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선지자의 설교(삿 6.1-10)

20211112(묵상)

   

 

 

한 선지자의 설교

Jdgs. 6.1-10

 

    본문 관찰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7년 동안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넘겨 주시니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으로 말미암아

       산에서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 자기들을 위하여 만들었으며

       이스라엘이 파종한 때면 그들이 그 땅에 들어와 멸하려 하니

    이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시니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며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여

       너희를 건져내고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니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셨다 하니라

  

 

미디안 막대기

 

다시금 처참한 이스라엘의 모습이 반복된다(1).

악행(惡行)의 결과에 따라 이번에는 미디안이 인생 막대기로 사용된다. 40년의 태평은 무너지고 다시 7년의 고난이 시작되었다. 평화가 복되고 귀할수록 고난은 더 커 보이는 법이다. 그러나 이것은 느낌만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고생은 지금까지 경험한 것과는 모든 면에서 달랐다. 이런 배경에서 기드온이 등장하면서 이스라엘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옷니엘 - 에훗 - 드보라 - [기드온] -아비멜렉 - 입다 - 삼손).

   

 

미디안 막대기(1-6)

 

이스라엘은 미디안에 쫓겨 산에서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 자기들을 위하여 만들었으며”(2), 씨앗을 파종하기만 하면 토지 소산을 멸하여 가나안 땅에 식물은 하나도 남아나지 않았다. 약속의 땅이 유리하는 통곡의 땅으로 변하였다. 역전된 가나안을 보라. 오히려 이스라엘이 미디안의 세력을 -미디안은 가라지다.- 강성하게 못하게 하기 위해 무수한 무리들로 부흥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반대로 완전히 역전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개인이나 교회나 거룩을 잃으면 이처럼 취급당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민감해야 하는 부분은 우리의 고통이 무엇 때문인가를 살피는 것이다. 많은 경우 고난이라는 결과만을 본 나머지 이스라엘처럼 산 것이 원인이 되어 이러한 결과가 나타났는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개인적으로 좌절하거나, 누구의 탓으로 돌리거나 하는 방식으로 핵심을 놓치는 경향이 많다. 이게 사사시대의 전형적인 죄의 반복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나를 더 생각해 보자. 이것은 고난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이스라엘은 고난 받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고난 받게 됨이다. 그러니까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다. 사도는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1.8b)고 말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죄 때문에 당하는 것, 그것이 고난일까? 고난이란 주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 때문에 그것이 오는 것이거나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 고난임을 알면서도 그것 앞에 당당히 서는 것이다.

주님도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셨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5.10-12), 또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10.29-30)라고 말씀하셨다.

   

 

한 설교자(7-10): 너희는 듣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예상대로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충분히 예상되는 흐름이다. 전형적인 사사기의 사이클이 그대로 반복된다. 이제는 더 깊어지는 순환은 하나의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좀 더 촘촘하게 생각해 보면서 우리가 놀라는 것은 이스라엘의 습관적인 타락도 타락이지만 이스라엘보다 하나님이 더 위대하시다는 점이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떠나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의 창을 닫지 않으신다. 이것이 하늘보다 넓고 넓은 하나님의 부성(父性)이다. 사사기 6장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이 패역하고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친 백성에게 한 선지자를 세우신다. 그리고 그 선지자는 하나님을 소개한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무지함이었다. 이것이 선지자의 지적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문제를 무기로 해결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진단은 우리와 다르며, 하나님의 방법은 세상 방정식과 결코 같지 않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말씀의 대사(大使)로 보내신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러한 채널을 통해 일하시기를 기뻐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한 선지자의 설교는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하나는 과거에 대한 회고와 명령(8-10a)이고, 다른 하나는 현재에 대한 진단이다(10b). 먼저 과거에 대한 회상과 그에 따라 말씀하셨던 부분이다. 이처럼 적절하게 개입하시는 것이 은혜다. 말씀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가 동시에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만큼 이스라엘에게는 희망의 증거이다.

 

    ① 나는 애굽의 종 되었던 집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냈다.

    ② 애굽과 너희를 학대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냈다.

    ③ 너희 앞에서 모든 대적들을 쫓아내었다.

    ④ 그리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었다.

    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다.

    ⑥ 그러니 너희의 거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섬기지 말라.

 

우리는 종종 받은 복-그러나 우리는 종종 받을 복만을 위해 믿음을 동원하는 경향이 있다- 새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어디에서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는가를 가늠하는 바로미터(barometer)가 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놓치고 있는 부분은, 그래서 과거와의 단절을 경험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죄는 이처럼 지난 날의 풍성했던 은혜의 경험으로부터 우리를 단절시킨다.

기억 속에만 남아 있는 하나님, 그것이 현재의 모습과 극명하게 대조되면서 오늘의 모습을 더욱 초라하게 연출해 내고 있다. 현재의 창에 비추어진 이스라엘의 과거가 위와 같다면, 그럼 지금은 어떠한가? 하나님의 진단은 이것이다: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내 말을 듣지 않은 너희들의 꼴이 뭐냐? 그 꼴 좋구나!”라는 지적이다.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을 말씀으로 책망하신다.

   

 

부스러기 기도

 

우리 역시 본문의 이스라엘과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는 그들의 후예가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 역시 준엄하게 질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대상이다. 우리의 연약함과 죄악됨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여지없이 들추어지기를 기도한다.

주의 백성들은 말씀으로부터 정밀진단을 받아야 한다. 나의 영적인 건강진단을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받고 싶다: 성령님! 나를 진찰해 주십시오. 습관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하는 나의 본성을 고치소서!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부패한 가나안을 향해 한 선지자를 세우신 하나님, 우리 역시 이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나팔수가 되기를 갈망한다. 자의적으로, 내가 고안해 낸, 땅의 소산으로서의 인간적인 말씀이 아니라 위로부터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토해 내는 자로 쓰임받기를 원한다. 그렇지 않고, 있으나 없으나 별반 주님께 도움이 되지 않는 자라면 지금이라도 저의 생명을 부르소서! 이 세상에서 살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한 선지자가 담대하게 이스라엘의 죄악을 숨김없이 선포했듯이 시류와, 사람과, 환경에 치우쳐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加減)하는 어리석은 설교자가 되기를 거부해야 한다. 말씀을 전하다가 스데반처럼 쓰임받는 영광이 있을지언정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쫓는 불행한 인생되지 않아야 한다!(7.54-60, 2.14) 주여! 나를 도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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