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벨의 아내 야엘(삿 4.6-24)

20211109(묵상)

  

 

 

헤벨의 아내 야엘

Jdgs. 4.6-24

 

    본문 관찰

 

    시스라가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에 이르렀으니

    하솔 왕 야빈과 겐 사람 헤벨의 집 사이에는 화평이 있음이라

    그가 깊이 잠드니

    헤벨의 아내 야엘이 가서 말뚝을 그의 관자놀이에 박으매

    말뚝이 꿰뚫고 땅에 박히니 그가 기절하여 죽으니라

    이스라엘 자손의 손이 가나안 왕 야빈을 점점 더 눌러서

    마침내 가나안 왕 야빈을 진멸하였더라

  

 

시스라 vs 야엘

 

시스라는 그렇게 살면 안되는구나!”라는 부정적 이미지만을 남기고 무대에서 사라진다.

그의 배역은 이것으로 끝이다. 그의 코에 호흡이 있을 때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은 그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무 것도 그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 되지 못했다. 이것이 하나님 없는 인생의 결론이다.

가나안에 살아도 그럴 수 있는가? 성경은 그럴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시대의 시스라의 후예들을 보라. 그들은 우리의 가장 가까이에 있을 수 있다. 교회에도, 가정에도, 직장에도, 내가 속한 공동체 안에 그런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가나안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발견하는 일에 실패한 무수한 인생들이 있었듯이 그리스도의 복음(福音) 곁에 있는 주변인들 가운데도 얼마든지 시스라의 후예는 양산될 수 있다.

   

 

시스라의 정체

 

시스라는 가나안 왕 야빈의 군대장관이다(2). 그는 9백승의 철병기를 앞세우고 기세 좋게 이스라엘을 20년 동안이나 심히 학대하였다(3). 그러나 그 역시 하나님이 세우신 사사 드보라 앞에서 힘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하루 아침에 몰락한다. 최고의 자리에서 패장(敗將)이 되어 도보로 도망하는 신세로 추락한 시스라, 그는 누구인가? 몇 가지 교훈들을 묵상해 본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불신자다. 하나님의 땅을 정복하여 그곳에 살고 있지만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한 믿음의 가정 안에 있는 불신자에 비유된다.

아무리 권력과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그것이 그를 구원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것들은 오히려 축복이 아니다. 결국 하나님을 느끼고, 깨닫고, 알고, 믿는 일을 위해 사용되지 못하는 모든 것은 무가치한 것들일 뿐이다.

자신이 하나님이 잠깐 들어 쓰시는 인생 채찍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자기가 똑똑하고, 유능하고, 그리고 잘났기 때문에 화려한 성공의 길을 달린다고 생각한다.

이미 패배하게 되어 있는 인생임을 모르고 오늘의 부귀영화(富貴榮華)에 취해 살아가는 무지한 인생이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독버섯처럼 자라난 죄의 상징이다.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부흥을 가로막는 사탄의 졸개다. 그러니까 말씀의 씨앗이 자라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열매를 거두어야 할 이스라엘이라는 좋은 땅이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사탄, 마귀, 시험꾼, 악한 기운과 같은 훼방자다(8.12-14).

자신의 가장 강점이 하나님께는 가장 큰 약점인 인생이다. 인생은 자신의 강점만을 본다. 그러나 하나님께 약점인 부분을 결코 보지 못한다. 이처럼 자기 의(self-righteousness)에 종속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장 강하다. 그러나 그는 가장 약하고 불쌍한 사람이다. 왜 그런가? 그의 종국(결론)은 이미 그 답이 나와 있으니까.

자신의 강한 것과 있는 것이 약한 것과 없는 것을 통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는데(고전1.27-28) 시스라가 꼭 그렇게 되었다. 세상은 시스라처럼 강자의 논리가 지배하지만 하나님은 약자의 논리를 준비하고 계셨다. 죄악의 꽃이 핀 가나안 안에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예비하신다. 시스라가 아무리 날뛰어도 하나님이 준비하신 사람은 은밀히 자라고, 또 자라게 하신다. 시스라의 비극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눈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눈뜬 소경이다. 동시에 영적으로 눈 먼 자다.

그는 과거 지향적인 사람이다(17). 지금은 전시(戰時)가 아닌가. 그리고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후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현재는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중 겐 사람 헤벨이 떠나”(11a) 시스라가 패전의 장수라는 모습으로 퇴로를 찾고 있는 그 길목에 있다. 그런데 시스라가 그 장막에 이르렀던 것이다. 우연인가?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의 섭리 속에도 우연이 있다는 말인가? 우리가 믿기로 하나님 안에는 우연이란 없다. 시스라는 과거의 관계 때문에 마음을 놓고 있지만 그러나 현재는 전쟁 중이다. 성경이 본문의 흐름과 별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11절을 마치 삽입구처럼 기술하고 있는 이유는 헤벨 가족이 게데스에 가까운 사아난님 상수리나무 곁에 이르러 장막을”(11b) 친 것 역시 하나님의 깊은 개입하심을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도구라는 기능으로 밖에 쓰이지 못했다. 마치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2.19)는 말씀에서 귀신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그가 구원 받을 수 없는 것처럼 이런 섭리적 도구들의 마지막은 심판이다. 인생의 가장 큰 비극은 가룟 유다나 사사기의 인생 채찍처럼 사용되는 것이다.

