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11 - 기업 무를 자2: 보아스(룻 4.1-6)

양무리교회(20200927)-룻기강해11

  

 

 

기업 무를 자(2): 보아스

Ruth. 4.1-6

  

   본문 관찰

 

   1 마침 보아스의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4 내가 그것을 사라고 네게 말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내가 무르리라

   5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6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겠노라

   

 

고엘찾기: 보아스

 

   ▪1순위자: 아무개(‘그 기업 무를 자’)

   ▪2순위자: 보아스(살몬이 라합에게서 낳은 아들)

 

룻기는 4장에서 <고엘언약>을 지킬 수 있는 자격이 두 사람에게 있다고 말한다.

1순위자는 그 기업 무를 자로 소개되는 익명(匿名)의 아무개이고, 2순위자는 보아스다. 이 두 사람 가운데 룻을 통해 나오미의 꺼져가는 가정을 다시 회복하는 기업 무를 자’(redeemer)가 될 사람으로 가장 유력했던 아무개 씨는 그만 이 영광스럽고 복된 길을 포기했다. 전후 상황을 듣고는 손해라고 보았다. 자기 수준에서의 결정이다.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 주신 기회를 손해로 취급한 것이다. 그러니 딱 거기까지다. 그럼 이제 남은 자는 2순위자 보아스다.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성문에 올라가 거기에 앉았다(1). 무엇 때문이죠? 지나가는 사람 구경하려고? 어떤 음흉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음모를 꾸미려고? 다른 사람 골탕 먹이려고? 다 아니다. 그는 지금 오직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성문에 앉았다.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한 사람 룻과의 약속(3.11), 그러니까 다른 사람 때문에, 다른 사람을 위해서, 연약한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서 그곳까지 나아갔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룻과 언약을 맺은 것이다. 2순위자, 보아스는 어떤 사람인가?

 

 

1. 불리한 조건, 두 가지

 

하나는, 자신보다 순위가 높은 제1순위 기업 무를 자가 있는데, 그는 그 아무개가 누구인가를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누가 룻과 결혼하여 엘리멜렉의 가문을 이어가야 하는 자인가를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자신 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음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그는 자신에게 불리해 보이는 이러한 상황을 인위적으로 바꾸려 하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다름 아닌 말씀이 보아스에게 불리했다. 말씀이 이미 기업 무를 자의 순위를 결정해 주었는데 보아스는 우선순위자가 아니었다. 그것까지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말씀이 보아스의 계획을 가로막고 있는 셈이다.

 

12 “참으로 나는 기업을 무를 자이나 기업 무를 자로서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 13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워 있을지니라 하는지라.”(3.12-13)

 

종종 무엇인가를 하려고 하는데 그때 말씀이 이를 가로 막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 어떻게 하는가. 이럴 때 사람들은 흔히 자기에게 불리한 말씀이면 모르는 척 한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경험, 계획, 상식, 의도, 목표에 따라 행동하며 결정하게 된다. 기도하다가, 거기까지는 참 좋다. 그런데 기도해도 안 될 것 같으면 자기 방식대로 행동한다. 그러나 보아스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이 일이 진행되어야 하고, 말씀의 법이 지지하는 사람이, 말씀을 믿고 따르는 그 사람이 룻의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가장 중요한 원칙을 고수한다.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을 말씀 뒤에 놓는다. 그러고서 말씀대로 풀어간다. 보아스는 말씀보다 앞서지 않았다. 언제나 말씀 바로 뒤에 서서 말씀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고 있다. 그 역시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면서 말이다. 말씀이 오히려 불리한데도 그는 말씀을 앞세운다. 그렇다면 보아스는 지금 우리에게 이렇게 충고하면서 질문한다.

 

(1) 성공적인 삶을 살고 싶은가? 축복된 삶을 살고 싶은가? 그럼, 말씀보다 앞서지 말라. 말씀이 앞서면 따라가고, 말씀이 멈추면 함께 멈추고, 말씀이 입을 열면 목숨이 경각간에 있게 되거나 혹시 손해가 된다 할지라도 입을 열고, 말씀이 침묵하면 함께 침묵하라! 그 사람은 하나님이 성공을 보장하신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한 자만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6.33).

 

(2) 하나님께 쓰임 받고 싶은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말씀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외면하지 말라! 나의 기도가 필요한 사람, 나의 위로가 필요한 사람, 나의 격려가 필요한 사람, 전도가 필요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사람, 복음을 만나야 할 사람, 죄사함 받고 변하여 새사람이 되어야 할 사람, 세례와 성만찬을 통해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을 이루어야 할, 아니 회복해야 할 사람을 향해 보아스처럼 자신의 전부를 드릴 준비가 된 사람, 그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다.

