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아이대첩①: 왜 패배인가?(수 7.1-9)

20210502(양무리교회)-강해09

 

 

 

아이대첩: 왜 패배인가?

Josh. 7.1-9

 

    본문 관찰

 

    이스라엘 자손들이 범죄하였으니

    이는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백성 중 3천명쯤 그리로 올라갔다가

          아이 앞에서 도망하니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된지라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저물도록 있다가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 하나이까

  

 

왜 실패인가?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1a)

 

가나안을 정복하고, 거기서 안식을 누리는 것은 조건적이다.

여기서 조건이란,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킬 때 약속의 땅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만일 언약의 장소인 성지(聖地) 가나안에서 언약을 파기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아간의 사건이다(7). 가나안일지라도 범죄하면 그 값을 반드시 지불해야만 한다. 물론 이 원리(법칙)는 그리스도 안에서도 동일하다.

   

 

뜻밖의 실패, 예고된 패배(1-5): 하나님이 없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범죄하였으니”(1a)  

    ▪여호수아사람을 보내며 그들에게 말하여 ”(2a)

    ▪그 사람들여호수아에게 이르되 ”(2b-3)

    ▪백성 3,000명쯤 올라갔다가 아이 사람 앞에서 도망하니”(4)

   

여리고의 승자(勝者)가 아이성의 패자(敗者)가 되었다. 이스라엘은 큰 충격을 받는다. 가나안에서도 실패할 수 있는가. 어제의 승리가 오늘의 승리를 보증하지 않으며, 또한 승리는 자동적으로 얻어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실패의 배후에 ’()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어서다(1). 아간의 죄는 누룩처럼 번져 36명이나 희생되는 불행을 초래하였고(5), 이스라엘 모두에게 하나님의 진노와 실패를 경험하게 했으며, 더 나아가 자신과 가족의 죽음으로까지 확장되었다(11,20-21). 그러나 결정적인 문제는 아직 이스라엘(여호수아)이 실패의 원인을 모르고 있고, 그것보다 이미 패배해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다 알고 시작하셨음에도 말이다(1).

 

    [하나님의 언약]: 아브라함 언약의 실천편

    “이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

      그 바친 것 중에서 어떤 것이든지 취하여

      이스라엘 진영으로 바치는 것이 되게 하여 고통을 당하게 되지 아니하도록

      너희는 그 바친 물건에 손대지 말라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된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지니라.”(6.17a,18-19)

 

한편 여리고 정복이 있기 전 여호수아는 6장에서 온 백성에게 이 전쟁의 영적 의미와 기준을 위와 같이 선명하게 가르쳤다. 흥미로운 것은 가나안의 라합은 그저 풍문으로 전달되어 온 이스라엘의 소식을 듣고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로 자신을 겸손히 낮추었는데, 하지만 뼈대 있는 유다 지파 가문의 아들인 아간(1)은 여호수아를 통해서 정복과 전쟁에 들어있는 가나안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설교를 이미 들었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역한다. 무엇보다 한 사람의 불순종이 이스라엘 진영으로 바치는 것이 되게 하여 고통을 당하게”(18b), 즉 그 사람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가 파괴되는 대가를 지불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들었음에도 말이다.

자신이야 범죄한 결과에 대한 응분의 처분을 받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다. 하지만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전체가 고통과 실패를 맛보아야 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국면이다. 아간은 모두가 다 망할지라도 자기 자신 하나만 잘되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는 것쯤이야 상관하지 않겠다는 심보다. 이처럼 나 하나의 유익과 안락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실패를 담보하면서까지 은밀하고도 치밀한 범죄를 진행한다면 이것은 미친 짓이며, 너무나도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처신이다.

어떻든 이유를 모르고 있으니까 뜻밖의 패배처럼 느껴지지만, 그러나 예고(예정)된 패배였다. 여리고성을 정복하고 승리에 취해 있는 이스라엘과 여호수아를 보라. 사실 이 승리는 자신들의 전쟁 수행능력이나 전술의 탁월함에 의해서 얻어진 것이 아님을 냉정하게 살펴볼 수 있었어야 했다. 하지만 저들 모두는 이 일에 실패하였다.

