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떠나면 대용품을 찾는다(삿 18.14-20).

20211205b(묵상)

  

 

 

하나님을 떠나면 대용품을 찾는다.

Jdgs. 18.14-20

 

    본문 관찰

 

    18 제사장 - 너희가 무엇을 하느냐

    19 다섯 정탐 -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의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 한 지파의 제사장이 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낫겠느냐

    20 제사장 - 마음에 기뻐하여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우상을 받아 가지고

                      그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니라

 

 

단 지파

 

    “그런즉 이제 너희는 마땅히 행할 것을 생각하라!”(14b)

 

진짜 마땅히 행할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아닌 가짜를 없애고 혼돈의 땅이 되어 버린 그 약속의 땅 가나안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려드리는 것 아닐까.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이 명하신 것에는 무익(무능)하고 하나님이 금하신 것에는 담대하고도 용감()하다. 목적을 위해서는 어떤 수단(방법)도 가리지 않는 패륜적인 모양으로 일그러져 있다. 이게 다 176절이 만들어내는 후렴구다.

   

 

미가의 신상(14-18a)

 

단 지파 사람들이 미가의 집에 온 목적은 분명하다. 오늘 본문은 단 지파로 하여금 라이스 정탐 결과가 제사장의 공로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래서 다섯 정탐꾼과 단 지파의 600명 군사들은 전쟁에 앞서 이번에는 아예 그 새긴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과 부어 만든 신상을 취하기 위한 군사작전을 감행한다(15-18a). 이로써 정탐꾼의 고백(10)은 허구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가장 결정적일 때 하나님이 아니라 가짜를 택했다.

이처럼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면 대용품을 찾게 되어 있다. 이것은 공식과도 같다. 이미 쓰라린 실패를 경험(1.34-36)했던 그들이었는지라 겁도 났을 것이다.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이 서야 할 자리에 가짜를 보란듯이 의지하며 따르겠다는 것은 하나님 없이 살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단 지파는 거기까지 하나님을 떠났다. 그러니까 미가가 축복이라고 착각한 저주물(詛呪物)을 탈취해서라도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겠다고 막가는 언행을 하는 것이다.

한 사람 미가가 뿌린 죄악의 씨앗은 이제 가나안의 넓은 벌판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그는 자신이 망하는 것은 물론이고, 불쌍한 레위인과 급기야 단 지파까지 파멸로 이끄는 죄의 통로가 된다. 미가는 뿌렸고, 가짜 제사장은 물을 주고, 단 지파는 거두고 있다. 죄는 이처럼 무서운 속도와 기세로 확장되고 있다.

단 지파처럼 살아가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은 단 지파처럼 일한다. 자기 목적 성취를 위해서는 누구와도, 무엇과도, 언제라도 적당한 선에서 적절하게 타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가나안 교회는 이와같이 영적 무정부 상태에 빠져있다. 많이 양보해서, 그래 이렇게 해서 뭔가를 얻었다 치자. 당장은 좋겠지.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이런 죄와 비례해서 결국 영원한 것은 잃는다는 것을...

그러므로 지금 좋은 것이 꼭 옳은 것은 아니며, 당장 성공하고 형통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 꼭 내일에도 계속해서 그럴 것이라고 보장할 수 없다는 점을 함께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을 떠나면 인간이 잘 할 수 있는 것이란 죄 밖에 더 있을까. 이처럼 가나안은 회복불능 상태로 무너지는 중이다. 하나님이 없는 때의 참담한 모습이다.

   

 

가짜 제사장(18b-20)

 

가짜 제사장 역시 흥미롭다. 그는 무명의 떠돌이 레위인이었다. 우리가 나중에 알게 된 정보로는 돌팔이 제사장은 모세의 손자 게르손의 아들 요나단”(18.30)이라는 위인이다. 그의 가족들은 이스라엘이 이동할 때 성막 덮게와 줄을 운반(3.21-26)하는 책임을 맡은 가문이다. 그렇다면 제사장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본인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가의 파격적인 청빙 제의(17.10)를 물리치지 못하고 어느 날 갑자기 제사장의 반열에 오른다. 그는 실로’(18.31, 삼상1.3) 이외의 장소에 제사를 드리는 곳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파괴한다. 마침내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 아니라 사람에 불과한 미가라는 평신도에 의해서 제사장이 만들어지는 그야말로 해괴망측(駭怪罔測)한 종교놀음이 가나안 안에서 자행된다(17.12-13).

죄는 은밀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자라난다. 단 지파의 정탐꾼들 역시 그가 사이비 제사장이라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제사장 대우를 하게 되고(5), 이에 뒤질세라 무자격 제사장은 제법 제사장다운 티를 내며 제사장 행세를 한다(6). 참으로 놀랄 수 밖에 없는 그야말로 가관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그가 오늘은 다시 새로운 청빙을 받는다: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의 한 지파의 제사장이 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낫겠느냐?”(19b) 이렇듯 그는 레위인 미가의 가정 제사장 한 지파의 제사장으로 승승장구(乘勝長驅)한다. 그는 이 사악한 거래를 마음에 기뻐하여”(20a) 하루 아침에 말을 바꿔 탄다.

