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삿 8.1-9).

20211117a(묵상)

  

 

 

시험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Jdgs. 8.1-9

 

    본문 관찰

 

    A - 항의하는 에브라임, 달래는 기드온(1-3)

    B - 숙곳과 브누엘의 거절, 기브온의 선전포고(4-9)

  

 

승자(勝者)에게도 시험은 있다.

 

시험은 전혀 의외의 상황에서 시작된다.

이처럼 시험은 우리를 고려해 주거나 기다려 주지 않는다. 시험은 예측되지 않는다. 그리고 시험은 종종 영적 안테나에도 잡히지도 않고 찾아온다. 기드온은 미디안 연합군을 격파하고 약간 남은 패잔병들을 좇고 있을 바로 그 때에 예기치 않은 복병을 만난다. 그것은 분명 시험이었다.

   

 

지파 갈등의 새 불씨(1-3)

 

뜻 밖에도 승리 이후의 시험은 에브라임 지파로부터 왔다. 에브라임은 여호수아가 속한 지파로써 모세(광야) 시대 이후 가나안 정복전쟁을 주도했던 빛나는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지파였다. 이들은 현재 사돈이 밭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우리네 속담처럼 뭔가 심사가 뒤틀려 있다. 격려하고, 수고를 치하해 주지는 못할망정 승전가를 부르는 기드온과 300 용사들을 맞이하는 개선식 치고는 야박하다 아니 할 수 없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주님의 말씀처럼 이웃 지파에게 받은 것이란 게 고작 시험이어서 그렇다.

밖에서는 승리했는데 안에서는 시험을 만난다. 시험은 내부에서 시작된다. 종종 우리가 동일하게 만나는 시험 역시 그렇다. 일이 잘 되지 않을 때도 설상가상으로 시험을 만나지만 순조롭고 형통할 때에도 이에 못지 않은 시험들이 거미줄처럼 우리를 포위한다. 잘 아는, 믿을 만 한, 나에게 전혀 그럴 수 없을 것이라는 가까운 사람에게서도 시험은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것이다. 사도의 교훈을 다시 새롭게 기억해 보자: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10.13) 하나님은 신실하신(‘미쁘사’) 분이시다.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없다. 그럼 왜 시험 앞에 넘어지고, 멍들고, 시험이 시험을 낳는 악순환을 반복하는가? 그것은 시험이 문제가 아니라 시험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문제여서다. 그렇다. 문제는 사람이다.

기드온은 승리의 감격과 환호에 취해서 분수를 모르고 행동하는 그런 사람으로 전락하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 성령 안에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가(6.34). 에브라임이라는 시험을 여유 있게 넘어서는 기드온을 보라: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2b) 그는 승리 뒤에 찾아올 수 있는 시험을 넉넉하게 제거한다. 강자(强者)에게 가장 큰 미덕이 있다면 그것은 겸손이다. 거기에서 권위와 힘이 나온다.

그는 누구보다 이 전쟁의 승리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혹시 백성들은 몰랐어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사실이 그렇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신뢰하고 믿는다면 결코 교만할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지 않는가. 나는 단지 하나님의 심부름꾼에 불과함을 잊지 않을 때 우리는 승리 뒤에 찾아오는 실패의 복병을 이길 수 있다.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기드온에게서 우리의 부족한 부분을 본다.

겸손하면 문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문제로 불거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문제가 지극히 작아 보인다. 문제는 그대론데 그 문제를 대면하는 나의 영적 상태에 따라 그것이 커 보이기도 하고, 작아 보이기도 하다. 기드온은 이미 다 이루었다. 사실 에브라임이 부정한다고 해서 그의 승리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에브라임의 주장을 보기 좋게 묵살시켰다고 해서 그의 승리가 더 커지거나 없던 전과(戰果)가 갑자기 생기는 것도 아니다. 이것을 지금 기드온이 놓치지 않고 있다. 그의 건강한 영성이 빛나는 부분이다. 좀 높은 곳에 올라가면 저 밑에 있는 것들이 그만그만한 법이다. 아옹다옹해 보아야 얻을 게 뭐 있나. 오늘도 좁쌀같은 것들은 기드온처럼 통과!’ 이렇게 넘어서면서 살아보자.

   

 

지파 갈등의 새 국면(4-9)

 

    A - “내가 들가시와 찔레로 너희 살을 찢으리라.”(7b)

    B -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에 이 망대를 헐리라.”(9b)

 

기드온이 상대해야 할 표적은 에브라임이 아니라 아직 남은 패잔병들이다. 그는 지금 진행되는 시간표의 우선순위를 환경 때문에 놓치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그리고 중단하지도 않는다. 생각해 봄직한 대목이 아닌지 싶다. 사실 많은 경우에 나는 에브라임이라는 복병에 발목잡혀 진짜 상대해야 할 표적을 놓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에브라임에게 머물러 있을수록 미디안 군사는 남아 있고, 그것만큼 가나안의 평화는 늦어지는 것이다. 사탄의 전략은 자기에게 맞추어진 영적 전쟁의 표적을 다른 쪽으로 향하도록 유도한다.

