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손을 보며 성도를 생각한다(삿 15.14-20).

20211201b(묵상)

  

 

 

삼손을 보며 성도를 생각한다.

Jdgs. 15.14-20

 

    본문 관찰

 

    14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15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그것으로 1,000명을 죽이고

    18 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19 하나님이 레히에서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20 블레셋 사람의 때에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20년 동안 지냈더라

  

 

삼손 변주곡 제2악장 - 계속

 

2악장이 마무리 될 즈음에 뭔가 희망의 멜로디가 시작된다.

그것은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14)라는 전혀 새로운 소절(小節)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그러면 그렇지! , 마침내 삼손이 회개하고 다시 돌아왔구나!”라고 생각하며 온 회중(교회)이 그를 기쁨으로 맞이하는 그림을 그린다.

사실 삼손은 아무 자격(공로) 없어도 -나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은혜를 입게 된다(15-17). 비록 온전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을 그를 들어 블레셋을 심판하는 일에 쓰신다. 삼손이 잘났거나 똑똑해서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잘 해서 하나님이 쓰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놀라운 착각일 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가 우려했던 문제가 발생했다. 삼손은 큰소리를 지른다(18). 뭔가를 했다는 식이다. 자신을 좀 알아 달라는 식이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 신앙공동체 안에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영적인 백수건달(白手乾達)이 단순한 종교적 열심만으로 무장하면 꼭 이렇게 행세한다. 훈련과 성장과 성숙이 동반되지 않는 직분은 그래서 위험하다.

하나님이 임했는데 목말라 죽을지 모른다고 소리 지른다(14,18). 마치 풍랑 만난 배에서 -예수님도 계셨다- 죽겠다고 소리지르는 제자들과 같다(8.22-25). 하나님(장조)과 인간(단조)의 극한 대조이다. 삼손은 오직 자신의 목숨을 위해서, 자신의 필요(need)를 위해서 하나님께 고한다. 그는 한 번도 타락한 민족을 위해, 가나안의 부흥을 위해, 자신의 사명 감당을 위해 부르짖은 적이 없다. 반면에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결코 고하지 않았던 사람이다(14.6,9,16). 그러나 반대로 이방의 기생 앞에서는 하나님의 비밀을 고해 버렸던 사람이다(14.17). 이처럼 오직 자신의 필요만을 위해 구하는 사람이었다. 어디 삼손뿐인가?

그럼에도 하나님은 삼손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신다(19). 하나님은 삼손 변주곡에 진노와 심판의 음표(音標)로 개입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자행자지(自行自止)하는 삼손을 넉넉한 가슴으로 품으신다. 모태신앙(母胎信仰) 삼손은 언제나 철부지 신세를 면하게 될지, 어느 때나 사사로서의 자기 신분에 걸맞은 수준의 사람으로 자기 몫(구실)을 할지, 삼손을 보면서 나를 본다.

 

 

삼손 에피소드

 

사사기의 무대는 약속의 땅 가나안이다. 오늘 이 부분을 다시 주목한다. 삼손은 태어나기 전부터 기묘자’(13.18)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하신 은총을 맛 볼 정도로 사시기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사사기 안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성령의 감동을 받으며 사사로 부르심을 받는다. 그런 그가 어이없게도 육적인 것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몰락한다. 그는 이렇게 살아야 할 사람으로 13장이 준비된 것이 아니다.

 

1. 그리스도인 역시 삼손처럼 이중성을 가지고 살 수 있다.

 

가나안에도 삼손처럼 사는 사람이 있다. 우리가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가나안에서도 삼손처럼 살 수 있는가? 성경은 그럴 수 있다고 증거한다. 1325~ 1514절이라는 하나님의 영사이에서 141-4,7-10,16절처럼 살 수 있다는데 씻을 수 없는 딜레마가 있다. 이것이 성도의 이중성이다.

또한 하나님의 영에 감동을 받은 사람도 삼손처럼 살 수 있는가? 삼손은 성령과 자아의 끈질긴 대결을 시도한다. 13장에서 14장으로 전개되는 삼손 이야기가 그렇다. 여기서 우리는 삼손에게서만이 아니라 우리에게서도 동일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의 욕망에서 시작하여 성령으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전락하였다는 점이다(5.16-18, 6.7-8). 그는 이 두 모습을 끝까지 공존시키면서 자신을 점점 소멸해 가는 사람으로 살아갔다는데 그 심각성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위험하며, 자신을 결국에는 파멸로 몰아가는 씨앗인가를 그는 몰랐다. 그것만큼 너무 쉽게 자신의 신분에 취해서 수준 낮은 초신자의 모습으로 자신에게 부여된 거룩한 신분과 수준을 철저히 망각하며 살았다.