죄는 점점 더 자라고 있다. 그는 한 마디로 사명이 무엇이며, 소명이 무엇이며, 제사장의 임무와 역할이 무엇인지 도무지 모르는 무지한 사람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길이 아니면 가지 말아야 하는데 그의 끝없는 욕망이 그를 침몰시키고 있다. 유다의 경고를 귀 담아 듣는 아침이다: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1.11)

   

 

부스러기 묵상

 

오늘도 내 심령은 단 지파와 싸운다.

그리고 꼴도 보기 싫은 돌팔이 제사장과 싸운다. 이런 꼴통들을 보기 싫어서라도 빨리 사사기가 끝났음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진정한 싸움은 이것이다. 나도 단 지파나 돌팔이 제사장처럼 살아 버리고 싶은 유혹을 종종 받는다는 점, 이 꺼지지 않는 죄의 불씨가 다시 살아나려고 하는 낌새가 있음을 전혀 부정할 수 없음을 인하여, 부끄럽고 죄송하고 황송하고, 뭐 이런저런 생각이라는 내적 전쟁을 치르고 있다. 그래 옳다. 진짜 싸워야 할 대상은 타자(他者)가 아니라 나 자신이다.

신앙하며 산다는 것은 뭘까? 하나님을 이용하여 내 배 불리는 것, 하나님께 자신 없으면 딴 짓 하는 것, 가나안을 애굽처럼 만드는 것, 아마 최소한 이런 것들과 상관없이 사는 것 아닐까. 좀 손해 보아도 웃을 수 있고, 믿는다는 것에 방해가 되는 것들이라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고, 가나안에 살게 하심만으로도 행복해 하며 영원을 준비하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신앙하며 사는 사람의 가장 깊은 비밀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힘이 난다. 불쌍한 제사장은 이 비밀을 평생 모르고 살았겠지. 성공에 눈멀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나안을 죄 바다로 만들어 간 단 지파 역시 이 비밀을 몰랐겠지. 이건 비아냥이 아니다. 없는 자의 넋두리가 아니다. 결코 허풍이 아니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래 너희들 방식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 보아라. 더 많이 얻고, 너 많이 누리고, 더 높이 올라가고, 더 넓은 땅을 차지해도 진정한 샬롬이 무엇인지 모를 거다. 아무 것 없어도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면 금방 천국이 이루어지는 이 벅찬 비밀을 너희는 평생 알지 못하며 살거다. 때문에 비록 가나안에 있어도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는, 오히려 초라하고 불쌍한 너희들의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난 바닦에 있으나 하늘을 본단다.

이런 묵상을 하자 갑자기 깊은 영적 부담이 있다. 우리 시대에도 사악한 미가처럼, 타락한 제사장처럼, 꼴통 단 지파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일까? 오늘은 이 숙제를 주님께 검사 받아야 할 것 같다. 참 힘 빠지게 만드는 지루한 본문이 계속 반복되어도, 해서 가나안이 점점 황무할수록 하나님만이 희망임이 더 분명히 믿어지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르겠다. 그래, 오늘도 하나님만 보기로 했다. 해 보자.

 

 

제목 날짜
헤벨의 아내 야엘(삿 4.6-24) 2021.10.28
헌신이 먼저다(삿 6.25-28). 2021.11.08
한 선지자의 설교(삿 6.1-10) 2021.11.08
하나님이 일하신다(삿 9.22-33). 2021.11.17
하나님을 떠나면 대용품을 찾는다(삿 18.14-20). 2021.12.01
하나님만이 희망이다(삿 10.1-16). 2021.11.22
폭행일기.暴行日記(삿 19.16-30) 2021.12.06
침묵일기.沈黙日記(삿 21.13-25) 2021.12.13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삿 8.24-35). 2021.11.09
총회일기.總會日記(삿 20.1-11) 2021.12.07
참으로 부끄러운 이야기(삿 17.7-13) 2021.11.29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삿 18.1-13) 2021.11.29
정복신학.征服神學(삿 1.1-15) 2021.10.26
전쟁일기Ⅱ.戰爭日記Ⅱ(삿 20.24-48) 2021.12.07
전쟁일기Ⅰ.戰爭日記Ⅰ(삿 20.12-23) 2021.12.07
전쟁에도 신학이 있다(삿 6.29-40). 2021.11.08
잠자는 40년을 깨운다(삿 13.1-14). 2021.11.22
입다에게서 듣는다(삿 11.12-28). 2021.11.22
입다를 주목한다(삿 10.17-11.11). 2021.11.22
왼손잡이 사사 예훗(삿 3.12b--31) 2021.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