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신학.征服神學(삿 1.1-15)

20211101(묵상)

  

 

 

정복신학(征服神學)

Jdgs. 1.1-15

 

    본문 관찰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

    유다가 올라가매 쳤으니

    갈렙이 말하기를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점령하는 자에게는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 그것을 점령하였으므로

      갈렙이 그의 딸 악사를 그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계속되는 정복전쟁1

 

가나안 정복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들어있다.

그것은 단순히 땅을 차지하는 땅 빼앗기 싸움수준이 아니다. 하나님이 전쟁을 좋아하시는 것도 역시 아니다. 그럼 무엇인가?

   

 

1. 언약의 발전

 

여기에는 구속사(救贖史)의 깊이 흐르고 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아브라함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 창세기

수 백 년 전에, 역시 수 백 년 후에 이루어질 약속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아직은 약속에 불과하지만 이미거기까지 내다 보셨다: “네 자손은 4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 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15.16,18-21)

 

(2) 출애굽기와 민수기

이 약속의 성취가 출애굽이다. 출애굽은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인 셈이다: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3.8-10)

그리고 가나안 정복을 명하신다. 가나안 정복은 하나님의 요구와 이스라엘의 순종 사이의 계약과 같은 것이다(23.20-33). 이어 민수기에서는 다시 한 번 출애굽기의 언약이 재론되고 있다(33.50-56).

 

(3) 여호수아

가나안 정복이 시작된다. 이스라엘은 법궤를 앞세우고 요단을 건넌다(3-4). 이는 홍해 사건이후 세대들로 하여금 출애굽의 경험을 다시금 하게 함으로써 이 정복 전쟁이 단순히 영토를 빼앗는 생존을 위한 전쟁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마침내 할례를 행함으로써 거룩한 백성으로서 거룩한 전쟁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끝났다(5).

가나안 정복은 이처럼 전쟁을 통해 얻어진다(6). 그냥이 아니다.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하는, 전쟁을 통해 가나안은 조금씩 조금씩 정복하는 것만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이 성취되어진다.

정복 전쟁이 일단락된다(11.18-23). 그러나 불길한 불씨가 남아 있다. ‘모세언약을 지키지 못한 이스라엘이 아닌가: “여호수아가 그 모든 왕들과 싸운 지가 오랫동안이라. 기브온 주민 히위 족속 외에는 이스라엘 자손과 화친한 성읍이 하나도 없고 이스라엘 자손이 싸워서 다 점령하였으니, 그들의 마음이 완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을 진멸하여 바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들을 멸하려 하심이었더라. 그 때에 여호수아가 가서 산지와 헤브론과 드빌과 아납과 유다 온 산지와 이스라엘의 온 산지에서 아낙 사람들을 멸절하고 그가 또 그들의 성읍들을 진멸하여 바쳤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는 아낙 사람들이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고 가사와 가드와 아스돗에만 남았었더라.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온 땅을 점령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분에 따라 기업으로 주매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11.18-23)

여호수아 역시 마지막까지 동일한 권고를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앞날은 매우 불길할 수 밖에 없다. 과연 이 불씨가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23.3-8,12-13).

   

 

2. 그리고 사사기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가나안에 대한 완전정복(完全征服)’의 명령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 여호수아도 하지 못한 일이다. 그는 이 엄청난 숙제를 이스라엘에게 남기고 그만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만다. 여호수아 없는 이스라엘은 어떻게 될까요? 이것이 사사기로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느끼는 긴장 국면이다.

약속의 땅 가나안은 정복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또한 어려우면 그냥 슬슬 하거나, 정복하지 못한 곳이 있어도 되는 그런 싸움이 아니다. 만약 이런 결과가 나온다면 여호수아 이후가 어두울 수 밖에 없다. 우리는 그러한 기운을 여호수아서 곳곳에서 감지하게 된다.

   

 

올라가서 싸우리이까.

 

가나안 정복은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

그 땅에 들어갔으나 가나안 족속을 진멸해야 되는 명령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 이것이 여호수아 이후 이스라엘이 풀어가야 할 가장 중요한 사명이다. 그 사이에 여호수아가 죽는다(1a). 한 시대는 가고 또 다른 시대가 도래한다. 모세 여호수아로 이어지던 이스라엘의 지도자, 이제 과연 어떤 흐름으로 이 지도력이 계승될 것인가. 여호수아의 죽음은 사사기의 전체 배경이 된다.

이스라엘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1a) 하나님 앞으로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나아간다. 이것은 중요하다. 과연 무엇을 구할까: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1b) 사실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니다. 이미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가나안 정복의 명령(20.16-17)을 받았다. 그런데 이 사명은 아직 성취되지 못했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능력의 종 여호수아도 하지 못한 일이 아닌가.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문제를 아주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아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당면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직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전제한다.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하면 도대체 문제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이스라엘은 가장 핵심적인 기도를 드린다. 사실 구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았을까. 지도자 여호수아는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고 죽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가장 먼저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하나님이 명하신 가나안을 향한 위대한 사명을 붙잡고 있다.

   

 

유다 지파의 계속적인 정복전쟁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유다가 올라갈지니라.”(2a)

 

하나님의 응답이다. 구체적인 기도(질문)에 역시 구체적인 응답(대답)이 왔다. 하나님의 응답은 대단히 빨랐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구한 기도 제목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라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2b)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은 연속적이다. 여호수아에게 하신 약속이 여호수아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진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다.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다. 언약에 대한 재확증이다.

 

    유다가 올라가매(4)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4)

    예루살렘을 쳐서 점령하여 칼날로 치고 그 성을 불살랐으며(8)

    산지와 남방과 평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과 싸웠고(9)

    헤브론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을 쳐서(10)

    드빌의 주민들을 쳤으니(11)

   

 

부스러기 묵상

 

 

    [유다 자손]

    예루살렘을 쳐서 점령하여 칼날로 치고 그 성을 불살랐으며(8)

        ↔

    [베냐민 자손]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21)

 

유다와 베냐민의 대조가 흥미롭다.

예루살렘을 정복한 이야기를 두고 유다(8)와 베냐민(21)이 대조되는 것이 그렇다. 물론 유다 역시 얼마 후에 곧 베냐민처럼 되어버린다(19b).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철병거가 승리와 패배의 그림 안에 함께 드러나고 있음 또한 그냥 간과해 버리기에는 뭔가 있어 보인다. 이렇듯 승패(勝敗)의 배후에는 믿음과 불신앙이 숨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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