 정확하게 말해 요담의 저주’(9.57)는 아비멜렉이 패망한 이후에 한 것이 아니고 그가 비정한 방법에 의해 스스로 왕이 된 직후에 선언되었다. 그리고 이 경고성 발언이 있고 난 지 3년이 되어서야 이 예언은 성취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아비멜렉에게 하나님은 두 가지 기회를 주셨다. 아비멜렉에게 있어 3년은 기회의 시간이다. 요담의 저주가 있자마자 곧바로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 것은 아니다. 이처럼 아비멜렉은 다음 두 가지 면에서 하나님께로부터 기회를 부여받았다.

먼저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아비멜렉이 잘못하고 있다고 요담의 입을 통해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아비멜렉은 얼마나 감사해야 할 형편인가.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하나님께서 그냥 아비멜렉의 인생에 기회의 시간을 주시지 않고서 곧장 개입해 들어오셨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행동하시기 전에 먼저 말씀하셨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심판을 행하시기에 앞서 언제나 말씀을 통해 일하시는 방식을 취하신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은 그 말씀의 집행을 3년이나 기다리셨다. 3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임박한 재림, 시작된 종말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이 두 가지가 다 은혜로 주어져 있다. 하나님은 지금도 집 나간 탕자를 기다리시는 아버지처럼 문 밖에 서서 기다리신다. 그러나 이 기다림은 끝없는 무한정한 시간이 아니다. 곧 혼인잔치의 문은 닫히는 때가 있을 것이다. 마치 노아의 방주 문이 닫혔던 것처럼 말이다.

아비멜렉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가 폐역한 죄악을 행한 이후에도 3년이나 하나님은 기다리셨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도, 하나님의 기다리심이라는 사랑도 거부한 채 자신의 인생길을 그냥 걸어가고 말았다. 그는 결코 핑계할 수 없다. 그는 무지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 기드온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던 사람이다.

그는 요담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하나님은 이처럼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어떻든 아비멜렉은 요담의 말을 들었음에도 하나님 없이 자신의 인생을 살기로 아예 작정해 버렸다. 그는 하나님을 거부한 것이다. 하나님 없이도 성공할 수 있고, 하나님 없이도 자신의 인생 시간표를 그려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세상은 원래 그러니까 그 부분은 그냥 두자. 지금 사사기의 배경은 가나안이고, 이스라엘 백성이다. 가나안에도,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 없이 성공하고, 자신의 인생 이력서를 만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하나님의 기다림은 시한부적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동시에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도 반드시 마지막 끝나는 시간이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공의로 완성되는 시간이 아비멜렉에게는 3년이었다. 이것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어떤 사람은 3일 일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30년 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반드시 그 끝이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직 아비멜렉처럼 만들지 않으시고 기다리고 계시는 기간만큼이 은혜다. 하지만 그 기다리심의 끝이 임박하고 있다. 주님의 재림이 그것이다. 주님이 천사장의 나팔과 호령으로 강림하시면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공의 앞에 서야 한다. 아무도 피할 수 없다.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다. 그러므로 지금은 기다리시는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나아갈 때다. 사랑이 공의로 바뀌기 전에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돌아설 때다. 지금이 회개의 때이다. 지금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을 때다. 이 사랑이 아니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철저한 자기 인식이 바로 은혜를 알고 경험하는 시발점이다.

   

 

세겜이 적()이 된다(23-25).

 

아비멜렉은 세겜 사람들의 힘을 빌려 왕이 되었다. 그런데 그들로부터 버림을 당하게 된다. 이 위험한 동거는 마침내 3년 만에 막을 내린다. 결국 적과의 동침인 셈이 되었다.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원수가 된다. 이게 세상 인심이다. 적은 가장 가까이에 있다. 우리의 대적은 우리의 심령 안에 있다. 마귀 사탄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다. 기억할 필요가 있다.