 

 

2. 그는 자기 중심이 아니라 중심이다.

 

상대방을 먼저 생각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의 정신이다.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5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10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5.39-42)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15.12-14)

 

(1) 그래도 세상은 아직 살 만 한 가치가 있다. 왜냐? ‘가 아니라 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직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세상은 충분히 살 만 한 가치가 있다. 다같이 <놀부가>를 부르는 사사시대에 <흥부가>를 부르며 사는 자가 있다. 그래도 교회에는 아직 가슴이 따뜻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보아스처럼 세속에 물들지 않고,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그리하여 비록 고독하지만 하나님의 방법대로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경건한 삶을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는 그런 성도가 아직은 있다. 그래서 아직 교회는 희망이다.

 

 

3. 보아스는 순리대로, 정도(正道)를 걸어가는 믿음의 사람이다.

 

그는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지도 않았고, 그럴 생각은 일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힘과 권세, 즉 세상적인 얼굴을 동원해서 자기 목적을 성취하려고 하지 않았다. 더더욱 이러한 것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려고 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람과 환경을 바꾸지 않았다. 그렇다고 뒷짐지고 수동적인 자세로 살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보다 더 적극적으로 살았다. 왜 그랬는가?

 

(1)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섭리하실 것을 믿었다. 재산의 손해라고 하면 아무개만 손해이고, 보아스는 그럼 손해가 아닌가. 아니다. 아무개의 생각대로 하면 보아스 역시도 분명 손해나는 일이다. 큰 사업가가 이를 모를리 없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웠다. 룻보다도 룻 위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았다. 룻 때문에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았다. 보통 가난하고 없던 시절에, 그래서 병원 갈 형편도 되지 않았을 때에 엄마손은 약 손!”이었다. 그리고 형편이 된 지금은 그런 사람은 없다. 다들 돈이고 통장으로 해결한다. 지금 룻기가 사사시대임에도, 만석꾼 같은 부자여도 보아스는 하나님의 식대로 움직인다.

 

 

4. 보아스는 성읍 장로들을 청하여 기업 무를 자의 증인을 세우는 지혜로운 사람이다.

 

그는 말씀대로 증인을 세웠다. 물론 율법에는 두 세 증인으로 할 것을 명하였으나 그는 10인을 세움으로써 룻을 맞이하는 일이 결코 그 어떤 것들로도 취소될 수 없다는 확고한 의지를 나타내 보인다. 그는 빨리, 서두르다가 일을 망치지 않았다.

 

 

부스러기 묵상

 

인생은 언제나 두 지평 안에서 살아간다.

세상은 언제나 보아스의 식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다. 이것이 세상이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도 두 식이 공존한다.

 

세상방정식 vs 하나님의 나라(하나님식)

 

보아스는 지금 당장은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좋은 편을 선택하였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하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다 팔아 그 밭을 산 사람처럼, 말씀을 듣고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쫓았던 베드로처럼, 300 데나리온이나 되는 비싼 순전한 나드 옥합을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던 여인처럼, 뒤에 것은 잊어버리고 푯대를 향하여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향하여 달려갔던 바울처럼 오늘보다는 내일을 내일보다는 영원한 미래를 보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 편을 선택할 수 있다.

지금 이 코로나(COVID-19)에도 보아스처럼 하나님을 붙드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말씀을 준행하는 사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갈망하는 사람,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도, 그리고 내 안에서, 우리 가정에서, 우리 교회에서 이루어지기를 위해 말씀의 약속 앞에 엎드리는 사람,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가는 사람, 하나님의 면전에서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있다.

룻 앞에 두 사람이 서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전혀 다른 것을 보고 있다. 아직 제4막은 끝나지 않았다. 당신은 아무개의 후예인가, 아니면 보아스의 후예인가? 당신의 선택은 믿을 만 한 것인가?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 할 수 있는가? 이번 추석 연휴에 친척들과 가족들 사이에 나누는 대화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자세는 보아스여야 한다.

 

거룩한 것을 택하라. 손해 보는 일이라도 말씀이 명하는 것이라면 웃으면서 따르라. 이왕이면 다홍치마가 아니라 이왕이면 말씀대로여야 한다. 인생에 대해서는 AS가 불가능하다. 인생은 AS를 할 수 있는 전자제품이 아니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24.15)

 

아직 당신의 인생행로는 선택해야 할 무수한 문제들로 가득 차 있다. 아직 당신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아직 하나님의 길고 긴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무엇을 선택했는가? 이 시간에 대면해야 할 하나님의 질문이다. 오늘 보아스는 이에 대한 대답을 조금씩 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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