먼저, 여호수아는 실패 뒤에 기도하였다면(6-9), 무엇보다 승리 뒤에 이 일을 이루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렸어야 했다. 여리고성의 정복은 여호와께서’(6.2a)로 시작되지만 아이성의 정복은 여호수아가’(2a)로 시작된다. 여호수아는 기도하지 않았다. 여리고성 승리의 여세를 몰아 단숨에 아이성을 넘어야겠다고, 아니 이 정도는 너끈하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종종 승리는 영적 균형(평정심)을 유지하는 일을 기우뚱거리게 만들곤 한다. 앞서 여리고성 정복에서는 정복에 앞서 유월절을 지켰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선 장면이 여호수아에게 있었다(5.10-12 5.13-15 6.1-21). 그러나 이번 아이성 정복에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살필만 한 준비도(1a), 여리고성 정복에 대한 하나님의 결론을 들을만 한 여유도 없었다(1b). 하나님은 진노하고 계시는데(1) 이스라엘은 승리의 기쁨에만 취해 있다. 이것이 성공 뒤에 하나님이 공백인 사람들의 특징이다.

둘째, 하나님께 물어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이성은 3천 명의 군사들의 싸움으로 얻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법궤가 앞섰던 여리고성 정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이미 하나님은 진노 중이심에도, 설상가상으로 하나님(언약궤를 앞세움) 없이 정복 전쟁을 치르겠다고 아우성이고, 실제로 하나님과 전혀 무관한 싸움을 시작한다. 실패할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좋지만 삶이란 자기 열심이나 자기 확신만으로 일이 다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여호수아의 탄원서(6-9): 패배 너머에서 실패를 끊어내다.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려 저물도록 있다가”(6)

 

실패 후의 여호수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는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려 회개하며 기도한다. 실패하자마자 회개하고, 그리고 기도를 드리고, 기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면서 철저하리만큼 절제한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입을 다물고 말을 아끼면서 저물도록 있다가”(6b) 비로소 입을 연다(7-9). 날이 저물 때까지 많은 시간을 하나님 앞에 머물러 있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골몰한다. 이때가 바로 실패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순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호수아는 매우 건강한 지도자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만났을 때 보이는 보통의 향방 없이 휘청거리는 성숙하지 못한 태도에 비하면 여호수아의 깔끔한 처신이 부럽기까지 하다. 사실 그는 고독하고 외로웠을 것이다. 모세를 이어 지도자가 된 지 불과 얼마 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만난 위기는 물론 그것을 넘기에는 너무 벅찬 일이었다.

문제는 정작 이스라엘이 왜 실패했는지 그 이유를 모른다는. 실패를 가정한 시나리오를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실패를 만나본 일도 없었다. 그는 모세를 도와 섬기던 광야시절부터 실패를 모르고 여기까지 왔던 최고경영자(CEO). 그러니 어찌하여!”(7a)를 목 놓아 외칠 수 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

이는 하나님의 찾아오심으로 이어진다(11). 이스라엘의 실패와 하나님의 찾아오심, 그 사이에 서 있는 여호수아, 그것도 기도하는 자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있는 그의 모습이 얼마나 든든하고 안심이 되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실패 그 뒤를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가를 여호수아만큼 적절하고 정확하게 가르쳐 주는 경우를 만나는 것은 그리 쉽지는 않기 때문이다.

범죄한 이스라엘에게 여호수아처럼 접근하는 자가 필요했듯이 여호수아처럼 하나님께 아뢰고,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문제의 원인을 찾아낼 역할을 맡아 줄 사람, 그런 지도자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서고 싶다. 과거 때문에 우왕좌왕(右往左往) 하면서 현재의 좌표를 잃어버리고, 급기야 미래로 가는 길을 놓쳐버리는 그런 우매함으로부터 여호수아처럼 일찌감치 비껴 설 수 있었으면 좋겠다.