 

23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시매

하나님이 마침내 개입하신다. 하나님의 기다리심이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다. 사랑과 공의가 교차하고 있다. 하나님은 요담을 통해 아비멜렉에게 말씀하신 지 3년 만에 불의한 정권을 심판하신다. 인간은 불의마저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하나님은 당신의 공의를 집행하실 때 종종 사람들을 사용하신다. 이때 악을 이루는, 그러니까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되는 것은 불행이다. 성경은 이처럼 쓰임 받는 경우를 종종 언급한다. 애굽이 대표선수다. 하나님은 애굽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을 사용하신 것이 아니다. 애굽은 이스라엘을 사랑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뿐이다. 이 역할이 끝나면 반드시 하나님은 애굽을 심판하셨다. 이처럼 쓰임 받지 말자. 하나님은 악을 통해서도 선을 이루신다. 그럴지라도 악을 묵과하시지는 않으신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으니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된다. 참으로 기구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왜 갑자기 세겜 사람들이 이처럼 아비멜렉을 배반하는가? 그 이유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좀 더 깊이 묵상해 보면 그 이유의 실마리를 풀 수 있다. 그것은 22절의 다스린 지라는 단어에서 그렇다. 아비멜렉은 세겜을 폭력으로 지배하였다. 이것이 다스리다는 단어의 본 뜻이다. 이처럼 그는 스스로 화근을 만든 셈이다. 그는 독재자였다. 세겜을 이용해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한 후 아비멜렉은 세겜 위에 군림하였고, 그들을 폭정으로 억압하였다.

 

24

 

이는 여룹바알의 아들 70명에게 저지른 포학한 일을 갚되

하나님의 심판은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이 둘에게 시행된다. 세겜 역시 죄 없다 아니할 수 없다. 하나님은 기드온의 70명 아들에게 행한 아비멜렉의 포악한 일을 그냥 없는 것으로 덮어버릴 수 없으셨다. 심판은 매우 구체적으로 시작된다. 그것은 그들을 죽여 피 흘린 죄를 그들의 형제 아비멜렉과 아비멜렉의 손을 도와 그의 형제들을 죽이게 한 세겜 사람에게로 돌아가게 하심이라.”로 이어지는 말씀에서 분명해진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악을 심판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아비멜렉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성품 하나를 발견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악을 결코 그대로 두시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악의 결과가 어떻게 되는가를 철저하게 우리에게 들추어내심으로써 악의 편에 서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우치신다. 악의 편에 서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다 주는가를 깨닫는 것은 아비멜렉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이것을 다시 연습할 필요가 없다. 우리네 인생은 아비멜렉을 연습할 만큼 한가롭지 않다. 악은 연습으로 통해서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터득하는 것이 아니다. 악은 그것을 행하는 것으로 충분한 대가를 지불하게 되어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악을 심판하신다. 거룩은 악과 공존할 수 없다.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이 악으로 말미암아 훼손되는 것을 결코 원하시지 않으신다. 거룩은 하나님에 의해 지켜진다. 또한 거룩을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을 통해서 지켜진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거룩을 위해 악을 적극적으로 심판하심으로써 거룩을 적극적으로 보호하시고 보존하신다.

   

 

부스러기 묵상

 

하나님은 가나안의 거룩을 회복하신다.

아비멜렉과 세겜의 동거생활은 파국으로 끝난다. 하나님은 악을 이처럼 심판하심으로서 가나안이 거룩한 땅, 이스라엘이 거룩한 백성이 되는 쪽으로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 편에 서자. 거룩을 추구하자. 하나님의 거룩을 향해 나아가자. 거룩이 나의 삶을 지배하도록 하나님의 거룩을 입자. 이것이 가나안의 행복을 누리며 사는 길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가 이렇게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신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는 거룩이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도 죄악의 꽃은 피는가? 성경은 그렇다고 말한다. 인간은 죄를 심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을 심어 공의를 거두고, 공의를 심어 사랑을 거둔다. 하나님은 이 거룩한 일을 통해 가나안을 향하신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거룩해진 하나님의 백성 안에도 죄악의 꽃은 피는가? 부끄럽게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의인된 죄인이다. 아직 정복하지 못한 옛 성품의 씨앗들이 온 몸에 퍼지기 전에, 그리하여 회복 불능의 선언이 떨어지기 전에 말씀과 기도’(딤전4.5)로 거룩을 향한 불타는 열망이 다시금 새롭게 시작되도록 해야 한다. 그래, 한 번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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