   

 

헤벨의 아내 야엘

 

한편, 한 무명의 여인이 사사기 4장에 등장한다. 시스라와 바락의 대결구조 속에 등장하는 야엘은 어떻게 보면 초라하다. 하나의 문학으로 이해할 때 -만약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작가의 동기는 어떤 것이었을까? 좀 더 성경의 근사치로 들어가서 볼 때 이 내용을 사사기 속에 넣어주신 하나님의 의도하심은 무엇일까? 궁금하다. 위에서 살펴본 처럼 하나님은 야엘을 오늘 본문에서처럼 사용하시기 위해서 미리 그 가족을 준비하신 것이 아닐까?

헤벨 가족은 과거에 야빈의 군대장관 하로셋 학고임에 거주하는 시스라”(2)와 어떻게 친분을 유지하며 지냈는지 잘 모른다. 그가 한 이 행동은 옳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사건마저도 당신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고 계시며, 헤벨의 입장에서 볼 때도 과거의 잘못과 결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은 분명하다. 하나님은 한 가족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면서, 이스라엘을 향한 당신의 뜻을 또한 이루신다.

헤벨의 아내 야엘은 전쟁이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그 중심에 사사 드보라가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과 가나안 안에 실현해 가는 거룩한 전쟁임을 깨닫게 되면서 과거에 하솔 왕 야빈과 화평하게 지낸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음이 분명하다. 그녀는 지혜로왔다. 그녀는 일련의 영적 흐름을 보면서 더 이상 시스라처럼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이 가져올 결과를 예측하였고, 그렇다면 현재와 미래를 위해 어떤 선택(결단)이 임박했음을 깨닫는다.

이것이 현재진행형 속에서 미래를 볼 수 있는 영적 통찰이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실력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지금도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신다(고전1.27).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묵상에 힘을 실어주는 부분은 이것이다. 바락이 시스라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믿음 없는 불신앙의 소리를 했을 때 드보라는 그에게 이렇게 선언한다: “그러나 네가 이번에 가는 일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9a)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말씀의 언약을 반드시 실행하시는 신실하신 분이시다. 그런 면에서 이 무명의 여인은 바락으로 하여금 어떻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역사를 섭리해 가시는가를 깨닫도록 만드는 전도자의 사명까지를 복되게 감당한다. 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위해 쓰임받는다는 것 말이다(22). 죄악의 꽃이 핀 가나안 안에서도 하나님은 이름 없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예비하신다. 유명한 바락이 무명한 야엘 앞에서 당하는 영적 무력감은 -“바락이 그에게 들어가 보니 시스라가 엎드려져 죽었고”(22b)- 상상만으로도 충분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져준다.

문제는 또 있다. 하나님은 승리하신다. 거기에서 우리 인생이 깨달아야 할 부분은 하나님이 펼쳐가시는 그림에서 우리가 놓치지 않고 통찰하는 그것만큼이 우리 몫이라는 점이다. 아무리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보여주시고, 말씀하시고, 성취해 가셔도 거기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호흡을 함께 느끼지 못하는 영성이라면 그건 진짜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기억하며 중보기도의 무릎으로 다시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야겠다.

   

 

부스러기 묵상

 

    “내가 주의 법도들을 영원히 잊지 아니하오니

      주께서 이것들 때문에 나를 살게 하심이니이다.”(119.93)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드보라에 의해 발탁된다(6a).

바락이 이처럼 등장하게 되는 전후 사정(상황)에 대한 특별한 정보는 없다. 하지만 사사기에 이름을 올리면서 사사와 동역(동행)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하지만 단지 거기까지다. 사사를 통해서 하나님 여호와께서명령하시고 이루심에도 불구하고(6,14-15), 어찌된 게 구경꾼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뒤에 따라오는 사사기의 후렴구,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라는 멜로디를 예감하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누구는 사사로 부름을 받아 쓰이고, 누구는 그와 동역자로 부름 받는다. 하지만 신통치가 않다. 결국에는 921절로 이루어지는 것을 22절에서 보는 것에서 그렇다. 왜 그런가. 무엇이 문제인가. 그 실마리가 8절이다. 그는 드보라를 통해 하나님이 앞서 행하실 것을 말씀하셨음에도 이를 믿지 않고 드보라만을 의지하고 거기에 소망을 둔 것이다. 이것이 사사기의 부끄러움이자 민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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