실패를 바라보는 여호수아의 눈이 퍽이나 복되다 싶다. 실패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우연이나 재수 없는 일로 치부해 버리거나, 비관과 절망을 넘어 자포자기(自暴自棄)해 버리거나,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막가는 경향이 농후하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마치 자기가 범죄하여, 자기가 무능하여,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있어서, 그래서 실패를 그대로 현실로 받아들이고, 그렇다면 이를 통해 하나님은 무엇을 목표하고 계시는가에 주목한다. 그는 한마디로 하나님 앞에서 아이성의 실패를 이해해 보고 싶어 한다.

   

 

부스러기 묵상

 

가나안 정복은 하나님의 언약궤가 앞서는 전쟁으로 시작된다.

놀라운 것은 군대의 힘으로가 아니라 일곱 제사장들의 양각 나팔소리와 백성들의 순종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가나안에서 유일하게 실패한 전쟁이 있다. 그것은 아이성 전쟁이다. 그렇다면 왜 실패인가. 이것은 다시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중요하다. 실패의 원인들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 영성이 아닌가.

우리의 인생이 아이성처럼 뜻밖의 실패로 무너져 내리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원인 없는 결과 없다. 값비싼 수업료를 지불해서라도 이스라엘(‘’)이 더 이상 가나안에서 실패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하나님은 실패를 건너뛰게 만드시지 않고 실패를 경험케 하신다. 당장은 시리고 아프지만, 이것이 고난이 곧 유익인 이유다.

 

실패 너머에서 실패를 끊어내다.

여호수아에게 머리 숙여 배우는 것이 있다면 실패 그 이후의 모습이다. 그는 곧바로 하나님의 면전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는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받아든 참담한 결과를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지만,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왜소함이 가엽게 보이지만, 그럼에도 해답이 하나님께 있음을 아는 만큼 그분 앞으로 나아가는 여호수아, 사실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이것이 가장 빠른 해법이 아니겠는가.

어떤 일을 만났을 때 그것을 처리하는 것이 그의 신앙이고 영적 용량이다. 실패의 원인은 분명 이스라엘에게 있지만, 그러나 실패를 보고 계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만으로 살았던 영적 거인들의 발자국을 보면 그들은 모두 실패라는 용광로에서 재련된 사람들이다.

실패만 보는 사람이지 말자. 당장 눈앞에 있는 고통과 좌절의 순간만을 보지 말자. 좀 더 멀리, 좀 더 높이, 좀 더 깊이 하나님을 향해 날개를 펴보자. 고통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그분과 교제할 수 있는, 아버지와의 거리를 좁혀갈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나를 세워보자. 자기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여호수아에게서 실패를 끊어내는 영성을 배운다. 때로 침묵은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분을 누리고, 그분과의 동행을 새롭게 시작하는 소중한 선생이다. 여호수아처럼 옷을 찢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려 저물도록”(6) 그분 앞에 실패자의 모습으로 머물러 있는 그런 때가 필요하다. 지금이 그럴 때다.

승리(성공, 응답, 축복)에 도취되어, 갑자기 세상이 작아 보이기도 하고 만만하게 느껴지자 내 능력만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그래서 하나님 없이 내가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이 하나님 없이 출정하는 전쟁이고 세상의 수준이다. 하나님과 말씀과 사명이 있어야 할 자리에 외투와 은과 금덩이’(21)에 그만 눈이 감기자 이미 거기서 패배한 것이다.인간의 원하는 것을 가졌지만 진 것이다. 원하는 욕망과 욕심과 목표를 이루었으나 망한 것이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것을 붙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을 아무도 모른다. 오직 하나님 외에는 말이다(1). 

실패하려고 사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실패를 안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누구인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사람이다. 그러니 그가 원하는 것을 가졌어도 그건 승리가 아니다. 승리처럼 보일 뿐이다. 아간이 주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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