그러나 기드온은 이 사탄의 꼬임에 넘어가지 않는다. 그는 300명의 군사들과 함께 요단강을 건너 숙곳과 브누엘에 각각 도착한다. 몹시 지치고 피곤하였기에 형제들에게 떡덩이를 요청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갓 지파에 속한 숙곳 방백들과 브누엘 사람들이 기드온의 청을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한다. 이게 인심이다. 인생은 이처럼 무지하다. 바로 앞도 분간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지금 어떻게 기드온을 통해 일하시는가를 도대체 알지 못한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자칫 소수(300)를 지원했다가 다수(15,000vs 10)에게 곤욕을 치를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인간적인 계산은 하나님의 세계를 보는 눈을 차단해 버린다.

돌아가는 가나안의 정세와 현실을 보는 눈은 있었는지 몰라도 하나님을 보는 눈은 철저하게 닫혀 있는 사람들, 이들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의 시험꺼리’, ‘실험용밖에 되지 못한다. 바둑에 자충수(自充手)라는 용어가 있다.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은 자기들 인생에 스스로 시험이라는 돌을 놓아 가나안에서의 삶을 스스로 거덜내 버린다. 똑똑한 것 같고, 잘 한 일 같지만 그러나 이들의 행위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것이 영적 무지다. 하나님이 가장 위대하게 역사하는 현장에도 그것을 알지 못하는 영적 무지의 심령들이 당당하게 활보할 수 있다.

시험은 이처럼 무섭다. 기드온만이 시험을 만난 것이 아니다. 지금 숙곳과 부누엘 사람들도 똑같은 시험 앞에 서 있다. 그런데 한편은 시험에 넘어졌고, 다른 한편은 시험을 이긴다. 나 역시 숙곳 사람들처럼 행동할 수 있다. 이처럼 자기만 알고, 남의 고통과 아픔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의 행복을 위해서 네가 방해가 된다면 언제든지 네 이웃을 버릴 수 있는 사람, 한 피를 나눈 동족의 고통을 외면하고도 아무 일 없기를 바라는 사람, 한 끼 식사를 위해서는 수 십 만원도 아깝지 않으면서 이웃사랑을 위해서는 지폐 중에서 천원권을 고르는 사람, 자신은 공동체가 치르는 영적 전쟁을 위해 아무 대가도 지불하지 않았으면서 오직 하는 것이란 이러쿵 저러쿵 입술놀림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 그 사람에게는 화 있을찐저가 기다릴 것이다. 하나님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비밀같은 사실이지만 교회 안에도 에브라임-갓 지파 사람들이 있다. 본인도 불행이요, 교회도 불행이다.

어떤 의미에서 행복도 불행도 다 자기 몫이다. 다시 기드온으로 돌아와서, 이런 상황인데도 그는 시험의 초점을 분산시키지 않는다. 쉽게 말하면 두 마리의 토끼를 좇지 않는다. 시험은 사람을 추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기드온은 이 모든 시험 앞에 피할 길을 내사 능히 담당하게하시는 주님께 꼭 붙들려 있다. 시험이 자신을 주관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자신을 인도하시도록 시험 앞에서도 하나님을 잊지 않는 건강한 기드온을 만난다. 그리하여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엄습해 오는 시험 앞에서 변함없이 빛나는 기드온, 그는 오늘도 인생항로의 시험 앞에 서 있는 우리를 격려하며 계속해서 시험파괴의 행진을 계속한다.

   

 

부스러기 묵상

 

시험 없는 인생은 없다.

성경의 모든 인물은 시험이라는 용광로에서 재련된 경쟁력 있는 인품(人品)들이다. 온실에서 무기력하게 자란 사람들이 아니다. 세상이라는 거치른 들판에서 비바람과 산전수전(山戰水戰)을 다 겪으며 자란 들풀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시험을 오히려 축복의 기회로 만들었으며, 시험이라는 파도타기를 여유있게 감당한 멋진 선배들이다.

나는 언젠가부터 시험과 고난이라는 씨앗이 내 안에 시작되면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 하나님께서 뭔가 또 일을 시작하시는구나! 이번에는 무엇을 주시려고 그러실까?” 그러면서 가슴이 뛴다. 사실이다. 따라서 어차피 오늘도 내가 치루어야 할 시험 앞에 설 수 밖에 없다면 좀 더 당당하게, 바르게, 힘있게 서는 은혜를 구한다. 결코 시험을 피하려고만 하지 말자.

주님은 시험이 없기를 구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주님도 친히 시험을 받으셨듯이(4.1-11) 시험은 누구나에게 다 있다. 이것은 지극히 정상이다. 시험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시험 없는 인생은 없다. 그러나 문제는 시험이 아니라 시험 그 이후가 문제다. 기드온의 시험 그 이후는 매우 건강함을 본다. 우리 역시 그래야 하지 않을까 싶다. 시험에 패해서 늘상 질질 짜고, 침체되어 방황하고, 패가망신(敗家亡身) 당하고, 세상 앞에 창피한 꼴 당하기 전에 미리미리 정신 차려야겠다. 주께서 고린도전서 1013절 말씀이 내 안에도 성취되도록 이끄시기를 간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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