어쩌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살아간다고 볼 수 있다. 신분은 13장으로, 그러나 수준은 14장으로 말이다. 이것은 생각보다 치명적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13장의 삼손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그가 14장처럼 살아가는 것만큼이 13장으로 되돌리려는 하나님의 표적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이다. 아무리 삼손이 자기 멋대로 살았어도 하나님께서 끝까지 그를 포기하지 않으신 점을 기억해야 한다. 삼손이 순순히 13장으로 복귀하지 않은 것만큼 그는 그의 인생에서 값비싼 수업료를 지불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2. 결국 삼손처럼 살아가는 성도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이다.

 

삼손처럼 사는 것만큼이 고달프고 고통과 시련의 연속이라는 점이다. 거룩한 신분에 있는 성도가 그것으로 말미암은 거룩한 수준을 유지하지 못하면 그는 삼손처럼 부르심을 받았으나 삼손처럼 살게 될 수 밖에 없다. 유감스럽게도 삼손은 소중했던 자신의 일생을 자신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실습해 준 것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바울처럼 고백하며 살지 않는 한 소망은 없다.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강하지 않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약함을 가지고 나아가 통곡하지 않는다면 그만큼 그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초라하게 자리할 수 밖에 없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7.18-8:2)

 

가나안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같은 의미로써 예수를 믿고, 성령님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구호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죄와 싸워 승리할 능력이 없으면 우리는 삼손처럼 한마디로 웃기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만다. 얼마나 고달프고 비참한가.

삼손은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그림자다. 하나님은 13장처럼 우리를 부르셨다. 그러므로 14장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 세상은 언제나 우리를 14장처럼 유혹하면서 넘어뜨리려고 별의별 방법들을 시도한다. 13장의 삼손으로 시작했어도 14장 이하의 삼손으로 끝날 수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기억해야 한다.

그럼에도 삼손 변주곡은 도중에 중단되거나 끝나버리지 않는다. 부끄럽게 살지만 오늘까지 내 코에 호흡을 주시는 것 역시 마찬가지 의미일 것이라는 생각, 떨리는 마음으로 붙잡는다. 삼손 변주곡 제2악장(15)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과연 마지막 제3악장(16)은 어떻게 연주될까? 오히려 삼손보다 더 긴장되는 이유는 왜일까? 그 이유가 알 듯 모를 듯 한 묘한 여운으로 남는다.

 

   

제목 날짜
삼손을 보며 성도를 생각한다(삿 15.14-20). 2021.11.29
삼손@들릴라를 Click한다(삿 16.1-14). 2021.11.29
삼손, 그 부끄러운 이야기(삿 16.15-22) 2021.11.29
삼손은 죽어서 말한다(삿 16.23-31). 2021.11.29
미가의 사이비성을 주목한다(삿 17.1-6). 2021.11.29
참으로 부끄러운 이야기(삿 17.7-13) 2021.11.29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삿 18.1-13) 2021.11.29
하나님을 떠나면 대용품을 찾는다(삿 18.14-20). 2021.12.01
미가와 단 지파의 인생이력서(삿 18.21-31) 2021.12.02
애첩일기.愛妾日記(삿 19.1-15) 2021.12.06
폭행일기.暴行日記(삿 19.16-30) 2021.12.06
총회일기.總會日記(삿 20.1-11) 2021.12.07
전쟁일기Ⅰ.戰爭日記Ⅰ(삿 20.12-23) 2021.12.07
전쟁일기Ⅱ.戰爭日記Ⅱ(삿 20.24-48) 2021.12.07
맹세일기.盟誓日記(삿 21.1-12) 2021.12.07
21 하나님이 하십니다(수 24.1-13). 2021.12.13
침묵일기.沈黙日記(삿 21.13-25) 2021.12.13
사사기에는 신학이 있다(삿 21.25). 2021.12.13
22 여호수아의 영성, 나의 고백(수 24.14-33) 2021.12.25
사무엘상 맥잡기 2022.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